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회담(6)
리안은 허동주와의 이론 싸움을 실제 정쟁으로, 내전으로까지 끌어오며 그 우위를 입증했다.
자신이 패배시킨 그 사상이 발아래에서 꿈틀대고 있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불쾌할 수밖에.
“각하께서 염려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세운 이론은 한계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세계 제패에 이르기까지 무제한적 투쟁을 상정한 허동주의 이론과는 다릅니다. 게다가 저의 이론은 민중이 아니라 황제 폐하의 존재를 기둥으로 삼고 있습니다.”
불손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반론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과, 동지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리안은 그저 건성으로 끄덕인다.
“그래, 그래야지. 살고 싶으면. 그런데 말이야, 한 소장이 자기 말대로 ‘시키는 대로 이론을 자아내는 자’라면…… 나를 위해서도 이론 하나쯤 만들어줄 수 있지 않나?”
여기선 망설이는 태도를 보여선 안 된다.
싫다는 듯이 비쳐서도 안 된다.
주먹을 꽉 쥐고, 즉답한다.
“무엇이든지, 분부하시는 대로.”
“AN연구소에는 감찰국 자금뿐만 아니라 황제 폐하의 내탕금도 들어갔다지? 관련 분야의 석학들과 쓸만한 연구 자료들은 죄다 그러모은 것 같던데, 그거, 나도 쓸 수 있지 않나?”
“가능합니다.”
“그럼 이렇게 하지.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해서 내 아이디어를 좀, 그럴싸하게 포장해 줘. 나도 나름 계획이라는 걸 세웠다고.”
그렇게 말하며 리안은 씩 웃었다.
그녀의 어떤 면에 견하가 반했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자신은 도저히 그녀를 좋아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웃음이었다.
“이름하여 「대타협 계획」. 이것으로 다이온의 한족 정책은 전환점을 맞는다. 다이온은 삼중제국(三重帝國)이 될 거야.”
갑작스레 주입된 정보에 당황하여 눈을 굴리는 재연에게, 리안은 여유를 두지 않고 더 많은 정보를 때려 넣는다.
“그리하여 우리 폐하께선 고려의 황제, 몽골의 카간, 한의 천자가 되신다.”
***
상경에서 나눴던 견하와 고태용의 논의는, 이후 동명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게레센제 카간은 볼로드 태사를 비롯한 대표단을 보내는군. 개봉회담 참석 목적은 한족 지역을 순방하면서 반란 토벌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고.”
“울제이 칸의 역할은 복잡합니다. 그는 몽골의 내무장관이자 전쟁 장관이면서, 동시에 한족 토벌의 사령관이기도 하죠. 그런 위치에서 보자면 개봉회담에서는 지금까지의 성과를 보고하는 입장이지만, 동시에 키타이의 주인이니 회담을 개최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어쨌든 칸이나 태사급이 나오는 만큼 낭키아스의 바이다르도 올라올 수밖에 없겠군. 아무리 어린애라고 해도 말이야.”
“낭키아스 체제의 불완전함은 그런 어린애에게 최종결정권을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죠.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우리 정보부는 바이다르를 수행한 정부 관료들에게 접촉해보겠네. 공작이 먹혀들어 갈 여지를 찾아내야지.”
“부탁드립니다. 바이다르 칸에게는 제가 직접 접촉해보겠습니다. 칸발리크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으니까요. 경계심을 허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번 기회에 호감을 살 수 있다면 좋겠군요.”
“주 국장은 잘 할 수 있을 걸세. 나도 자네를 꽤 호의적으로 생각하는걸.”
어쨌든 바이다르의 호감을 살 수 있다면 일은 굉장히 수월해지지, 라고 고태용은 덧붙였다.
고태용 앞에서 조금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길 잘한 것 같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제국정보사령부의 경계를 사는 것보다는 그들의 우위를 인정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언젠가 때가 온다면 ‘서열’을 확실히 해둬야겠지만.
그때까진 주의할 점이 두 가지 있다.
고태용을 비롯한 제국정보사령부가 감찰국의 위에 있다고 착각하지 못하게 할 것.
제국정보사령부가 이 계획에서 주도권을 쥐고 세력을 불리지 못하게 할 것.
두 가지 모두, 하나의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고태용뿐만 아니라 제국정보사령부 내에 인맥을 쌓아 두어, 여차하면 감찰국이나 정치경찰실로 빼내도록 하자.
물론 견하가 직접 나서면 너무 눈에 띄니까, 나제홍을 이용하는 게 가장 좋을 듯하다.
아예 견하의 밑으로 제국정보사령부를 통합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
그런 계획은 삼킨 채, 견하는 미소를 띤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고태용도 어느 정도는 견하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티베트, 탕구트, 대예, 보우슈엥. 이 4개국의 지위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참관국이 될 겁니다. 물론 그 권한과 영향력은 고려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요.”
“어쨌든 공식적으로 다이온의 ‘보호’를 받는 입장이 되는 데다, 그런 위치라면 내정 간섭도 덜할 테니 저들도 만족하지 않을까?”
“예. 몽골 카간과의 관계도 전통적인 중화권 국가와의 조공-책봉 관계를 벗어나지 않을 겁니다.”
“끝까지 그렇게 둘 생각은 아니겠지?”
“탕구트와 보우슈엥은 정식 회원국을 거쳐 단일 다이온 체제에 통합시킬 계획입니다만, 대예와 티베트는 상황을 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바라트가 문제군.”
“예. 완충지대로 두지 않고 다이온과 바라트가 직접 국경을 맞댄다면, 향후 외교적인 마찰이 예상되는지라.”
“안 그래도 아즈텍 대륙 쪽 정세가 시끄러운데 쓸데없는 마찰은 피하는 게 좋겠지.”
고태용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로 내려간다.
공책 한쪽만 한 크기의 그 지도 위에는 몇 개의 어설픈 원이 펜으로 그려져 있었다.
“화하총독부, 파촉총독부, 형초총독부…… 이름들은 참 그럴싸하구만.”
“아직 ‘총독부’라고 부르시는 건 피하는 게 좋습니다. 어디까지나 ‘한족 관리 특구’라는 이름을 쓸 거니까요.”
“핫, 자네 그 능청스러운 면은 내가 오히려 본받아야겠군.”
한족 관리 특구로 예정된 지역은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서부 지역도 잠식하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다른 참관국 4개국의 영토 깊숙한 곳으로도 뻗어 있었다.
“이게 영토 침탈이나 주권 침해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해야 합니다. 다이온은 어디까지나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실제 국경 및 행정권과는 별개로 ‘특구’를 설치하는 거라고……. 외무성에서도 설득에 힘쓸 테지만 정보부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아, 진짜 할 일 많구만. 그래 철도성도 여기까지 철도를 이어보겠다고?”
“카라코룸과 마찬가지로, ‘여차하면’ 출동해야 하니까요.”
누가 출동하는지는 굳이 입에 담지 않는다.
“사업 수익은?”
“원철의 평가에 따르면 꽤 긍정적인 모양입니다만.”
“훗날 ‘총독부’가 건설되면 수익성은 더 높아지겠지. 좋아. 우리 제국정보사령부에서 좀 남는 자금을…… 이 사업에도 투자해보지. 우리도 뚜렷한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기 힘들어.”
새삼, 견하는 이 식민지 계획이 하나의 ‘사업’임을 느낀다.
대원철도주식회사가 건설할 철도는 그저 지도 위에 그려진 ‘선’이 아니다.
거점과 거점을 잇는 보급로에만 그치는 것도 아니다.
가늘긴 하지만, 그것 역시 ‘면’이다.
철도에는 부속지가 있으니까.
그 부속지의 면적은 곳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곳은 신도시를 건설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이 신도시 건설 사업에는 다양한 건설업체가 뛰어들 테고.
철도 운반에 의존하는 탄광이나 철강 산업도 상당한 이윤을 낳는다.
누구에게든 대원철도주식회사는 매력적인 투자처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기업을 통해서 투자하시는지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아무리 제국정보사령부의 권한이 크다고 해도, 리안의 눈이 닿고 있는 지금은 직접 투자를 늘려나가는 건 어렵다.
“그리고 말인데, 우리 제국정보사령부에서 원철의 임원 일부를 추천할 수는 없을까?”
매력적인 사업에는 투자 이상의 야심을 지닌 자들도 꼭 이렇게 들러붙기 마련이다.
견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며 덧붙인다.
“어려울 건 없습니다만, 총재 자리까지는 아무래도 힘들겠습니다. 그건 철도성의 체면이 달린 일이라……. 게다가 ‘서부군 사령부’ 쪽에서도 그런 눈에 띄는 행동은 견제하지 않을까요.”
서부군 사령부는 경호 병력을 파견해서 철도 건설 사업을 돕고 있는 만큼, 이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건 불가능하다.
제국정보사령부는 그럴만한 병력이 없고. 이러한 사실은 고태용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물론 견하는 충성경쟁이나 파벌 다툼을 절묘하게 이용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래. 그 이상의 행동은 우리도 태사 각하의 눈치가 보여서 안 돼. 그쯤에서 만족하도록 하지.”
고태용도 동의하며 끄덕인다. 그러고선 소파 위에 몸을 늘어뜨린다.
“여기까지 논의한 내용을 우리가 ‘1차 개봉회담’에서 거둘 목표로 마무리 짓지?”
“그 이상은 무리겠습니까?”
“초조한 건 알아. 저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네 기반을 다질 방법을 찾겠지.”
게레센제는 자기 기반을 다지고, 바이다르는 점점 나이를 먹는다.
게레센제가 울제이의 영지를 몰수하고 그를 실각시킬 방법을 찾아낸다면? 혹은 적어도 정부 관리 중 하나 정도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면?
볼로드의 존재도 영 미덥지 않다.
게레센제가 먼저 볼로드를 실각시킨 후 자기 사람으로 칸발리크 내각을 구성해도 문제고…… 볼로드가 ‘배신’할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볼로드가 다이온에 고려를 포함시킨다는 야심을 깔끔하게 포기해버린다면? 루우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린다면? 루우보다 게레센제가 낫다고 판단하게 된다면?
“아무리 초조해도 이 공작, 이 계획은 몇 년을 잡고 진행해야 해. 적에게는 대책을 세울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여야겠지만, 상황을 지켜보는 제삼자들한테는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일이야. 이 일의 성격이 그래.”
그러니까 ‘2차 개봉회담’을 염두에 두자고, 고태용은 제안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들은 바보가 아니야. 행동에는 의도가 있고, 우리가 아무리 의도를 부정해도 저들은 읽어. 그러니 ‘1차 개봉회담’에서 모든 야심을 드러내면 그 의도를 다 읽히고 마는 거야. 사람들은 크게 반발하겠지.”
고려의 신뢰성이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고, 고태용은 경고했다.
평화와 번영을 논하는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자신의 번영만을 획책하는 나라는 그렇게 된다.
“자네가 말하는 ‘반발을 최소화할 방법’은 물 건너가. 그러니까 공작의 진행도 개봉회담을 전후로 이루어져야지, 개봉회담이 열리고 있는 중에는 납작 엎드려야 해.”
“적절하게 시기를 조절하자는 말씀이군요.”
“그래.”
“그럼, ‘몇 년 단위’로 일을 진행한다면 그 구체적인 기한과 순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뭐 무작정 느긋하게 진행할 수는 없으니, 나는 ‘반년’을 한 단위로 계획표를 짜보면 어떨까 싶네만.”
“일 년을 상반기와 하반기로 나눠서 말이죠.”
“그보다 짧게 하기는 어려워. 솔직히 1년이나 2년 단위로 진행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건 또 상황이 그렇게 허락해주질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