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회담(3)
물론 여기에는 브리튼을 비롯한 대서양 동맹 각국 정부의 입김이 작용할 테고, 젊은이들의 훈련은 군인들이 담당할 것이며, 무기 구매 비용도 국가에서 이자 없이 빌려줄 것이다.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
다만 브리튼 측에서는 조건을 하나 내밀었다.
-만일의 경우 우리가 구 아즈텍 연방을 도우려 했었다는 변명은 가능해야 한다. 여론이 악화될 수 있기 때문.
-따라서 구 아즈텍 연방의 망명객들을 동부 자유주에서 적극 수용, 함께 정부를 구성할 것. 그러면 우리는 그 계승 국가를 돕는 것이니 명분상으로도 큰 문제는 없다.
-의용군은 제안을 받아들이는 즉시 출발해 신정부를 옹위한다.
운명의 갈림길에 선 자유주 수뇌부는 고심 끝에 그 제안을 수락했다.
아즈텍 연방의 망명객들을 적극 받아들일 것을 선언하고, 실제로 구 연방 정부 관료였던 사람을 수뇌진에 들이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동부도, ‘신 연방 임시정부’를 구성.
국호는 그대로 아즈텍 연방을 유지한 채, 새로운 헌법과 정부 조직을 기반으로 한 국가가 태어나고야 말았다.
그보다 조금 앞선 시점에 유럽과의 물밑 협상은 원만하게 마무리되었다.
브리튼, 칼마르, 에스파냐에서 출발한 배들이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동부 해안에 입항.
조금 늦게 에이레와 신성제국에서도 배를 보냈다. 여론도 여론이거니와, 눈앞의 이익을 놓칠 수는 없으니까.
그 규모는 ‘의용군’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컸다.
***
고려 제국 동북부 상경시, 어느 골목.
미승휴, 미리안 일가의 가장 큰 지지기반인 이곳에도, ‘불순한 무리’는 있다.
고려 제3 제국 정부와 타협한 다른 좌익 정파를 배격하고, 그 결과 그들로부터 따돌림당한, 아나키즘 혁명가 무리가.
세력 규모가 너무나도 작아 굳이 색출해낼 필요도 없었지만, 얼마 전부터 상경 시내 상인들이 이들의 강도 행각에 시달린다는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정보가 제국정보사령부의 신경을 거슬렀다.
“사실상 골목 폭력배와 다를 바 없지. 다른 점이 있다면 보호세가 아니라 혁명자금을 명분으로 내세운다는 것일까.”
상인들은 모두 ‘새 세상을 위한 혁명자금이니 기쁘게 내놓으시라’는 협박과 함께 폭행을 당했다 한다.
“정말로 혁명을 원하는 건지, 아니면 그걸로 비싼 술안주나 사 먹으려는 건지 모르겠군요.”
제국정보사령부의 고태용 소장 옆에서 그렇게 냉소하는 청년은, 바로 주견하였다.
두 사람은 우중충한 코트를 걸친 행인으로 위장한 뒤 골목을 걷고 있었다.
“대령 말대로, 우리도 단순 강도 행각이라면 일반 경찰에 맡겨도 될 일이라고 생각했었네. 하지만 뭔가, 뭔가가 마음에 걸렸어.”
고태용은 안경 너머의 눈을 날카롭게 빛낸다. 그 모습이 아나키스트들의 눈에 띈다면 오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래서 고태용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얼굴만 보면 반듯한 참모 같은 인상이지만, 회사원을 연상시키는 배영훈 중령과는 다른 부류의 남자다.
숙군을 피해 살아남았다는 걸 생각하면 나제홍과 비슷한 부류 같으면서도, 또 다르다.
이 고태용이라는 남자는 얌전히 머리를 숙이되, 자신을 함부로 숙청하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몸집을 불리려 한다.
숙청을 결심하기까지 부담이 크도록, 적절한 선에서 영향력을 키우고자 한다는 말이다.
나제홍의 주선으로 만나, 몇 가지 협상을 하는 동안 견하는 이 남자를 그렇게 파악했다.
“어떤 점이 걸리신 겁니까?”
“글쎄. 그렇게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군. 그냥 감이라고 해야겠네. 그 왜, 경찰들도 그렇지 않나. 증거는 없지만 저 새끼가 범인이 확실한데, 그냥 냄새가 난다…… 같은 식으로.”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이런 소규모 폭력배 조직에 제국정보사령부가 나서는 것도 모양이 우스우니까, 미끼를 던져봤지.”
정보원들을 통해 ‘황제 폐하께서 상경의 상공업을 독려하기 위해 이른 시일 내에 방문하실 것’이라는 정보를 흘렸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은 그 미끼를 물었다.
낚시꾼은 문 힘을 보고 물고기의 크기를 짐작한다.
“생각보다 위험한 조직이었어. 정말로 폭탄 테러를 계획하더군. 폭탄 제조에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고, 당연히 그 물자 구입에 필요한 자금 약탈은 더 심해지고, 우리가 예의주시하던 제조 기술자까지 끌어들였어.”
“단순한 폭력배가 아니었군요.”
꿈틀대는 걸 보니 생각보다 흉악한 놈들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끝장을 봐야겠다, 고 생각했는데 마침 감찰국에서 좋은 제안이 들어왔지 뭔가.”
핫, 하고 고태용은 나직이 웃었다.
“정치경찰실의 나제홍 실장님과는 좋은 인연이 있었고, 또 그 조직이 옛 야별초를 계승한 것도 아니라서 엄밀히 따지자면 원한은 없지만……. 왜, 그 있잖은가. 연상 작용이라고.”
“구 야별초는 해산했다고 해도, 정치경찰실이 야별초와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건 맞으니까요. 이해합니다.”
실제로 야별초 직원 중 사상 검증이 끝난 인간들은 정치경찰실로 다시 채용되고 있다.
“그러니 감찰국에서 제안이 들어온 김에 합작해보자는 거지. 야별초와 군 정보부 간 해묵은 원한도 청산할 겸, 그쪽 실력도 확인할 겸.”
골목의 으슥한 곳에서, 그림자들이 움직인다.
또는 지붕 위에서도 움직인다.
대부분은 소총 아니면 권총을 쥐고 있지만, 하얀 단검을 쥔 자들도 있다.
견하가 데려온 이단들이었다.
“주 국장, 체면이 손상될까 노심초사한 거 아닌가. 이단까지 데려오다니.”
“그런 걱정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겠죠. 합작해볼 만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번 합작에 꽤 많은 걸 걸고 있어서.”
“솔직해서 좋군! 옛날 야별초 놈들 음침한 것과는 달라. 사회성이라는 게 없는지 농담을 걸어도 우물쭈물하더라니까?”
견하도 마주 웃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대형을 이루어 ‘어떤 지점’으로 접근하는 그림자들을 따라간다.
감찰국 직원들도 이제는 어느 정도 군사 훈련을 받는다. 하지만 대부분 직원들의 학업을 생각하면 군인처럼 전문적이라 보긴 어렵고, 간신히 총기를 다룰 수 있는 수준이라고 봐야겠지.
물론 그중에서도 소질 있는 아이들은 따로 편성해서 정예로 육성하고 있다.
동명역 쿠데타 제압 때 견하를 보조했던 아이들이 바로 그런 부류다.
그런 아이들에, 참전 경험이 있는 복학생들을 더해 부대를 편성했다. 더불어 이익서도 이 작전에 참가했다.
확실히 군인이었던 사람들이라 그런가 몸놀림이 다르다. 작전 개념도 더 잘 이해하고.
그런 녀석들은 다른 직원들을 교육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거기다 고태용의 말대로 이단들도 데려왔다.
이단은 중고등학교에서 일반적인 체육 교육을 받지 않는다. 대신 그들 나름의 자유로운 훈련을 하는 경우도 있고, 준 군사 훈련을 받기도 한다. 견하가 제1 고등학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견하는 이 점에 착안해 이단들을 일찍부터 감찰국으로 포섭해왔다. 일정한 군사 훈련만 마치면 대학 진학에 도움을 주는 등,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이단 학생들 역시 이 때문에 군대보다는 감찰국을 졸업 후 진로로 좀 더 선호하게 됐다.
물론 아무나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사상 검증은 철저히 하고 있다.
또 이단은 군에서도 중요한 전력으로 여긴다.
“그러니 감찰국 혼자 독점할 수는 없죠. 저는 주변과…… 마찰 없이 잘 지내보고 싶거든요.”
“좋은 자세네. 들리는 말 때문에 조금 걱정했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주 국장은 참 소탈한 사람이구만.”
“들리는 말이라면……?”
“날카롭고 잔인하다는 말 말일세. 심기를 거스르면 반드시 보복한다고도 하고.”
견하는 웃었다. 마치 ‘너무 거창한 인물로 포장되어서 민망합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아니, 제국의 적들에게는 당연히 잔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군님께서도 제국의 적들을 절대로 용서치 않으실 것 아닙니까.”
“그렇지. 우리 둘 다 애국자의 관점을 공유할 수 있으니, 나는 이해할 수 있네.”
하지만 견하는 방심하지 않는다. 저렇게 견하에 대해 마음 놓았다는 듯 웃고 있어도, 고태용은 군 정보부에서 오래 경력을 쌓은 사람이다.
견하의 내면까지 어떻게든 들여다보려고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참 연기를 잘한다고 웃고 있을지도 모르고.
고태용의 이야기는 다시 이단으로 옮겨갔다.
“이단은 다른 군인들보다 밥줄이 더 튼튼해. 군에서도 이단이 중요한 전력이니까 열심히 대우해주는 거지. 그리고 군에서 만난 인연이, 전역 후에 다른 직업을 알아볼 때도 꽤 도움이 된다니까? 그러니 지금 감찰국이 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좋은 조건을 내미는 건 아니야.”
다만 좀 더 느슨한 근무환경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는 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출세 지향적인 사람들에겐, 조직 수장이 태사의 최측근이라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겠지.”
“그건…… 일단 저부터 출세하고 봐야겠는데 말이죠.”
다시 한번 고태용은 웃음을 터트렸다.
터트렸다가, 갑자기 가라앉힌다.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견하도 무기를 꺼낼 준비를 한다.
대형을 갖춘 그림자들이 한 건물에 접근한다.
첩보에 따르면, 이곳은 아나키스트 조직의 집회 장소일 뿐만 아니라 인쇄소로도 쓰인다고 한다.
제국정보사령부에서 3개 조, 감찰국에서 2개 조, 총 5개 조가 포위하듯 건물 주변에 접근한다.
첫 성과는 제국정보사령부 쪽에서 나왔다.
-인쇄기를 반출하려던 일당을 제압. 사살 3인. 검거 2인.
그 보고를 들은 견하도 어딘가로 무전을 보냈다.
곧이어 감찰국 쪽에서도 보고가 올라온다.
이익서의 목소리다.
-거수자 1인 검거. 몸수색 결과 경찰공무원증 발견.
공무원증에 적힌 이름이 전달되자 고태용은 혀를 찼다.
“그 새끼 수상하다 싶었는데 결국 그렇게 되는군.”
“주목하고 계시던 사람입니까?”
“이중첩자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지. 유용한 정보는 가져오는데, 그 새끼 말 듣고 가보면 피라미만 잡히고 큰 물고기는 놓쳐서 말이야.”
짜증을 부리다가, 이번에는 호기심에 찬 얼굴로 묻는다.
“그러는 주 국장은 어떻게 알았나?”
“전에 몽골 태사인 볼로드 공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반정부 조직을 무력화는 데에는 인쇄기 파괴만큼 좋은 게 없는데, 그래서인지 인쇄기만큼은 무슨 희생을 내서라도 지키려 한다고요.”
하지만 인쇄기 압류 혹은 파괴 작전은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부패한 경찰들이 뒷돈을 받고 작전을 누설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 경찰들은 흉악범죄도 아닌 걸 기를 쓰고 잡아야만 하는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가 접근하기 직전에 인쇄기 반출을 시도했다면, 인쇄기를 옮기라는 정보를 흘린 놈이 있지 않을까 했죠. 그리고 그런 놈들이 연기의 대가는 아니라서…….”
“그렇지. 그냥 생계에 돈 좀 보태보려는 사람들이니까.”
고태용은 씩 웃었다.
“작전, 마저 진행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