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회담(2)
“너는 운이 좋구나. 내가 처음 여기 온 날에는 자기 소개할 틈도 없이 포격부터 받아내야 했거든. 뭐, 첫 공격에서 같이 살아남은 덕분에 선임들하고는 금방 친해졌지만.”
신병은 뻣뻣해진 얼굴 근육을 억지로 당겨 웃었다. 포격이라니, 그건 얼마나 무서운 걸까.
“적의 공격이 거세진 겁니까?”
“아, 그렇지.”
고참은 질겅질겅 씹고 있던 뭔가를 뱉어서 참호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들이 걷고 있는 이 참호의 구조는 미로처럼 복잡하고, 그물처럼 촘촘하다. 부디 이 참호가 자신들을 지켜주기를.
“우리가 대륙혁명전선이 아니라 ‘인민공화국군’이 된 다음부터는 남쪽 애들이 좀 거칠게 나오더라고.”
***
대륙해방군이 쿠아우테목에 입성하여 멕시카 자유국을 선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륙혁명전선의 간부들 사이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우리의 봉기는 아즈텍 연방 정부를 향한 혁명이었소. 비록 우리 혁명전선에 의해 그 정권을 마무리 짓지는 못했어도, 멕시카 자주국이나마 그 끝을 맺었다는 데 의미를 두어야 하지 않겠소?”
“사회주의 혁명 전, 부르주아 혁명 단계로 해석할 수는 없을지.”
“그러니까, 동지들 의견은 그겁니까? 멕시카 자주국을 정통 정부로 인정하고, 우리는 그 나라의 정당으로 참여하자는…….”
누군가 ‘그럴 수는 없소!’라 외치며 책상 위로 올라간다.
“정신들 있소? 멕시카 자주국인지 뭔지는 부르주아 혁명과는 전혀 관련이 없소이다! 멕시카 자주국의 원동력도 무산자들, 농민들이오. 이들은 부르주아보다도 질이 나쁘지. 자신들의 계급을 위한 혁명이 아니라 그저 제 한 몸 잘사는 것만 목적으로 하니까!”
책상 위로 올라간 남자의 친구가 ‘옳소!’라 외친다.
책상 위 혁명가의 연설은 계속된다.
“무산자의 혁명은 국적, 인종, 민족과 같은 경계를 넘어서 이루어져야 하오. 그렇게 해야만 할 정도로 무산자의 힘은 한없이 약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투쟁의 힘이 엉뚱한 곳에 낭비된다는 이유도 있소. 적의 책략에 넘어가고 말 위험은 말할 것도 없소!”
혁명가가, 혁명의 원동력인 인민이 민족이니 국적이니 하는 것에 중점을 두면, 혁명은 타민족, 외국인에 대한 투쟁이 되어 버린다.
그것도 타민족 무산자, 외국인 무산자를 대상으로 한 엉뚱하고도 사악한 투쟁이.
자본가들은 이 기회를 적극 이용해, 민족이나 국가라는 허구의 틀로 사람들을 묶는다.
그 결과 기업 총수를 아버지처럼 여기고 기업 총수의 자녀들을 형제처럼 여기는 머저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본가가 뒤에서 부추기는 외부와의 투쟁에 피를 낭비하고 말 것이오. 우리는 그런 계략에 넘어갈 수는 없소!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소! 아즈텍 대륙 전체의 노동자 해방이 완수될 때까지 투쟁은 계속되어야 하오!”
물론 그 밖에도 다른 이유가 있긴 했다.
멕시카 자주국이 내세운 민족주의 이론은 비 좌익 계열 노동자 계층을 흡수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이는 좌익 계열 정당에겐 위협으로 작용했다.
공업이 발달한 북부, 특히 오대호 일대의 공업지역을 장악했기에 물자 생산에서 상당한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도 한 요인이다.
멕시카 자주국 정부가 부르주아 정부라기보다는, 과거 고려의 미승휴 군사정권과 더 유사하다는 점도 혁명전선 간부들의 마음을 돌렸다.
지금이야 고려민국 임시정부 계열 사람들이 정권에도 참여하고 있지만, 미승휴가 막 고려의 최고 권력자가 된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실상 뿌리 한 가닥만 남기고 죄다 뽑혀 나간 것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됐었다.
“우리가 멕시카 자주국에 가담하는 순간 그 꼴이 날 거요.”
결국, 대륙혁명전선도 ‘국가’를 선언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
호데노쇼니 인민공화국.
과거 대륙 북부에 형성되었던 원주민 연맹체의 이름을 따 왔다.
북부 공업지대가 그들의 판도와 상당히 일치한다는 점도 있고, 또 과거 그들이 실현했던 공화국의 이상을 계승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국가 선언은 그 자체로 선전포고였다.
멕시카 자주국에 머리 숙이고 들어가지 않겠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리고 멕시카 자주국 쪽에서도, 이대로 아즈텍의 판도를 분할해 서로 평화롭게 지내자는 의미가 아님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멕시카 자주국은 대륙의 패권을 쥐어야 했고, 호데노쇼니 인민공화국은 대륙 전체의 혁명 완수를 목표로 했으니까.
그리하여 막 탄생한 두 나라는, 전면전에 돌입했다.
***
“운이 좋다는 말은 취소해야겠군.”
고참이 허리를 바싹 숙인 채 잰걸음을 옮긴다.
신병도 고참을 따라 허리를 구부리고 뒤를 따랐다.
적의 포격이 시작된 것이다.
집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참상이 눈앞을 지나간다.
사지 중 최소 하나가 날아간 병사, 무너진 참호 속 병사였던 파편들, 숨이 끊어질 때까지 비명을 지르며 불타는 병사…… 등.
구토할 틈도 없다.
이윽고 고참이 멈춰 선다.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에 온 것이다.
고참은 계속 앞으로만 가려는 신병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곤 외쳤다.
“온다! 대응 사격해!”
신병은 ‘우아아아아악’이라는 비명만 내지르며 마구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 낭비지만 고참은 그 점은 지적하지 않았다. 살아남으면서 스스로 배우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참은 신병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것도 탓하지 않았다.
자신도 저랬으니까.
말이 고참이지, 자신은 그저 살아남은 신병일 뿐이라 자조하며.
***
“대륙 양분 제안은 거절한 건가.”
형식적인 제안이었지만, 거부당한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군.
멕시카 자주국의 ‘지도자’ 쿠에츠팔린은 집무실에서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즈텍 연방의 마지막 통령, 네자우알 테콜로틀이 자살한 장소지만 쿠에츠팔린은 태연한 얼굴로 이곳을 사용하고 있다.
탁자를 비롯한 가구나 집기 대부분 이전 주인이 쓰던 그대로였다.
그 정도로 강인한 정신을 지니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만.
쿠에츠팔린의 앞에 선 비서와 각료들은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다. 식은땀을 흘리며 눈치를 보는 자가 있는가 하면, 불호령을 기다리는 자도 있고, 태연한 얼굴로 명령을 기다리는 자도 있다.
쿠에츠팔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심드렁한 질문이었다.
“어떻게 보는가?”
“건방진 놈들이 주제를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쿠에츠팔린은 그 대답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기개는 좋은 대답이지만 그가 원한 대답은 아니다. 그는 냉정한 분석을 원했다. 아첨이 아니라.
지금 대답한 놈은 딱 일선 장군까지가 한계겠군. 참모로는 부적합하다.
“저들도 나름 믿는 구석이 있으니 저렇게 나오는 것일세. 그 ‘믿는 구석’을 파악하는 게 우리가 할 일 아닌가.”
옆에서 누군가 타박을 준다. 쿠에츠팔린은 끄덕인다.
“그래. 옳은 분석이다. 그럼 저들의 믿는 구석은 뭐라고 생각하지?”
“오대호 연안의 대규모 공업지대는 우리가 장악한 다른 어떤 공업지대보다 생산력이 앞섭니다. 저들이 믿는 건 그게 아닐지.”
흡족한 얼굴로 쿠에츠팔린은 부하를 칭찬했다.
“올바른 분석이다, 초필로틀. 우리가 장악한 지역은 주로 농업 지역이거나, 여기 쿠아우테목을 비롯한 금융의 중심지 정도지. 저들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할 법하다.”
또한 오대호 공업지대는 전선에서도 상당히 떨어져 있는 데다, 공격할 방향도 서남쪽 한 방향이었다.
“다른 뱡향에서 공격하려면 자유주 독립군이 장악한 지역으로 우회하는 수밖에 없지.”
“현 상황에서 별다른 적대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자유주 독립군까지 적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괜히 전선만 늘어날 뿐입니다. 특히 우리는 세 세력 중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전선 확대의 부담도 다른 세력에 비해 큽니다.”
넓은 국토는 넓은 국경선을 의미한다. 절대불변의 진리다.
“인민공화국도 똑같은 생각을 했겠지. 지금 자유주 독립군을 두 세력이 나눠 가져봤자 전선만 길어진다는 계산이 나오니까. 먼저 두 나라가 승부를 가리고, 이후 압도적인 세력으로 동쪽을 제압한다는 전략을 세울 수밖에.”
쿠에츠팔린은 초필로틀의 얼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큰일을 맡기기에 가장 적합한 인재다. 일단은…….
“공세 계획을 논의토록 하게.”
***
멕시카 자주국과 호데노쇼니 인민공화국 모두 국가 체제를 갖추어 간다.
이와 함께 아즈텍의 기존 행정도 착착 장악해 나갔다. 단순히 공무원들이 각 정부에 가담하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동안 아즈텍 연방을 작동시켰던 시스템 자체를 흡수했다는 뜻이다.
즉, 인력과 물자의 대규모 징집이 가능해졌다는 것.
자신들이 보유한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기에, 내전은 현대 국가 간 총력전으로 발전해갔다.
모든 전선에 신병들과 물자가 대거 투입된다.
아즈텍 연방이 멸망할 때까지 서로 눈치를 보던 시간은 끝났다.
멕시카도 호데노쇼니도 이대로 아즈텍 연방이 이루어 놓았던 대륙 단위 통일 국가 체제를 ‘해체’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 머릿속에는 대륙을 지배했던 아즈텍의 지위를 그대로 계승할 생각만 가득 차 있다.
반면 동부, 자유주 독립군은 아직 국가 선포를 망설이고 있었다.
대륙의 재통일을 노리는 두 나라 앞에서 독립 국가를 선포한다는 건, 자신들도 그 쟁패에 뛰어들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니까.
-우리가 그럴 정도의 힘이 있는가?
없었다.
아즈텍 연방이 멸망하는 동안 땅 한 뼘 더 넓히지 못했을 정도로, 동부 자유주의 군사력은 미약하다.
애초에 동부는 명확한 목적의식이 있었다기보다는, 내전을 틈타 더 큰 이익을 거둘만한 위치에 올라서고 싶었을 뿐이다.
봉기를 일으킨 것도 ‘우리는 아즈텍 연방 편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여 내전에 말려들지 않으려는 의도가 더 컸다.
만약 아즈텍 연방이 승기를 잡는다면 그때는 협상을 통해 연방에 재합류할 심산이기도 했다. 그 정도 자금력은 있었으니까.
그러나 자유주 독립군의 수뇌들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경우 자신들을 기다리는 운명을 안다.
호데노쇼니든 멕시카든, 승자는 자신들을 재정복하러 올 것이다.
그렇다면 둘 중 어느 편에 가담한다는 선택은 가능한가?
그 역시 불가능하다.
호데노쇼니의 공산주의자들은 항복을 받자마자 기업의 해체에 착수할 것이다. 각자 기업체 하나쯤은 지닌 자유주 독립군 수뇌부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멕시카의 파시스트들은 기업을 빼앗고, 노예민족이 되든지 아니면 대륙에서 나가라고 하겠지. 이 역시 용납할 수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상황은 격변하고 시간은 흘러만 간다.
-대륙을 셋으로 나누어 서로 견제하는 형세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
-하지만 그런 세력 균형을 조성하기엔 우리의 군사력부터가…….
한숨만 깊어져 가는 그때, 누군가가 자유주 수뇌부의 귀에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의용군’ 파병 제안.
실로 간단하면서도 멋진 이야기였다.
‘자발적으로 유럽계 동포들을 돕겠다며’ 나선 젊은이들이 ‘자비로’ 무기를 구입해 대서양을 건너 여행하는 것을, 국가가 막을 명분은 없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