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온(13)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잔당인가.
아니,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토지의 구입, 혹은 공사의 진행 과정에서 뭔가 문제는 없었는지, 그러니까 지역 주민들과의 마찰은 없었는지 검토해주십시오. 이 사업은 쓸데없이 몽골인들의 반감을 사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대답을 듣지도 않고, 견하는 튀어 올랐다.
적의 시야에 확 들어오는 행동이었기에 당연히 사격이 집중된다.
거대한 촉수의 덩어리가 막을 형성, 적의 총탄을 막는다.
막에 부딪히는 탄환이 북소리 비슷한 소리를 낸다.
착지. 강화된 육체는 뼈와 관절에 가해진 부담을 무리 없이 흡수한다.
막을 걷어내듯 촉수는 사라지고, 견하는 그대로 가장 가까운 적에게로 돌진한다. 낮게 피어오른 먼지가 돌진의 속도를 말해준다.
견하의 검이 적병의 복부를 꿰뚫는다. 적들에게 그것은 흙먼지보다 늦게 인식된다.
이단이 일단 백병전에 돌입하면, 그 속도 때문에 일반인의 대응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제대로 겨누기는커녕 방아쇠를 당길 틈도 거의 없다. 당긴다 해도 허공이나 아군 쪽으로 갈겨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따라서 이단은 접근전을 선호한다.
적을 당황케 하고, 적이 선택 가능한 대응법을 단번에 줄일 수 있으니까.
-잔당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나보군.
검을 맞은 자에게서 오랫동안 세탁하지 못한 군복 특유의 찌든 냄새가 난다.
그 냄새도 이젠 피비린내로 가려지겠지만.
검을 해체.
기괴하게 일렁이는 흰 덩어리들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다. 그것이 공포감을 배가한다.
저들에게 주견하는 인간이 아닌 무언가다.
느낌이 구체적인 표현으로 머리에 자리 잡기도 전에, 폭발하듯 촉수들이 뻗어 나온다.
피묻은 촉수들이 적의 팔다리를 꿰뚫는다.
견하는 동명역 쿠데타 진압 당시 자신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실컷 시험해봤으므로, 이 전장에서도 공격 범위를 대충은 가늠할 수 있었다.
고려군 병사들의 원호 사격이 견하의 움직임을 좀 더 자유롭게 해준다.
잔당은 잔당이다. 적의 전투 의지는 그렇게까지 높진 않다. 싱거울 정도로 손쉽게 격퇴된다.
하지만 전투의 승패와는 별개로…… 이 상황은 좋지 않다.
명백히 민간인인데 총을 들고나온 사람도 있으니까.
자유 공화국 잔당이 강제로 징집한 걸까? 아니다. 그렇게 반감을 사는 행동을 하면 이런 잔당은 기반이 없어서 무너진다.
자발적 동조자라고 봐야겠지.
내전 당시만 해도, 이런 지방민들은 알타이 자유 공화국이 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텐데.
왜 내전이 다 끝난 지금에 와서야?
이 노선의 사업 진행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진다.
전투가 끝나고, 견하는 자신을 향해 경례하는 서부군 장교를 향해 포로들을 심문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려고 팔다리만 꿰뚫어서 살려둔 거니까.
“최대한 많은 정보를. 거점이나 규모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이런 일에 가담한 ‘동기’를 우선시해서 알아내도록.”
견하는 무기의 소환을 거두며, 임병욱을 향해 똑바로 걸어간다.
아까보다는 안정된 얼굴로 몽골 정부에 전투 발생과 사상자 등을 통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러다 견하의 얼굴을 바라보자 가만히 기다린다.
주견하는 단순한 감찰국 국장이 아니라, 그 자체로 태사의 입인 사람이니까.
임병욱도 이 사업의 무게를 안다.
사업 진행에 있어 ‘무가치하다’는 판단이 떨어지는 건 두렵다.
견하는 임병욱 앞에 서서 뭔가 말할 듯 말 듯 하다가,
“일단은 예정대로 류성일 장관과 만나보죠. 카라코룸 일대의 민심부터 파악해야 할 것 같으니까.”
이렇게만 말하고 앞장서 걸어갔다.
***
서로를 견제하되, 견제를 드러내서는 안 될 두 사람이 만났다.
임병욱은 주견하와 류성일 사이에 앉아 불편한 분위기를 참아낸다.
말없이, 감찰국장과 행정장관은 서로를 재본다.
주견하는 류성일이 동명에서 쫓겨나 여기로 유배된 이유를 생각해보고,
류성일은 주견하가 태사의 대리인으로 온 것인지, 그 자신의 독단으로 온 것인지 살펴본다.
전자라면 그 목적은 감찰이다. 최대한 불만이 없는 척, 충실한 관료인 척해야 한다.
1929년의 그 날, 올바름을 추구하는 정계의 원로를 연기했던 것처럼.
하지만 후자라면?
어쩌면…… 주견하와 협력해서, 미리안을 견제하는 자그마한 걸림돌로 사용할 수는 없을까?
위험한 발상이지만 시도해 볼 필요는 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주견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장관님 덕분에 카라코룸의 치안은 꽤 좋아진 것 같더군요. 내전 직후 막 입성했을 당시의 흉흉함은 많이 걷힌 것 같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야 뭐 현상 유지 정도지. 대부분은 전임 행정장관 김천열 장군의 공일세.”
“누군가가 이뤄놓은 성과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업적이죠. ‘도시 밖’ 분위기를 봐선 장관님이 아니었다면 어떤 혼란상이 펼쳐졌을지…….”
견하는 슬쩍, 말을 던져본다.
“맞는 이야기일세. 김천열 장군이 도시 내부를 청소하긴 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시 바깥으로 먼지를 털어내는 일 정도였지. 일단은 군정에서 민정으로, 라는 구색을 갖추긴 했네만, 아직 주변부 치안 안정엔 시간이 필요하네.”
솔직하게 인정하고 부드럽게 받아넘긴다.
그렇다면 다음 절차는 쉽다. 견하도 솔직하게 물어볼 것을 물어보면 되니까.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몽골의 영토는 광대하네. 공업 면에서는 낭키아스나 키타이를 압도하지만, 인구나 농업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해. 즉 몽골 국토 대부분은 텅 비어있는 땅이나 마찬가지라는 거지. 안 그래도 내전으로 손상된 행정력이 이런 국토 구석구석에 미칠 수는 없다네.”
카라코룸에는 고려인 행정장관이 있고 고려군도 주둔하지만, 이들도 행정의 세세한 부분은 몽골 현지 관료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칸발리크 정부는 수도의 복구만으로도 힘겨워하더군요. 칸발리크의 도움 없이 장관님 홀로 이곳의 행정력을 복구하시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지는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하지만 불순분자들이 드넓은 초원으로 쫓겨났다고 해도, 그냥 맨몸이라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텐데, 지금껏 목숨을 부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글쎄. 아무래도 주변 유목민 부락의 도움을 받겠지. 산간 지역 마을에 몸을 맡길 수도 있을 테고. 허나 그렇게 시골로 섞여들기 시작한 자들은 서서히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릴 걸세. 혁명가가 생활인이 되는 거지. 실제로 잔당의 습격 사례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네.”
“하지만 전체적인 숫자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그 실상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저는 여기 오는 동안 카라코룸-동명 철도 공사 현장을 습격한 반란군 잔당을 보았습니다.”
다른 지역의 습격은 줄어들어서 전체적인 습격 횟수는 줄어드는 듯 보인다.
그러나 원철이나 서부군 부대에서 제공한 보고서에 따르면, 카라코룸-동명 철도 개통 사업을 겨냥한 습격은 증가하고 있다.
“횟수뿐만 아니라 습격의 규모나 성질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카라코룸이나 주요 도시를 향한 습격에 비해, 철도 공사를 향한 습격은 확실히 규모가 크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견하는 임병욱에게 시선을 보냈다. 철도성 장관은 마치 견하의 비서라도 된 것처럼 서류를 류성일 앞에 내밀었다.
“……으음, 그렇긴 하군.”
“전투 자체는 ‘적을 격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참가한 전투를 제외하면, 적의 사상자 자체는 그리 많지 않죠. 아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적이 사람을 헤치는 걸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의 공격은, 공사 자재의 파괴에 집중되어 있다.
사람이 있어도 물자가 손상된다면, 철도 공사의 진척은 느려질 수밖에 없다.
“명백히 원철의 사업을 겨냥한 겁니다. 말씀해주십시오. 대체 카라코룸과 그 주변부 민심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겁니까?”
류성일은 다시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반란군 잔당은 이미 멸망한 자유 공화국의 이상은 포기한 것으로 판단되네. 그보다는 다른 구호로 현지 주민들과 결탁하고 있지.”
“설마.”
“그 설마일세. 반(反)고려 투쟁 말이네.”
안 좋은 예감이 눈앞에 현실로 들이 밀어졌다.
“민심은 이미 우리 고려 내전 당시부터 나빠지기 시작했다네. 서북부에 살던 몽골계 주민들을 대거 카라코룸으로 이주시켰을 때 말일세.”
“……그랬죠.”
갑자기 기반을 뽑혀 낯선 땅에 옮겨 심어진 사람들의 기분이 유쾌할 리 없다. 전에 재연과 함께 카라코룸 답사를 왔을 때도 분명히 느낀 사실이다.
“몽골 내전에서 고려군이 활약해 카라코룸에 입성한 것도, ‘고려의 내정 간섭’으로 여기는 여론이 상당하네. 반란군 잔당은 이런 불만 여론 위에 안착한 셈이지.”
그런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눈에는 고려의 동명-카라코룸 철도 개통 사업이 곱게 보일 리 없다. 견하가 카라코룸 일대의 빠른 고려군 개입을 의도하고 이런 일을 벌이는 걸, 저쪽도 대충은 짐작할 것이다.
너무 냄새가 나니까.
가만히 있던 임병욱이 묻는다.
“류 장관님, 하지만 칸발리크에서는 우리 고려에 대한 여론이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칸발리크-동명 간 노선 공사에서도 적대적인 움직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는데…….”
“그거야, 칸발리크 입장에서는 우리 고려가 사태를 수습해 준 은인이니까. 특히 직접 칼을 휘두르며 땀을 흘리신 우리 폐하에 대한 감사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오.”
견하는 그 말을 거들었다.
“그 사람들이 설령 반감을 품더라도, 반란군에 대한 증오가 더 깊겠죠. 칸발리크 테러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견하는 홀로 납득했다.
그런가. 칸발리크와 카라코룸 사이의 분위기 차이는 여기서 비롯된 건가.
초조감에 흔들리는 견하의 눈.
그 눈을 보며 류성일은 틈새를 포착한다.
대원철도주식회사는 감찰국장 주견하의 야심에 상당히 중요한 사업인가 보군.
그 틈새를 포착하자마자 제안을 하나 던져본다.
“카라코룸-동명 철도 노선 사업, 다이온이 성립된 지금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겠지. 카라코룸 행정장관으로서 책임을 통감하네.”
“단순히 개통의 문제는 아닙니다. 시간과 자본을 충분히 들이면 개통은 될 테니까요. 문제는 그 과정에서…… 지나친 민심 이반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제 막 첫걸음을 뗀 다이온.
몽골인들이 고려인에 대해 이렇게까지 반감을 품는다면, 위험하다.
몽골인과 고려인이 함께 ‘알타이 민족’이라는 가상의 공동체를 형성해도 부족한데, 서로 갈등한다면…… 한족 통제부터 시작해서 모든 문제가 어그러진다.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견하는 재연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려본다.
다이온 내에서 몽골인들에게 뭔가 ‘역할’을 준다면…… 합병의 반감을 최소화할 수 있지 않겠냐고 했었다.
그렇지만 대체 무슨 역할을 주어야…… 데렘칭을 만나봐야 하나?
이 순간 류성일은 주견하의 이 사업이, 미리안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음을 눈치챘다.
이것은 활로다.
정치 생명을 연장할 활로.
주견하는 미리안의 충복이자 연인이지만, 분명 자기만의 야심을 품고 있다.
그 야심을 조금 거들어준다면…….
“카라코룸 특별행정구의 예산은 꽤 견실하게 운영되어 왔네. 여유 자금이 상당하지. 그러니 원철의 사업에 우리 카라코룸 특별행정구도 출자하는 방안은 어떨까 싶은데.”
고민하던 견하가 고개를 든다.
투자자가 늘어나는 건 단순히 그 투자자의 자금만 얻어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누가 투자했다더라, 라는 소문만으로도 다른 투자자를 끌어들이는 효과가 있다. 류성일 정도 되는 거물의 투자는 더욱 그렇다.
“민심의 장악은 선정을 펼치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겠지만, 당장 급할 때는 돈이 최고 아니겠는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장관님 덕분에 자금이 넉넉해진다면…… 철도 용지의 보상 금액도 높일 수 있고, 각종 사업을 벌여서 몽골인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돈이 얽히면 지금까지의 감정이야 어쨌든 동반자가 된다.
고려인의 투자가 몽골인의 생활 개선에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반감 자체를 없앨 수는 없더라도, 적대 의식만큼은 치워버려야 한다.
“장관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다.
류성일은 그런 청년의 뒤통수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곧이어 올라온 날카로운 눈빛에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호의에는 당연히 대가가 따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