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회담(10)
루우는 시레문이 진행했던 실험의 ‘가장 성공한 사례’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였다.
‘그녀의 탄생 전 모든 실패작들에 비하면’ 성공적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실험 중에 죽어 버린 피실험체, 실험 직후 죽어 버린 피실험체, 실험 후로도 얼마간 비실거리며 살다가 죽어 버린 피실험체.
루우는 그런 피실험체들에 비해 오래 살아남았을 뿐이다.
19년.
과연 얼마나 오래 남았을까.
언제 루우의 생명이 끝날까.
“신이 진행하는 연구도 폐하를 위함입니다. 그 점은 알아주시길.”
투글룩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깃든다. 그 절박함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 루우는 끄덕였다.
그녀 자신도 그 때문에 황제의 권력을 활용해 이단 관련 자료를 긁어모으는 것이니까.
***
황궁으로 돌아가는 차 안.
루우는 대화를 허락하지 않을 분위기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효윤도 전에 리안에게서 들었던 루우의 몸에 관련된 문제나, 가정사로 머리가 복잡했기에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동안 침묵이 차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중간쯤 왔나, 하고 효윤이 생각했을 때, 루우가 질문을 던졌다.
“타이시가 뭔가 이야기해주지 않았어?”
“뭘?”
“주견하하고는 어떻게 되어가는지.”
아까 투글룩과 나눈 이야기에 대해 말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주견하의 이름이 나온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가슴 어딘가가 아렸다.
“……별달리 들은 건 없어.”
루우는 턱을 괸 채 창밖을 보고 있다가, 흘끔 효윤의 얼굴을 살핀다. 그러나 그 시선은 오래 머물지 않고 다시 창밖을 향했다.
“깊어진 모양이더라, 두 사람.”
루우의 에두른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효윤은 모르지 않았다.
“잘됐네, 뭐.”
“잘된 건가?”
“안된 건 아니잖아?”
“‘너한테도 잘된’ 거냐고 묻는 거야, 최효윤.”
“……나한테 잘된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
한숨을 내쉰다. 감정을 털어내려는 듯.
“그냥 이걸로 추억이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서 뭔가 감지할 순 없었지만, 루우는 오늘 필요한 게 뭔지 직감했다.
“황궁에 들어가면, 오늘 저녁엔 좀 마시자.”
“……그래.”
***
제국정보사령부에서 견하에게 보낸 ‘귀띔’은, 태사에게는 ‘보고’로 올라갔다.
내정으로도 외정으로도, 골치 아픈 일들뿐이다.
게레센제가 만들었다는 신원경제자원연구회.
그 활동 내용이 은근히 신경을 거스르긴 하지만, 리안이 내릴 수 있는 방침도 견하의 방침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갈등을 피하는 쪽에 중점을 두도록.”
다이온 연방 내 권력 관계의 문제는 그 정도 명령만으로 어떻게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리안이 좀 더 심각하게 여기는 문제는 따로 있다.
류성일, 그와 결탁한 안세규.
견하가 카라코룸까지 가서 류성일을 만난 정황은 파악했다. 그러나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른다.
견하는 만났다는 사실 자체를 보고하지 않았다.
견하가 뭔가를 꾸미는 건 알고 있다. 그가 철도성 장관 임병욱과 함께 동몽골 각지를 방문한 것도 파악했고, 키타이와 낭키아스에서 오가는 움직임도 대략적으로는 안다.
그래서 경고를 보냈다.
견하는 일단 움직임을 멈추거나 속도를 늦춘 듯하다.
연인을 감시하면서 또 일은 일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게…… 굉장히 서글프다.
저렇게 경고를 받고도 류성일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는 게 서글프고.
속이 상했지만, 견하를 추궁하기 전에, 류성일 주변을 캐낼 수 있을 만큼은 캐놓고 싶다.
어쩌면 견하가 ‘때가 되면’ 그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고.
견하가 무언가를 알아차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어쩌면 자신은, 마음 깊은 곳에서는 류성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서 안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1929년 4월의 정세가, 안세규와 류성일의 각본대로 돌아간 것이라면?
미승휴의 죽음뿐만 아니라, 견하 부모님의 죽음에도 류성일과 안세규가 관여했다면?
견하가 그걸 알게 되었다면?
견하는 참을 수 있을까?
복수를 말리는 게 아니다.
인내하며 두 사람을 잡아낼 때를 기다릴 수 있을까, 그걸 우려하는 것이다.
만약 류성일과 안세규를 확실히 몰아붙일 증거와 명분이 없다면, 역으로 당할 수 있다.
게다가 마음엔 안 들어도 그 둘이 현 정권을 지탱하는 기둥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둘을 제거했을 때 그냥 공멸로 나아갈 수도 있고.
그러니 견하가 아직은 진실에 도달하지 않기를.
진실에 도달했더라도, 인내심을 발휘해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그런 초조함 속에서 리안은 칸발리크로 내쫓은 류성일을 감시하고, 류성일이 본국과 취하는 연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안세규의 발밑에 돌부리를 놓을 기회를 노린다.
이런 일은 효윤이 맡기엔 적절하지 않다.
리안은 배영훈 중령을 불렀다.
“내무장관 안세규에 대해 좀 조사해 봐.”
두루뭉술한 명령이다. 배영훈은 회사원 같은 그 얼굴에 어울리는 성실함으로 물었다.
“내무장관을 조사해 보라고 하신다면, 내무부 업무와 관련된 것입니까, 아니면 고려국민당과……?”
물론 그도 두루뭉술하게 되묻진 않는다.
“고려국민당 쪽에 더 가깝겠지. 보다 정확하게 지정해 주자면 1929년 4월 당시, 고려국민당이나 구 민국정부와 관련된 행적을 조사해 줘. 제국정부의 인사들과 결탁하진 않았는지, 더 깊이 들어가서 외국에서의 활동은 어떠했는지까지.”
제국정보사령부 쪽이 이런 일에 더 잘 맞겠지만, 리안은 될 수 있으면 기밀을 유지하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배영훈은 처음 내전에 말려들어 갈 때를 떠올리며, 태사의 집무실을 나왔다.
***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미행이 따라붙는다.
아무리 행인처럼 위장해도, 미행당하는 쪽에서 긴장하고 있다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생명에 위협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일단 큰길을 걷고 있다면 그렇다.
번화가에서 육군 중령이 살해당한다면, 태사나 배영훈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자들도 수사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오히려 배영훈의 죽음은, 태사가 얼씨구나 좋다고 정적들을 탄압할 계기가 된다.
그러니 자신은 안전하다, 고 배영훈은 되뇐다.
하지만 협박…… 정도는 가능하겠지.
혹은 배영훈의 조사 과정을 추적해가면서, 그를 앞질러 중요한 자료를 미리 빼돌린다든가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이대로 계속 뒤를 밟히면 성가시다.
골목으로 유도한다. 마치 ‘여기서 누군가와 접선하기로 했다’는 듯.
하지만 동명은 고려의 수도답게 골목에도 보는 눈이 많았다. 그래서 배영훈은 더 깊이, 미로의 중심부를 향하듯이 들어갔다.
미행하는 사람과 자신, 딱 두 사람만 남을 때까지.
그렇게 적당한 골목을 찾았다 싶었을 때, 배영훈은 기습적으로 몸을 돌렸다.
“……이런.”
미행은 사라지고 없었다. 모습을 감춘 게 아니다. 아예 중간에 미행을 단념하고 떠났다.
상대는 ‘배영훈이 미행을 눈치채고 유도한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이건 전적으로 배영훈의 실수였다. 상대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할 움직임을 보여야 했는데, 미행을 제거하는 데에만 몰두해버렸다.
“어쩔 수 없지.”
미행은 더욱 교묘해질 것이다. 물론 그만큼 배영훈의 신경을 건드리는 데에도 신중을 기하겠지.
효과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라고 아쉬움을 담아 중얼거리며, 배영훈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
우흥섭은 오랜만에 장해진과 만났다.
엄한 대학교수를 연상시키는 우흥섭의 외모와 달리, 장해진은 어느 동네에서나 볼 수 있는 푸근한 아저씨 같은 인상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진리는 통한다. 어쨌든 장해진도 숙군을 무사히 통과해 대장에 이른 자다.
결코 얕볼 순 없다.
“개봉회담의 예비라는 구실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만나기도 쉽지 않았겠어요, 그래.”
우흥섭이 활짝 웃으며 다가오자 장해진도 마주 웃어준다. 두 사람은 딱히 경쟁 관계가 아니다. 본국에서 키타이와 낭키아스 두 전역의 토벌 성과를 비교한다든가, 확실한 전과를 재촉하는 건 아니니까.
태사도 한족 반란 토벌전에는 영 미적지근하고.
그러니 허심탄회한 대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렇게 만난 김에 저녁이라도 같이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각자 임지로 돌아가면 다음엔 제국최고회의에 보고할 때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좋지요.”
그렇게 개봉의 고급 음식점에서, 두 장군만의 회담이 먼저 시작되었다.
“토벌 작전은 우 장군의 낭키아스 파견군과, 우리 키타이 파견군의 연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장해진의 말에 끄덕끄덕하면서, 우흥섭은 술을 들이켠다.
괜히 던지는 말은 아닐 것이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다이온의 정세 속에서, 우흥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아닐까?
그래서 우흥섭도 은근히 떠본다.
“결국은 우리 고려군이 다이온 정세 안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 뜻이군요?”
“그렇지요. 황제 폐하의 뜻도 거기에 있는 듯하고.”
여기서 우흥섭과 장해진 사이에 의미심장한 시선이 오간다. 말이 이만큼 나왔으면 더 떠볼 필요는 없다.
대화의 내용은 좀 더 노골적으로 변해간다.
“장군께서도 폐하의 칙령을 받으셨군요?”
“어흠, 공식적으로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만.”
“밀칙이란 게 대개 그런 모양입니다.”
잠깐 다른 이야기가 오간다. 술이 아주 고급이라는 둥, 고기의 육질이 아주 좋다는 둥, 한족들이 음식은 참 잘 만든다는 둥 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긴장을 풀고 나서, 장해진은 다시 화제를 돌렸다.
“저는 울제이 칸을 지원해줄 듯한 행보를 보이면서, 그가 낭키아스 궁정에 개입하도록 충동질하라는 밀칙을 받았습니다. 뭐 그 밖에도 관중 분지나 사천 분지 내 정세를 조사하고 특구를 설치할 준비를 하라는 말씀도 있었죠.”
“……한족 반군이 장악했던 지역에는 군정이 실시될 예정인데, 거기서 우리 고려가 주도권을 잡는다는 구상이 있더군요.”
“아, 우 장군도?”
“주둔지 건설부터 유지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본국이 그걸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지출을 감당하려면 그, 다른 이익이 확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치적 이익 말이죠.”
“정치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대충 그런 거겠죠.”
“저는 글쎄요…… 비용도 비용이겠지만, 과연 그 과정에서 키타이나 낭키아스가 가만히 있을까, 다른 주변국들도 가만히 있어 줄까, 그게 걱정입니다.”
“대놓고 우리 고려의 이익을 챙기겠다는 움직임이긴 하죠.”
“게레센제 카간이야 우리 황제 폐하와 고려에 빚이 있으니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다고 해도, 울제이 칸이 고려의 영향력 증대를 두고 볼 사람은 아니죠.”
울제이의 야심이야 알 사람은 다 안다. 그 야심에 어떤 한계를 두고 있는지가 미지수일 뿐.
“그러니까 울제이 칸 앞에서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흔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미끼를 물까요?”
“장 장군, 동아시아 일대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드높은 이때, 울제이가 그 흐름을 정면에서 거스르는 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어렵겠죠.”
“울제이 칸은 아마 우회할 겁니다. 고려의 외교 정책에 어느 정도 따라주면서, 기반을 쌓고자 하겠죠.”
게다가 울제이에게 낭키아스를 장악할 기회는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도저히 물지 않을 수 없는 미끼.
그리고 울제이는 이런 계산도 하겠지. ‘미끼를 물더라도 나는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다.’
실제로 가능하기도 할 테고. 그러니 울제이한테만 좋은 일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