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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20화 (320/541)

개봉회담(12)

루우가 리안을 배웅하기 바로 얼마 전.

리안은 태사부로 견하를 불렀다.

“‘신원경제자원연구회’ 문제는 굳이 거론하지 않을 생각이야.”

“합법적으로 입국한 사람들이긴 하니까요.”

대원철도주식회사가 사업을 확장한다며 몽골을 비롯한 다이온 각지로 파고드는 것처럼, 신원경제자원연구회도 고려 본토로 파고들었다.

원철의 사업을 방해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협이 된다.

“게레센제 카간이 원철을, 더 나아가 고려의 정책을 견제하겠다고 그 아무개 연구회를 만든 건 확실해. 하지만 우리가 먼저 칼을 겨눈 이상, 저쪽에 대응하지 말라고 하는 건 침략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 ‘침략’을 하고 싶은 견하 입장에선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다.

리안은 정면에서 견하가 지향하는 바를 거부한다.

“뚜렷한 위협, 혹은 적대 행위가 드러나기 전까진 일단은 방관토록 하지.”

리안의 차분한 어조는 집무실 바닥에 내리깔리듯 울렸다.

원철의 사업을 침해하거나, 원철 조사원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든가 하면 그때는 입장을 달리하겠다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순간적으로 견하는 ‘자작극’을 통해 리안을 정책 방침을 바꿔볼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원철 직원이 해를 입었는데 그게 신원연구회의 소행이었다, 거나.

연구회 소속 직원이 고려의 민감한 정보를 빼내려다 적발되었다거나.

사건을 조작하고 함정을 파 누명을 씌우는 등의 공작……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견하는 곧바로 그 아이디어를 저 멀리 던져버렸다.

그전에도 영리한 사람이었지만, 3년 동안 리안은 무섭게 성장했다.

그런 사건이 터진다면 리안은 직접 ‘면밀한 조사’에 나설 것이다.

조사에 임하는 사람들이 ‘견하의 편’이라고 낙관하긴 어렵다. 견하 자신의 영향력도 아직 그들을 끌어들이기엔 부족하다.

배영훈 중령의 속내는 알 수가 없고, 제국정보사령부의 고태용은 ‘선을 넘었다’고 판단할지도 모르지.

합작을 이어가기엔 위험한 파트너.

그렇게 여겨지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

때문에 견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리안의 방침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철도성에서 상신하는 형식으로 나온 의견, 즉 ‘한족 관리 특구’ 안은 이번 개봉회담에서 밀어붙여 볼 거야.”

견하를 달래듯, 기세가 한층 누그러진 어조. 굳이 ‘상신하는 형식’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리안은 이 아이디어가 견하의 머리에서 나왔음을 알고 있는 듯했다.

‘네 의견 전부를 반대하는 건 아니야’라고, 그녀의 눈은 말한다.

“어차피 티베트, 탕구트, 대예, 보우슈엥, 이 4개국은 한족 반란 지역을 회복해도 치안을 유지할 방법이 없어. 그들은 좋든 싫든 다이온에 의지하겠지.”

여유가 없기는 몽골, 낭키아스, 키타이도 마찬가지다. 아니, 키타이는 울제이가 억지로라도 점령지 장악을 밀어붙이지 않을까.

“어쨌든 우리 고려군이 주축이 되어서 ‘한족 관리 특구’를 유지해야 할 거야. 우리가 가만히만 있으면 바라트도 ‘혹시’ 하면서 욕심을 부릴 위험도 있고.”

그 밖에도, 라며 리안은 계속 말을 이었다.

“‘독립 보장 선언’ 아이디어는 꽤 괜찮았어.”

“먹혀들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가식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게 받아들인다 한들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니지.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나아.”

옳은 말이다. 안 하는 것보단 낫다. 그 어떤 위선자라고 해도 ‘선한 가면’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결정적인 승리의 순간이 오더라도 그 가면을 포기해선 안 된다.

승리마저도 바라지 않았다는 듯, 선한 가면의 눈구멍으로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래야 승리를 축하하는 박수는 못 받더라도, 적어도 야유는 안 받을 테니까.

승리를 질투한 누군가의 음모에 말려들 위험도 줄어들겠지.

“티베트를 비롯한 4개국에겐 참관국 이상의 지위를 요구하진 않을 생각이야. 바라트를 지나치게 자극할 수도 있고, 4국의 반감만 살 수도 있으니까.”

네 나라 모두 군주국이다. 그렇기에 이들이 정식으로 다이온 연방에 가입하게 될 때는, 카간과 그 군주들의 관계가 분명 문제가 될 것이다.

“키타이나 낭키아스의 칸이야 원래 황실의 일원이었고, 칸은 본래 카간의 제후이자 식민지 총독이었으니 별다른 문제가 되진 않죠.”

“루우가 보르지긴 황실의 일원이기에 황제를 카간과 동격으로 두는 ‘고려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받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어.”

하지만 티베트 등 4개국의 왕실은 보르지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물론 계보를 따지고 들어가면 혈통이 조금은 섞이긴 했겠지만, 고려와 몽골의 황실처럼 밀접하진 않다.

세계 각지로 망명한 무굴 황실 쪽에 더 짙은 보르지긴의 피가 흐를 것이다.

“차차 논의할 문제지. 이번 회담에선 이 정도로 끝내자고.”

“네.”

“한동안 별다른 일은 없을 거야. 각료들이 웬만한 일은 알아서 처리하겠지. 그러니 견하 너는 그동안 성실하게 학교에 얼굴 좀 내밀고, 중간중간에 원철과 관련된 일 몇 가지만 처리해주면 돼.”

견하는 그 말에서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려는 리안의 의도를 느꼈다.

리안이 개봉에 다녀오는 동안, 다른 새로운 일을 진행하지 말라는 제약.

아주 약간의 답답함과 억울함을 느끼면서, 견하는 끄덕였다.

-효윤이나 지나가 말한 대로, 신중해질 때인가.

물러나 있으라고 할 때는 물러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얌전히 끄덕이고만 있던 그때,

리안이 기습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카라코룸에서 류성일을 만났다면서?”

이 시점에 그런 질문이 들어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견하는 놀랐다.

“……네.”

리안 정도 되는 수완가가 견하의 행적을 추적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지?”

“동명-카라코룸 철도 노선이 괴한들의 습격을 받는 문제를 논의했어요.”

솔직하게 답해야 한다. 리안은 이미 다 알면서 물어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왜 귀국하고 바로 류성일과의 면담을 보고하지 않았는지 추궁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알타이 자유 공화국을 멸망시켰다 해도, 잔당까지 깨끗하게 청소하는 건 별개 문제니까……. 습격은 그들의 소행이겠지?”

“그들만의 소행은 아니었어요. 주민들도 가담하고 있더군요.”

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가, 잠시 뒤에 숨을 들이마시며 끄덕였다.

“그럴만하지. 관세동맹부터 다이온 연방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행보는 어떤 사람들에겐 이미 침략처럼 비치고 있었던 건가.”

리안의 그러한 소감을 부정할 수는 없었기에, 견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래, 그 밖에는 무슨 이야기를?”

“자신도 원철의 사업을 돕기 위해 카라코룸의 재정 일부를 투자하겠다더군요.”

“호오.”

“그리고 자신이 뭔가 누나의 심기를 거스른 건 아닌지 염려하는 눈치더라고요. 동명이나 태사부의 분위기를 자신에게 전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던데요.”

리안은 눈을 감았다.

그 늙은이가 견하를 그런 식으로 조종하려 든 건가.

눈을 뜬 리안은 다시 견하에게 물었다.

“그래, 너는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일단은 그렇게 해주마 하고 나왔죠. 지금은 누나 앞에서 류성일의 부탁을 다 털어놓고 있지만.”

견하가 씩 웃자 리안도 킥,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견하는 이제는 물어볼 만한 상황이 되었다는 판단이 섰다.

웃음 사이로, 견하는 지금껏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어떻게 카라코룸으로 쫓겨난 거예요, 류성일은?”

여전히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리안은 어떻게 대답해줄 것인지 생각한다.

류성일과 안세규의 위험한 제휴.

그들이 꾸민 음모.

언젠가 알려주긴 해야겠지만, 좀 더 많은 증거와 준비가 필요하다.

류성일과 안세규를 일거에 섬멸할 준비이자, 두 사람이 제거되어도 제3 제국의 체제가 흔들리지 않도록 할 준비가.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기에 리안은, 일단은 말해줘도 무방한 것만 말해주기로 한다.

“황제의 뜻이야, 류성일이 카라코룸으로 간 건.”

“루우가요……?”

그건 정말 의외였다.

리안이나 제국입헌당, 미승휴의 옛 관료들, 구 민국정부 등 동명의 다양한 정파 간 문제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건 리안조차 어쩔 수 없는 문제인 걸까?

“나도 황제의 뜻에 따라 일단 류성일을 보내놓긴 했어. 하지만 루우는 그 이상 중요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아. 그 애도 더 아는 게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제가 좀 파볼까요?”

“아니. 견하 너는…… 류성일을 ‘기만’해주고 있으면 돼. 뒤에서 캐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일단 표면적인 거래를 시작한 제가 류성일을 안심시킨다는 거군요.”

“그렇지.”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나서, 리안은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견하에게 다가갔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매번 이럴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팔을 부드럽게 견하의 목에 감고, 입을 맞췄다.

조금, 거칠게.

이윽고 딱 호흡이 닿는 거리만큼 멀어진 그녀는, 수줍은 듯 웃으며 인사했다.

“……다녀올게.”

***

리안은 달콤한 기억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반쯤은 잠들었던 것 같다.

“언니.”

효윤이 살짝 흔들어 깨우고 있었나 보다.

리안은 응, 하고 대답하면서, 양 손바닥으로 뺨을 두드렸다.

정신을 일깨우려는 동작이었지만, 혹시 침이라도 흘리지 않았나 점검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상 없음을 확인한 뒤 리안은 차에서 내렸다.

여기는 칸발리크.

개봉으로 가기 전에, 리안은 중간 지점인 여기서 몽골의 태사 볼로드를 만나기로 한 것이다.

“태사 간 회담은 두 번째인가…….”

지난번 회담은 불편한 느낌만 주고받은 채로 끝났었는데, 이번엔 양쪽이 만족할 만한 이야기가 나오길 바라본다.

바람대로 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예비회담인데,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되지 않을까요?”

긴장한 것처럼 보였나. 리안은 효윤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 이 예비회담은 어차피 의례에 불과한 일일지도 몰라. 하지만 아예 중요성이 없는 일도 아니야. ‘게레센제의 궁정’ 안에서 우리에게 그나마 우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은 볼로드와 그 일파 정도야.”

데렘칭을 비롯한 몽골 제국입헌당 세력이나, 일반 시민들은 고려에 매우 우호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래도 게레센제의 궁정 ‘바깥’에 위치한 사람들이라고 봐야겠지.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 좋은 일’을 해줘야 해.”

동명에서 출발한 열차가 서쪽으로 해안을 따라가다가 키타이의 영토로 접어들기 전, 그 중간 지점에 몽골의 수도 칸발리크가 있다.

만약 리안이 이런 예비회담을 하지 않기로 하고 그냥 개봉으로 직행했다면, 마치 그녀가 볼로드를 무시한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태사는 일단 칸발리크에 들러서 볼로드 타이시와 회담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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