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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17화 (317/541)

개봉회담(9)

“동명지하철에서 얻을 수 있었던 자료는 충분치 못했나?”

지하철 전투 이후 철저한 ‘청소’ 작업이 행해졌었다. 그래서 지금은 기능 대부분이 복구된 평범한 지하철이다. 하지만 또 비슷한 사태가 일어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대규모 인원 확충, 신형 설비의 보급으로 감시망을 강화했다.

그 청소 과정에서 다수의 파멸인 사체를 얻었고, 신종의 씨앗이 ‘저쪽 세상’으로 퇴거하면서 남은 흔적에 대한 연구도 이뤄졌다.

칸발리크에서 일어난 일보다 규모가 작긴 해도, 어쨌든 그런 자료를 입수한 것 자체가 큰 수확 아니었을까?

“연구가 진행 중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더딥니다. ‘다른 세상’이라고 애매하게 규정하고 있을 뿐, 자세한 사항은 모두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추측과 이론만 무성합니다.”

「쿠빌라이 문서」의 기록.

성리학자들의 연구.

견하처럼 ‘붉은 광경’을 본 사람들의 개인적인 목격담.

그런 것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연구다 보니 그렇다.

투글룩의 말을 곱씹어 보던 루우의 머릿속을 문득, 어떤 생각이 스친다.

“그대는 몽골에서, 아버지 카간이 지시한 연구도 감독했을 테지.”

“그러합니다, 폐하.”

“그곳에서의 실험도 이와 같이 과격했던가?”

투글룩은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루우는 금빛 눈동자만 돌려 그를 바라본다.

대답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는 눈빛.

투글룩은 그녀의, 아버지를 닮은 듯하면서도 자신만의 위엄을 뿜어내는 그 눈빛 앞에서 마른 침을 삼켰다.

시대가 바뀌면, 사람의 세대도 교체된다.

새로운 세대는 이전 세대가 예측하기 힘든 면모를 드러낸다.

시레문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대우를 루우에게 기대해선 안 될 것이라고, 투글룩은 직감했다.

“……선대 카간께서 명하셨던 연구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것입니다. 지금 그러한 방법을 택하지 않는 것은 기반의 부족도 있지만, 태사가 그러한 일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투글룩은 거짓을 고하진 않지만 말을 아낀다. 그러면서 태사의 방침을 핑계로 삼는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투글룩이 표현을 신중하게 고르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시레문이 했던 실험은 루우의 어머니, 카간과 함께 세상을 떠난 그분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

“아버지 카간의 치세 때 연구가 과격했던 건, 내 어머니와 관련이 있나?”

투글룩의 얼굴에 낭패감, 혹은 올 것이 왔다는 감정이 스친다.

“과격한 연구가 카툰께서 의식을 잃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카툰께서도 동의하셨다곤 하지만…… 그때 행해졌던 연구는 사람이 신종의 영역을 넘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

토칸은 떨리는 손을 감싸 쥔다.

-신수덕도 나만큼 놀랐을까?

알 수 없다. 그 남자는 자신의 감정마저도 마음대로 입었다 벗을 수 있는 옷처럼 여기는 것 같다.

놀랐다 해도 드러내는 일은 없을 테고, 아마 지금쯤이면 ‘이 정보를 어떻게 유용하게 활용해볼까’하고 궁리 중이겠지.

토칸이 탄 화물열차는 크로아티아, 또는 일리리쿰이라고 불리는 지역 어딘가를 지나고 있다.

부하들과 함께, 계획을 수행하러.

그런 부하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토칸은 구석진 곳, 어둠 속에 앉아 홀로 경악을 되씹었다.

포획된 신종.

거기서 직접 영혼을 추출한다던 벨리사리오스의 말.

그의 날개.

가시면류관.

성자처럼 거룩하게 빛나던 후광.

-허세일 가능성은?

그럴 수도 있다. 혁세주가 있던 ‘저쪽 세상’은 신종만이 지녔던 영혼을, 자신들도 품으려 하다 파멸에 이르렀다.

만약 우리 세상에서도 같은 시도를 한다면 같은 결말에 이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상식이다.

그러니 벨리사리오스는 그럴싸한 거짓말과 연출로, 감히 신수덕과 토칸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신 같은 모습을 내보였을 수도 있다.

그가 신종이라 주장하던 거인도 그저 특수하게 생긴 파멸인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허세가 아니라면?

토칸이 칸발리크에 나타나게 했던 파멸인들 뿐만 아니라, 지금껏 발견된 모든 파멸인들은 뒤틀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가 붕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벨리사리오스가 ‘신종’이라 주장했던 거인의 외양은…… 이가 붕괴했다고 보기엔 너무나도 번듯했다. 적어도 인간의 기준에선.

벨리사리오스의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토칸은 두 가지 점에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는 로마 또는 벨리사리오스의 개인 소유 연구소에서 이룬 성과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나다는 것.

둘째는…… 토칸이 자신이 지닌 능력의 기원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종을 직접 포획할 수 있고, 거기서 영혼을 추출해 이단의 힘으로 삼을 수 있다면.

실패한 ‘저쪽 세상’의 기술은 이미 뛰어넘어 버린 게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토칸이 수행하려는 계획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열차는 로마령 일리리쿰을 떠나 신성제국령 알레마니아 동남부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고 나면 토칸과 부하들은 흩어져, 각자 경로를 잡고 이동해 신성 제국의 수도 엑스라샤펠에 집결.

그곳에서 ‘공작’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걸 통해 벨리사리오스를 압박,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로마의 이단 기술이 그 정도가 되었다면 벨리사리오스는 코웃음만 칠 수도 있다.

일단은 관성처럼 계획을 진행하고는 있지만, 과연 이게 먹힐지는 토칸 자신도 부정적이었다. 부하들에게는 그런 고민을 내색하지 않았다.

더 생각해 보았자 소용없는 일이기에, 토칸의 생각은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카간이 진행했던 실험은, 과연, 그랬던 거군.

토칸도 그 실험의 피실험체 중 하나였다.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본다.

이제야 왜 자신이 다른 이단들처럼 무기를 소환해 오는 게 아니라, 신체를 변형시켜서 무기를 만드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간 보고 듣고 수집해 왔던 모든 정보가 토칸의 머릿속에서 아귀를 맞춰간다.

-시레문은…… 쿠빌라이의 금기를 어겼다!

금기를 마구 파헤친 끝에 신의 영역에 도전했을 것이다.

세계대전으로 수도를 잃고 멸망 직전까지 몰렸던 시레문은 몽골의 안보에 대단히 집착했다고 한다.

한족의 명나라가 하늘을 뚫어 버릴 기세로 진군해올 때도 빼앗기지 않은 칸발리크를 빼앗겼으니, 그 충격은 컸겠지.

이후 드러난 시레문의 안보 집착 경향은 볼로드의 성향과 잘 어울렸고…… 둘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단 연구에 투자했다.

토칸은 새삼, 증오심이 끓어올라 주먹을 부르쥐었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기 위해, 시레문은 몽골과 고려의 오랜 전승 속 신종을 융합하려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내, 카툰이 희생되었지만.

시레문은, 결과물을 얻었다.

토칸은 루우 테무르의 힘에 대해 알고 있다. 신문에서든 극장 상영으로든 충분히 보았다.

루우 테무르라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카툰뿐만 아니라 토칸을 비롯한 수많은 희생이 따라야 했다.

벨리사리오스는 어떤 희생을 치렀을까. 어쩌면 몽골보다는 적을지도 모르지. 그들의 실험은 지원자를 받아서 진행하는 것 같으니까.

몽골은 자기처럼 무연고자들을 마구잡이로 끌어다가 실험했지만.

어쨌든 벨리사리오스는 몽골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벨리사리오스는 그 이상을 바란다.

소름이 돋았다.

벨리사리오스는 자신이 신의 영역에 도달한 데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신의 비밀을 남김없이 캐내고, 그가 말했던 대로, 모든 인류를 신을 향해…….

-그건, 파멸한 ‘저쪽 세상’이 밟았던 과정 그대로가 아닌가.

히죽, 토칸은 웃었다.

경악은 희열로 바뀌어 간다.

실패해도 나쁠 건 없고, 성공한다면 예상치 못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다.

-유럽에 좀 더 머물러 봐도 좋겠어.

***

투글룩과 루우, 효윤은 지구 반대편에서 ‘고려의 이단 연구가 뒤처졌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벨리사리오스의 성과가 얼마나 앞서 나갔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실험실에 서서 계속 이어나갈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황제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실험실을 정리하는 직원들에게 방해가 되고.

“신종의 영역을 넘봤다면…… 늑대와 사슴, 그리고 용과 관련된 건가?”

연구소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쉴 수 있는 휴게실. 그곳에 도착한 루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투글룩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늑대, 사슴, 용. 그것들이 기묘하게 뒤섞인 거대한 형상.

신환도역 전투에서 허동주를 패배시켰던 그것.

효윤은 그 모습을 떠올리며 루우를 바라본다.

그 거체가 신종의 하나였다면, 루우는 분명 신종에 가장 근접한 이단이 아닐까.

“그러합니다. 폐하께서 소환하실 수 있는 그것은, 선대 카간께서 염원하시던 ‘이단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영역’이라 생각됩니다.”

신종이 가문에 내린 은총을 마음대로 뒤섞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 신종에 직접 닿는다.

신종의 모습 자체를 이단의 능력으로 소환해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신성모독적이라 할만하다.

“모후께선 그 대가로 그렇게 되신 건가.”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에 효윤은 조금 놀랐다.

‘그랬던 게로군’, 하고 단순히 알아차렸음을 나타내는 어조였다.

“계승 순위만 놓고 보면 짐의 어머니는 아마 아버지 카간보다 더 고려 황위에 가까우셨을 거야.”

고려와 몽골 간 이루어진 수많은 통혼으로, 이 두 나라는 웬만한 귀족 가문들까지 그 피가 서로 섞여 있었다.

보르지긴의 직계 황족인 시레문뿐만 아니라, 루우의 어머니도 따지고 보면 고려 황실의 방계에 해당했다.

“어쩌면 짐은, 어머니가 얻었어야 할 고려 황위를 열망했던 건지도 모르지.”

말에 아주 희미한, 씁쓸함이 섞인다.

효윤은 모르겠지만, 루우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쓰러져서 의식을 잃은 채, 기계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보며, 어린 루우는 어머니가 깨어나 자애로운 목소리로 자신을 불러줄 날을 기다렸다.

기다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모된다.

루우도 분명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흘리는 눈물은 무한하지 않았다. 마음에는 굳은살이 박였고, 어린 루우가 품었던 희망도 눈물과 함께 어디론가 흘러가 버렸다.

몽골을 떠날 무렵에 루우는 이미 어머니가 회복하지 못하리라 단념하고 있었다.

“카툰께서 쓰러지신 후 진행한 연구는, 카툰의 회복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선대 카간께선 더더욱 절박해지셨죠.”

루우는 허탈하다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부황께서도 소용없는 일을 하셨군.”

“폐하, 신이 폐하의 말씀에 감히 반박하는 불경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용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소용이 있었다는 건가, 투글룩?”

“그 실험들은 폐하를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잠시 생각하다, 루우는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루우의 수명.

예측할 수 없는, 루우의 남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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