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온(11)
“삼자대면이군!”
벨리사리오스 황자는 팔을 벌려 신수덕을 맞이한다.
“두 동양인이 내 가장 비밀스럽고도 중요한 손님이라!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군.”
“옛 다이온이 건재하던 때에는 종종 사신과 상인들이 콘스탄티누폴리와 칸발리크를 오갔겠지요.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때의 만남을 재현하는 게 아닐까 싶군요.”
그 날카로운 얼굴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말투.
신수덕은 그렇게 벨리사리오스의 말을 받아냈다.
황자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간다.
“그렇지, 정말로 동방에서는 다이온이 부활하고 말았소. 그곳도 마치 중세를 재현하는 것 같군.”
벨리사리오스는 신수덕과 토칸에게 앉으라 손짓했다.
상석에 앉은 황자의 좌우로, 신수덕과 토칸이 앉아 그를 보좌하는 모양새가 된다.
“중세라고 하니 이런 의문이 드는데, 다이온 연방의 성립은 세상의 진보인가, 퇴보인가 하는 거요.”
“연방의 성립 자체로는 진보인지 퇴보인지 논하긴 어렵다고 봅니다. 연방이 무엇을 할 것인가가 결정하겠지요.”
“호오, 신수덕 총독은 그렇다면 다이온 연방의 행보가 어떠하다고 보시오?”
벨리사리오스는 신수덕의 옛 직책을 불러주며 대우한다. 신수덕은 그 점에 간략하게 예를 표하며, 질문에 답한다.
“갈라진 상태에서의 공존도 아니고 완전한 통합도 아니다…… 그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이름을 빌렸을 따름이니, 현시점에선 도저히 훌륭한 체제라고 할 수는 없겠군요.”
“이제 막 성립된 연방에 대한 평가가 그러하시다면, 이제 막 해체된 연방에 대한 평가는 어떻습니까?”
아즈텍 연방에 대한 물음이다.
신수덕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마찬가지로, 최근 몇 년간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정치만을 보여왔으니 훌륭하다고 말하긴 어렵겠습니다. 그러니 결국 붕괴하고 만 것이지요.”
“아즈텍의 자리를 대신할 자가 누구라고 판단하오, 신 총독.”
떠보는 듯한 질문이었다.
“저는 제가 훈련시킨 철혈의 꽃, 그 단체가 주축이 된 대륙해방군, 그리고 그들이 막 건국한 멕시카 자주국이 내전의 최종 승자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신수덕의 파충류 같은 얼굴은 나름의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모습이 아주 기괴했다. 어울리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온화한 미소 그대로 어떤 변화도 없었으니까.
황자의 얼굴은 반대로 생동감이 넘친다. 그의 표정이 흥미를 잔뜩 머금었다.
“그렇게 대답하는 건 몸담았던 조직에 대한 의리나 애정이오? 아니면 본인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인가?”
“둘 다입니다, 전하. 일부나마 제가 기른 것이니 애정이 있을 수밖에 없고, 제 최선을 다했으니 그만한 결과를 거두리라는 자신감도 있지요. 허나 그것들 말고도…… 다른 이유로 확신이 듭니다.”
“다른 이유라면?”
“그 ‘이유’가 바로 제가 전하께 선물로 가져온 것입니다. 아즈텍 대륙의 전장에서 멕시카 자주국은 이제 전혀 다른 전쟁을 합니다.”
“……전장에 괴물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유럽 각국의 정계에 퍼지고 있소. 아마도 그것은,”
그렇게 말을 늘이며 벨리사리오스는 토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칸발리크에서 일어났던 것과 매우 유사한 현상이겠지?”
“조금 더 ‘정교해진 기술’이라고 생각해주시길. 칸발리크의 사례가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 공격이라면, 이것은 필요한 장소에, 한정된 시간 동안 특정한 적만을 타격합니다.”
“한쪽이 전략적이라면 다른 쪽은 전술적이라고 할 수 있나.”
“전술적인 무기이면서, 동시에 전략마저 뒤엎을 만큼 강력합니다. 전쟁의 양상은 이것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전쟁을 뒷받침하는 사회의 모습도, 이것으로 바뀝니다.”
사회 전체가 군을 뒷받침하는 구조여야 한다는 건 허동주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그 사상이 실제로 지상에 구현 가능한지 시험해보고 싶다. 신수덕은 그런 마음으로 망명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회의 모습이 바뀐다, 라. 멕시카 자주국이 내전에서 승리한 이후의 사회상에 대해 뭔가 그려본 게 있소?”
“희망적으로 관측한다면, 이라는 가정하에 생각해 본 건 있습니다. 하지만, 남은 일은 어디까지나 멕시카 자주국이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멕시카에서 할 일은 다 끝났다는 건지 아니면, 멕시카가 어찌 되든 알 바 아니라는 건지 모르겠군. 그럼 그 ‘희망적 관측’이 뭔지 말해보겠소?”
살짝 도발하듯 던진 질문이다. 신수덕은 그 도발을 못 들은 듯 흘려버리고 대답했다.
“저는 아즈텍에 있으면서, 여기 토칸의 연락을 받으며 전하의 이상에 대해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상이 저의 구상과 공통점이 많다고 느꼈지요.”
“모든 인간의 이단화. 그렇게 이단이 된 인류에 의한 지배. 신 총독이 아즈텍에서 벌인 일도 그런 방향이라는 거요?”
“거의 그렇습니다. 저는 ‘모든 인간’이 아니라 ‘특정 민족’, 특히 제 동포들이 특별해지는 걸 원하지만 말이죠.”
“뭐 그런 차이야 동맹 사이에는 흔한 법이니까 그렇다 치고. 신 총독이 만들어낸 괴물과 내가 구상한 ‘이단화’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면?”
“아시다시피 이단 관련 연구는, 우리의 통념 속 ‘신’은 없다는 쪽으로 기운 상황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에게도 ‘영혼’은 없다는 결론이 나오고들 있지요.”
“그렇소. 그러니 없는 신과 영혼을 만들면 된다는 무리도 있었지. 여기 토칸과, 그가 속했던 조직이 공작했던 ‘혁세주교’같은 것들.”
혁세주교의 이름이 나오자 토칸의 몸이 살짝 경직된다. 신수덕의 검은자위가 그런 토칸을 훑는다. 벨리사리오스는 왜 그런 걸로 놀라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나는 ‘다른 세상’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소. 이 도시의 변두리 궁전, 그 구석에 앉아서 제대로 찍히지도 않은 사진으로 보고받는 게 전부니까. 그러니 내가 아는 수준에서 말하자면, 사람을 이단으로 만드는 것과 그 하얀 괴물로 만드는 것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말 아니오?”
신수덕의 얼굴에서 예의상 차렸던 웃음이 사라진다. 파충류의 눈이 벨리사리오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적대도 친밀도 아닌, 그저 응시하는 것뿐인 행위.
하지만 벨리사리오스는 그 표정과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야 장사해 볼 마음이 드셨나보구만.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실로 그러합니다.”
“우리의 조잡한 육신은 영혼을 받아들이지 못했지. 그러니 육신의 구성 원리가 손상되는 걸 감수하고 영혼을 쑤셔 박든지, 아니면 영혼을 우리가 다룰 수 있을 법한 도구로 제련해야 했소.”
벨리사리오스는 신수덕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따라오시오.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보여드릴 것이 있으니. 토칸, 그대도.”
***
벨리사리오스는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신수덕과 토칸은 벨리사리오스가 채비를 마치기까지, 잠깐 단둘이 남았다.
“우리 두 사람이 이야기할 시간을 준 걸 겁니다. 보통내기가 아니니까요, 저 황자는.”
신수덕은 긴 콧바람을 흘렸다.
“우리가 뭔가 정보를 교환하면 거기서 얻을 게 있다고 생각한 건가?”
“혹은 우리 사이의 협력 구도에 뭔가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죠. 여기서는 우리 둘 다 이방인입니다, 신 총독. 우리가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벨리사리오스 황자는 우리를 실컷 이용만 할……”
토칸의 말을 끊고 신수덕은 반문했다.
“협력 관계라고 하기엔 길지도 않았고 돈독하지도 않았네. 게다가 서로 이익과 목표가 일치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당신의 총독부가 와해되고 내가 속했던 조직이 흩어졌다고 해서 협력 관계가 청산되는 건 아닐 겁니다.”
“이보게, 몽골인 젊은이.”
신수덕의 눈길이 똑바로 토칸을 향했다.
빈정대는 듯했던 토칸의 말들은 그의 목구멍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자네의 말은 내가 자네를 믿는다는 전제하에서나 통할 걸세. 지금 자네가 황자를 믿지 말라고 하면 내가 그 말대로 해야겠는가? 도대체 어떻게 ‘믿지 말라’고 하는 자의 말을 ‘믿을’ 수 있겠나.”
토칸은 참으로 오랜만에, 긴장으로 침을 삼켰다.
분명 신수덕은 이단이 아닐 것이다.
자신이 손가락만 까딱하면 신수덕의 몸뚱어리쯤이야 단숨에 으스러뜨릴 수 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게 아니다.
움직이면, 그 움직임이 뱀의 시야에 들어가니까, 그러니까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포식자 앞 먹이의 감각.
토칸의 증오와 살의를 아득하게 뛰어넘는 신수덕의 악의.
“그러니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리게끔 앞에서 부채질하지 말게. 내 일에 관한 판단은 내가 하네. 자네는 자네대로 판단하고, 반응하면 돼.”
알겠는가, 하고 신수덕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제야 조여오던 숨통이 트인 듯, 토칸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토칸도 사지를 헤쳐 여기까지 온 남자. 물러서진 않는다.
멱살을 잡거나 잡힐 각오를 하고, 대담하게 신수덕에게 말을 던진다.
“고려 태사 미리안의 측근, 주견하가 벨리사리오스의 별궁에 다녀갔었습니다. 꽤 돈독한 우호의 대화를 나누고 돌아간 것 같더군요.”
신수덕은 눈만 돌려서 토칸을 본다.
토칸은 주견하의 이름이 그를 자극했음을 직감했다.
허동주가 죽임을 당할 때의 상황이 워낙 복잡하기에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 남자는 허동주 참살의 유력한 용의자다.
“벨리사리오스는 우리하고만 협력하는 게 아닙니다. 고려 태사와는 옛날부터 친분이 있는 것 같더군요. 주견하는 태사의 개인 특사 자격으로 왔을 테고요.”
“그래서 태사와 황자가 동맹이라도 맺은 건가?”
“고려 쪽에서는 황자가 로마의 정권을 잡을 시, 그 정권을 승인해주기로 약속한 모양입니다.”
고려 측의 지지 표명. 형태는 없지만 벨리사리오스 입장에서는 든든한 지원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이들 종교의 십자가 같은 모양새군. 한 축으로는 나나 자네와, 다른 한 축으로는 고려와 동맹을 맺었다…… 그 교차점에 벨리사리오스가 있고.”
“극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우리 두 사람의 쓸모가 다하면 목만 썩둑 해서 고려에 넘겨줄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충분히 주의할 필요는 있겠군.”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번에는 신수덕이 토칸에게 물었다.
“서로 목표를 확인해보지. 자네는 아직도 그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이상을 따르는 건가, 아니면 몽골 황실의 붕괴를 바라는 건가?”
“결과적으로 몽골 황실이 붕괴된다는 면에서는 같으니, 후자인 것으로 하죠.”
“좋아. 그렇다면 나도 돌아가신 문하시중 각하의 복수인 것으로 하지. 여기까지는 상충되는 요소는 없다고 봐도 되겠지?”
토칸은 짧게 끄덕였다.
“우리 목을 지키려면, 우리 목을 쳤을 때 가해질 부담을 키워야 하네. 자네도 나도 그럴만한 수단은 갖추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