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회담(1)
“족쇄, 말이죠.”
견하는 리안이 꺼낸 말을 반복한다.
지금 고려가 걷는 행보는, 분명히 허동주의 구상에도 있던 것이다.
주변국을 정복해 동아시아 패권을 확립한 뒤 다른 열강과의 전쟁으로 최강국의 자리에 등극한다는 그 망상.
“2년 전 그날, 내가 너한테 막아야만 한다고 했던 흐름이지.”
그러나 정치적 격변은 리안의 손을 벗어나 멋대로 날뛰기 일쑤였다. 이러한 현실이 그녀에게 허동주와 비슷한 길을 걷도록 강요한다.
“방관한다는 선택은 불가능했어요, 누나.”
“알아. 그래서 더 답답한 거고.”
리안이 이른바 ‘고립주의’를 택해 내전 이후 고려가 경제 회복에만 몰두했다면?
“적어도 지금의 발해도까지, 해외 영토는 포기해야 했을 거야. 신수덕을 제압한 이후로 한족 민심을 가라앉히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었는지 생각해 봐.”
“예전 규모의 산동 총독령이었다면 절대로 유지할 수 없었겠죠.”
“지금도 4국이 함께 억제하고 있으니 이나마 유지하는 거야. 발해도 지역이나 몽골과의 공동 통치구역까지 잃었다면…… 내 지지도 큰 타격을 입었겠지.”
그랬다면 어떤 혼란상이 펼쳐졌을까.
허동주, 신수덕 잔당이 사주한 동명역 쿠데타 시도. 리안이 권좌에서 물러났다면 그 후임자는 그런 혼란상을 누를 수 있었을까?
글쎄. 그런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랬다면 지금쯤 신수덕이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태사부에 입성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리안은 웃었다. 연인의 농담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재건된 한족 국가는 다시금 복수를 꿈꾸고, 알타이 자유 공화국인지 뭔지 하는 나라는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날뛰기 시작해. 그러면 다시 한번 지옥으로 돌아가는 거야.”
내 아버지를 전사시킨 그 전쟁으로 말이야, 라고 리안은 덧붙였다.
견하의 표정은 무거워졌다.
세계는 스물두 살 아가씨에겐 너무도 가혹하다.
고아가 된 그녀는, 또 다른 누군가가 고아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좀 더 적은 수의 고아를 만드는 수단을 택해야 한다.
이 무슨 우스꽝스러운 딜레마인가.
고려의 팽창주의를 억제하기 위해 팽창주의에 편승해 그 주도권을 쥐는 싸움을 시작해야 하다니.
‘어쩔 수 없는’ 선택만 반복하는데 상황은 더욱 계속 그녀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안 그래도 키가 작은 그녀가, 오늘따라 더욱 작아 보인다.
어깨가 여려 보인다.
의지가 완전히 꺾여 주저앉을 것처럼 보인다.
오늘, 저 등을 토닥여주면서 잠들고 싶다.
“그래도 완전히 헛된 일만은 아니었어.”
기운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나를 향한, 그리고 제국입헌당을 향한 지지율은 확실히 상승했으니까. 다소간 변동은 있지만 굳건하다고 말해도 좋아. 하지만 ‘대체 왜 미리안 태사를 지지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면 이야기는 달라져.”
그녀는 질문을 덧붙였다.
“견하야, 국민들이 왜 나를 지지하는지 알아?”
물론 알고 있다. 견하는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해야 하는지 조금 망설인다.
“누나가…… 고려에 승리를 가져다준 사람이니까요.”
황제 폐하의 옹립. 황실의 재건.
내전의 빠른 평정.
칸발리크 사태를 진정시키고, 카라코룸을 정복한 여자.
이제는 대륙을 손아귀에 넣고, 고려가 주도하는 ‘다이온 체제’를 출범시켰다.
“국민의 열광은 승리에 대한 열광이야. 그런데 말이지…… 국민들 한 명 한 명의 경제 사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어. 내가 그들의 삶을 개선해줘서 지지해주는 게 아니라는 말이야.”
더 나빠지지 않게 간신히 막고 있을 따름이다. 결국 다이온 연방의 창설로 이어진 관세 동맹, 공산주의의 본산인 바라트와의 협력은 그래서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더 승리를 거두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국민이 고려의 군사적 승리에 열광하는 건, 그 승리가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이어지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기대감, 즉 희망만으로도 사람은 일단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승리의 기대감을 빼앗는다면?
뻔뻔하게도 그것은 분노로 돌아온다.
“시간이 부족해.”
그렇다. 일단 기업이 활성화되고 은행이 제 기능을 회복했지만, 그렇게 해서 창출된 부는 절대 저절로 국민들 사이로 퍼져나가지 않는다.
부는 정부가 강제로 퍼다 날라야 한다.
“그러니 내가 ‘철도성에서 제안한’ 대원철도주식회사를 비롯한 경제 부흥 정책들을 일단 승인한 거야. 당장 일자리를 만들어 줘야 하니까.”
그리고 장기적으로 짭짤한 수입원이 될 사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원철의 사업이 효력을 보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해요. 누나 말대로, 시간이 빠듯하죠.”
“그래. 국민은 그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아. 인내심이 없다고 탓할 수는 없지. 우리는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지만, 국민들 중에는 기다리다간 굶어 죽는 사람도 있어.”
승리의 열광은 그 크기만큼 배신감으로 돌아선다.
더 승리를 거둬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승리의 길을 포기하겠다는 태사를 향해 ‘겁쟁이’, ‘매국노’라는 비난이 쏟아지겠지.
지금 신성제국 보나파르트 황실의 시조, 나폴레옹 1세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의 집권과 황제 즉위는 모두 군사적 승리를 바탕으로 했으니까.
로마제국의 중재와 지원이 없었다면 나폴레옹 1세는 끝없이 주변국과 전쟁만 일삼다가 소모되어 몰락했을 것이다.
어쨌든,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자연히 정권은 약해진다.
그건 황제라고 해도 되돌릴 수 있는 흐름이 아니다.
지금 헌법으로는, 루우는 리안에게 겨우 ‘사임을 권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고 나면 누가 태사가 되겠다고 나설까.”
“안세규 장관은 안 되겠죠.”
“나보다 더 강경한 평화주의자가? 안세규 장관이 이 연립 정권 내에서 영향력은 클지 몰라도, 국민의 인기를 얻은 사람은 아니야. 안세규가 그리는 미래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아.”
다이온 연방의 성립은커녕 루우의 몽골 황위 계승부터 내심 반대하는 사람이다.
태사 자리에 도전한다고 해도, 그의 정책 방향이 공개되는 순간 사람들은 고려국민당을 향한 지지를 철회하겠지.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에서 내놓을 후보들도 마찬가지고. 국민들은 더 이상의 혼란상은 안 된다며 혁명을 거부할 거고, 개혁은 검증이 덜 됐어.”
“남은 건, 허동주나 신수덕을 흉내 내는 자들이겠군요.”
“승리를 가져다주겠다고 장담하는 미친 야심가들이 다시 고개를 들겠지. 그때쯤 되면 나에겐 그런 인간들을 억누를 힘도 없을 거야.”
허동주나 신수덕의 능력에는 미치지도 못하는 것들이, 그 두 사람도 감히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겠다고 날뛴다.
악몽이 따로 없다.
“그러니 아직은 내가 통제해야 해. 적당한 승리를 맛보여주면서 시간을 벌고, 그 승리가 국민의 만용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절하면서, 경제적 성과가 뚜렷해지기를 기다리는 거지.”
리안은 검지 끝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이제는 그녀의 버릇이 되었다.
“바라트와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건 경제적 목적 외에도, 평화의 가능성과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서야. 아무리 이념과 체제가 달라도 국가 간 평화는 가능하다는 걸 국민들한테 보여주는 거지.”
세계대전 이후로 고려인들은 너무 날이 서 있어, 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적의 침공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꽉 차 있지. 그래서 ‘누구도 침공할 수 없는 강력한 나라’를 원하는 건지도 몰라. 나도 그런 생각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지만.”
고뇌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다.
어쩌면 피로에 못 이겨 잠이 든 걸지도 모른다.
견하도 어색한 침묵을 지키며, 한참 그 앞에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나나 효윤의 말대로, 자신은 너무 급했던 걸까. 여기서 완급 조절을 해야 하지 않을까.
임병욱 철도 장관과 함께 동명-카라코룸 노선 건설 현장을 둘러봤을 때를 떠올린다.
반란군 잔당의 선동도 있었겠지만, 총을 든 몽골인들은 명백히 고려의 정책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 반감에 자신의 지나치게 급한 정책이 일조했다면?
고려의 정책이 제국주의적 확장으로 비치고 있다면?
어떻게든…… 반발을 가라앉혀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과, 유화정책이 필요하고.
리안의 정책 방향은 유화정책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길이다.
이쯤에서, ‘리안과의 타협점’을 생각해볼까.
잠시나마 자신의 생각을 접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다시 꺼내야 할지도 모르지만, 견하는 아직 젊다. 기회는 또 올지도 모른다.
“……개봉에서 회담을 여는 걸 구상해봤는데요.”
견하가 조심스레 꺼낸 이야기에, 리안은 눈을 떴다.
“개봉에서, 회담을?”
“다이온 구성국들뿐만 아니라, 티베트, 탕구트, 대예, 보우슈엥처럼 한족 반란 문제에 직면한 다른 나라들도 초대하는 회담을요.”
“그런 회담이 열린다 해도, 8개국의 군사적 협력 말고 논의할 게 뭐가 있지?”
“엉뚱한 발상이라고 여기실지도 모르지만, 외교전도 전투고, 거기서 거두는 승리도 승리 아닐까요?”
리안이 살짝 눈살을 찌푸린다. 계속해보라는 뜻이다.
“대중에게 ‘승리하는 고려’의 이미지가 필요하다면, 고려가 다이온 밖의 나라들로부터 그 정책을 인정받았다는 것도 ‘외교적 승리’로 선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만큼 고려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지.”
“네.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에서도 4개국 관세 동맹을 통한 경제 회복이 꽤 주목을 받았었죠. 그걸 ‘우리 고려의 경제 모델이 세계의 인정을 받는다’는 식으로 선전했었는데…….”
“……효과는 있었지. 민족적 자긍심을 충족한다는 면에서는 말이야.”
“다만 그건 국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성과라 보긴 어려웠어요. 무엇보다도 주최국이 로마제국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 ‘개봉회담’ 을 우리 고려가 주도하고, 동아시아의 ‘지도적 국가’라는 이미지를 확보한다면, 효과는 평화회의 때보다 더 크지 않을까요?”
흠, 하는 소리와 함께 리안은 다시 한참 입을 다물었다.
그녀 나름대로 계산을 끝낸 뒤, 리안은 짧게 끄덕였다.
“국무회의에서 제안해보지. 수고했어. 평소 업무로 돌아가서 잠깐 숨 좀 돌리도록 해.”
***
“신병인가?”
그렇게 묻는 고참병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경례를 올릴 뻔했지만, 신병은 ‘그렇습니다’하고 끄덕였다. 전장에서의 경례는 위험한 행동이다. 적병의 눈에는 경례를 받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으로 인식되니까.
고참병은 웃으며 동지들 앞으로 신병을 데려갔다.
“자, 살아있는 동안 함께할 전우들을 보자구. 너무 긴장하지 마. 곧 너도 여기서 ‘고참’이 될 테니까.”
신병의 눈에는 그렇게 말하며 자기 어깨를 두드리는 고참이 거의 삼촌뻘로 보였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고참의 나이는 기껏해야 신병보다 두 살밖에 많지 않았다.
화약과 먼지와 흙, 그리고 전장의 피로와 압박감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고참의 말대로, 신병도 곧 전장의 세례를 받아 대충 비슷한 외모로 거듭날 것이다.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