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온(14)
류성일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견하가 말하는 대로 내버려 둔다.
“이 사업이 제게 얼마나 절박한 문제인지는 아셨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장관님께서 카라코룸 행정장관으로 임명된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계실지 통감하고 있습니다.”
임병욱은 입을 꽉 다문다.
그가 감히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으므로.
“……그렇네. 솔직히 인정하지. 늙은이의 괜한 걱정이었으면 좋겠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태사 각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린 것은 아닌가 무척 염려된다네.”
“제가 태사 각하의 의중을 듣고, 장관님께 조금 귀띔을 해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이 늙은이 입장에서는 그보다 고마울 게 없지. 나도 힘써 주 국장의 사업을 돕겠네.”
“그보다 먼저, 저도 장관님께서 여기 오시기 전에는 동명 내 국무회의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파악을 해둬야겠습니다만.”
“음…….”
어떤 정보를 어떻게 전해줄 것인가.
주견하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혹은, 주견하의 방금 눈빛을 보면,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이 미리안의 함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중하게 정보를 골라야 한다.
적절한 편집도 거쳐야 하고.
류성일은 몇 번 눈을 깜박이며 계산을 마친 후, 입을 열었다.
“1929년 4월의 동란 때, 고려국민당 측에서 뭔가 문제를 일으켰다는 정황이 포착된 것 같네. 태사 각하는 그 문제를 추궁하시려 하는데, 알다시피 내가 제1대학교 총장으로 있으면서 그쪽 계열 학생들을 많이 보호하지 않았는가. 그것 때문에 나도 혐의를 받는 모양일세.”
견하는 기억을 더듬어본다.
리안에게 처음 총구를 겨누었던 군인, 그자는 허동주의 끄나풀이라 보기엔 뭔가 무리가 있었다.
유지나와 양수영으로부터의 보고. 고려국민당의 다른 파벌들은 안세규를 ‘역적’이라 규탄했었다.
고려국민당이 1929년 4월에 일으킨 문제, 라.
정말 추측대로…… 실은 그 태사 암살 시도가 허동주의 소행이 아니었다는 건가?
안세규의 소행이었다면?
그날 밤…… 견하의 집을 습격한 암살자도 안세규가 보낸 자들이라면?
손끝이 살짝 떨린다.
그 떨림을 류성일은 놓치지 않았다.
성공적, 인가?
자신이 그 부모의 목숨을 앗아간 범인이라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지만, 그와는 별개로 계략이 통하고 있다는 어쩔 수 없는 쾌감이 류성일의 심장을 휘젓는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몸조심하게. 자네도 알다시피 동명의 정계는…… 하나같이 칼날들을 감추고 사는 곳이니까.”
“예. 조만간, 동명에서 연락 드리겠습니다.”
***
견하는 법무성 장관에게 ‘희생시킬 죄수’를 요구하러 왔을 때처럼, 행정장관의 청사를 돌아본다.
사냥감을 노리는 맹금 특유의 눈을 하고.
손의 떨림은 완전히 멎어 있다.
“늙은이가 안세규에게 전부 뒤집어씌우고 자기는 빠져나올 속셈이군요.”
거리낌 없이 내뱉는 그의 말에, 임병욱의 눈이 커다래진다. 견하는 그런 철도성 장관의 반응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자기가 할 말만 한다.
“여하튼 여기에는 비밀이 있어요. 이제는 비밀을 쥐고 판돈을 올려봐야죠. 임 장관님도, 한 판 즐겨보시렵니까?”
“하하…… 글쎄…….”
딱히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기에, 견하는 다시 눈을 돌려 행정장관 청사를 바라본다.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수장은 건방지게도 옛 황궁을 통령궁으로 썼지만, 지금 카라코룸 행정장관은 시청을 자신의 청사로 쓴다.
황궁에는 언젠가 다이온의 유일한 태사가 들어가겠지.
그러려면 이제 리안과 담판을 지어야 한다.
견하는 이 패를 어떻게 활용할지 궁리하면서, 임병욱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
다시 칸발리크로 향한 견하는 그간의 정보를 루우와 교환.
루우 역시 볼로드 등과 논의하며 키타이, 낭키아스의 정세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렇게 합류한 루우와 견하는 다시 동명으로 향해, 다이온 관련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하자마자 견하는 태사부로 향했다. 보고의 의무 때문이기도 했지만, 견하가 각오를 굳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각오는 대원수 앞에서 경례를 올리자마자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원철도주식회사. 꽤 그럴싸한 사업이야. 관세동맹의 효율을 높이고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측면에서는 봐줄 만해.”
“그렇게 평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백부께서 추진하셨던 사업을 재개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어. 평화와 발전은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야. 오랜만에 철도성 장관의 보고를 기분 좋게 들을 수 있었고.”
그렇지. 리안의 귀에 안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리안의 통찰도, 도저히 우습게 여길 수 없고.
“나도 서부군과 제국정보사령부를 통해 투자를 좀 해봤는데, 어때? 자금은 넉넉한가?”
그 통찰력이 견하의 상상마저 가볍게 넘는다는 게 문제다.
견하는 뻣뻣해진 목을 간신히 움직여, 대답한다.
“예, 덕분에…….”
“그래? 나도 숙군 이후에 내가 얼마나 군을 장악하고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었거든. 그 자금 운용 실태를 파악하고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군이 명령에 충실한지 살펴보는 거야. 투자 수익은 덤이고.”
책상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고 웃는다.
눈은 웃지 않는다.
“경제적 측면의 이익, 그리고 전신망을 통한 정보적 이익. 둘 다 내가 얼마만큼은 다이온 정세에 개입하는 데 필요하니까 내버려 두고는 있는데,”
웃음기마저 싹 사라졌다.
“그 이상은 안 돼. 감찰국의 사업은 이 선을 지키면서 진행시켜. 넘지 마.”
류성일 이야기를 꺼내서 리안과 담판을 짓는다는 생각은 쑥 들어가 버렸다.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그따위 어설픈 협박을 했다간 죽는다.
그의 연인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견하를 죽인다.
‘용납할 수 없는 선’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니까.
견하의 소녀는,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제 리안은 견하를 노려보고 있다.
“정확히 무엇을 할 생각이었지?”
침을 꿀꺽 삼킬 뿐, 견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연방 이상은 안 돼.”
그렇지만 견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담판이 아니라, 탄원을 해야 하나.
“……루우가 황위를 계승하고 동군연합이 이루어지는 큰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어요. 한족 독립 국가를 허용하는 일 역시 불가능하고요.”
리안은 말하지 않는다. 견하는 혹시 이게 리안의 화를 점점 돋우는 게 아닌가 불안해하면서도, 말을 계속 이었다.
“그런 것들이 제국의 안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누나가 더 잘 아시잖아요.”
견하는 반성한다.
이 모든 상황을 내가 만들어가는 듯이 느꼈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모든 상황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자신은 그저 그 위에 올라탔을 뿐.
리안은 여전히 말없이 견하를 노려보았다.
견하의 말은, 옳다.
몽골의 카간이, 고려의 태사가 군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이미 아시아의 향후 수십 년은 정해져 있었다.
만약 몽골이 사회개혁에 착수하고, 고려가 제3제국 체제가 아니라 민국으로 거듭났다면? 태평천국을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민주공화국을 수립했더라면? 그 나라의 정부는 전쟁을 일으켰던 걸 뉘우치고 한족 국민을 제대로 된 방향으로 이끌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지금보다는 평화로운 동아시아 체제 형성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루우는 다이온의 카간 자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시레문 카간이 세상 뜬 이후로 그건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됐고요.”
“볼로드도 루우를 카간 자리에 올릴 생각으로 가득하겠지.”
모두가 모두에게 물려있다. 루우도 리안도 각자 자신의 야망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으면서, 서로에게 의존적이다.
“루우는 자신이 고려 황제가, 뒤이어 몽골 카간이 되기 위해 나, 태사 미리안의 조력을 필요로해.”
그녀에게 안세규를 비롯한 다른 정치가들은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고려국민당, 사회민주당, 공산당 모두 내심 제정의 폐지를 바라고 있을 테니.
“나 역시도 살아남는 과정에서 루우가 필요했지.”
“그리고 이제는 각각 체제의 안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고요.”
“그 지적은 옳아. 게레센제가 카간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울제이가 카간 자리를 계속 노리고,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정세는 불안정한 데다 몽골의 개혁은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하지. 그러니 루우가 동군연합의 수장이 되고 내가 다이온의 정세에 약간이나마 개입하긴 해야 해.”
체제의 안정은 내부에서만 발버둥 쳐본다고 되는 게 아니다.
외부의 상황도 안정에 협조적이어야 한다.
“아즈텍 내전이나 대공황을 어떻게 해볼 수는 없다고 쳐도, 적어도 ‘다이온 연방’의 정세만이라도 조정한다면 고려의 안정을 바랄 수 있을 거야.”
“네. 그렇겠죠. 일단은 일본공화국도, 로마 제국도, 바라트 연방도 다이온의 주변에서 균형을 이루기로 한 것 같으니까요.”
“그러면 거기까지인 거야, 주견하.”
리안의 어조는 차가워졌다.
책상 위를 칼로 긋는 듯한 그 말에, 견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냉혹해져만 가는 견하라 해도 대꾸조차 할 수 없는 박력이 그 목소리에 있었다.
“게레센제는 물러나게 한다. 루우는 다이온의 카간이 된다. 볼로드는 물러나고 다른 적당한 개혁적 인물이 그쪽 태사가 된다. 아니 몽골 말로 타이시라고 해야겠지. 울제이는 억누르거나 역시 얌전한 황족을 데려다가 새로운 칸으로 삼는다. 낭키아스는 지금 바이다르를 칸으로 하는 체제를 유지해도 될 거야.”
알겠어? 하고 리안은 확인하듯 견하의 눈을 노려보았다.
“다이온은 4개국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연방이 된다. 이건 변할 수 없어. 변해서도 안 되고.”
견하는 리안의 시선을 밀어내듯이, 간신히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변하지 않는 체제란 없어요, 누나. 그리고 이미 정세는 변화를 요구하고 있고요.”
리안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의 고집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일도 있다는 걸, 그녀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다.
“당장 한족 반란을 비롯한 민족문제만 해도 탕구트, 티베트, 대예, 보우슈엥 4개국이 얽힌 복잡한 일이 되었죠. 다이온 구성국을 합치면 8개국에 걸친 복잡하고도 광대한 문제에요. 이걸 해결하는 게 지금과 같은 체제로 가능할 것 같진 않아요.”
각 국가가 자기네 관점과 역량에 따라 문제에 접근한다. 협력한다 해도 통일된 의지로 일관성 있는 정책을 결정하긴 어렵다.
“다이온에 하나의 군주가 있어야 하듯이, 태사도 하나여야 해요. 하나의 태사가 통합된 정부를 지휘해야 하고요. 물론 소속국들이 지방 자치 정부쯤은 둘 수 있겠지만, 최소한 외교와 군사는 다이온에 완전히 귀속되어야 한다고요.”
리안은 뭔가 견하를 비난할 말이라도 찾은 듯 입술을 들썩였다.
그러다 후, 하고 한숨을 내쉰다.
노려보는 시선도 걷혔다.
“……다이온이 마치 허동주의 구상 속 결과물 같은 게 될까 봐, 그게 걱정돼.”
“다이온이 사방으로 폭주할까 봐요?”
“다이온이 완전히 통합된 국가가 되면, 뭐 한족이 주도권을 쥐느니 몽골인이나 고려인이 몇 등 국민이 되느니 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가 될 거야. 분명한 건…… 동아시아에는 오래도록 없었던 강력한 힘이 부활한다는 거지.”
리안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게 사람들에게 비틀린 자신감을 심어주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적절한 족쇄가 필요해, 이 연방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