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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02화 (302/541)

다이온(8)

우흥섭 대장은 안 그래도 깡말랐던 몸이 그간 더 마른 듯하다.

그럼에도 안경 너머 두 눈에서 빛나는 지성의 불꽃만큼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좀 더 젊었던 시절에는 열정적인 참모였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눈빛이다.

그는 한 손으로는 안경으로 고쳐 쓰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조심스레 편지를 든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댄다.

황제 폐하를 수행하던 장교 중 하나가 칸발리크에서 직접 가져온, 폐하의 친필 서한이다.

황제는 암호를 통하는 것보다 사람을 통해 직접 보내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밀칙 같은 건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줄 알았는데.”

편지 자체는 사소한 안부 편지에나 어울릴법한 종이에, 소녀의 둥글둥글한 글씨가 적혀 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묵직하다.

-응천 왕궁의 정세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할 것.

“정세 변화를 살피고, 내 재량에 따라 행동하라는 건가.”

그것만 적혀 있었다면 참으로 모호하군, 이라 중얼거리며 고뇌에 빠져들었을 테지만, 성은이 망극하옵게도 겨냥할 과녁은 정해주시었다.

-개봉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할 것.

“울제이 칸이 뭐가 수를 쓰기 전에 대처하라는 거군.”

낭키아스의 수도 응천에는 어린 칸 바이다르가 와 있다고 들었다.

외국에 나와서 진행하는 토벌 작전이니 전선에만 머물 순 없고, 필연적으로 응천의 왕궁도 오가야 한다. 그러다가 한번 알현 정도는 하겠거니, 여겼지만 그 소년을 둘러싼 음모에 가담하게 될 줄이야.

고려만 여기에 관련된 게 아니라, 키타이까지 움직인다면 보통 거대한 음모가 아니다.

-낭키아스의 독립적 지위를 유지하고자 움직이는 파벌이 있음. 키타이의 야망을 견제하는 파벌도 있음. 이들은 일치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음. 이들이 협력을 요구할 시 적절히 대응할 것.

군인, 그것도 군대를 이끌고 온 자신에게 ‘대응’을 요구한다면, 낭키아스에서 쿠데타 칼춤이라도 추라는 이야기인가.

타국에서 쿠데타라니. 암담한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폐하께선 방법을 일러주시었다.

“응천에는 타국 군대의 힘을 빌어서라도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자 하는 무리가 있군.”

그 무리가 기동과 보급을 책임져 줄 것이다, 라는 의미다.

“자, 그럼. 밀칙은 어디까지나 밀칙이니.”

우흥섭은 편지를 곱게 접어 불에 태웠다.

“가장 중요한 건, 황제 폐하는 군 통수권자는 아니시라는 점이다.”

군 통수권은 어디까지나 대원수이자 태사, 제국최고회의 의장인 미리안에게 있다.

“태사 각하는 이를 알고 계실까? 태사 각하께서도 폐하의 이 밀칙에 동의하시는가?”

아닐 것이다. 우흥섭은 정치와는 거리가 먼 군인이지만, 황제가 ‘밀칙’이라는 형식으로 우흥섭에게 직접 접촉한 것만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태사가 동의하고 있다면 밀칙을 내릴 필요가 없지 않을까? 비닉의 문제라 해도 황제가 직접 나서는 게 아니라 태사가 황제의 뜻을 받들어 은밀히 명령을 내리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우직하게 무시할 수도 없다.”

전체적인 맥락을 보자.

자신과 부하들은 동아시아 정국의 안정만을 위해 나와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순진한 믿음은 파견되기도 전에 없어졌다.

정도의 차이일 뿐, 동아시아를 고려의 영향권 아래 두고자 하는 큰 움직임의 틀은 같지 않을까?

비록 해외주둔제한법 때문에 정기적으로 제국최고회의에 출석해서 보고를 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의원과 국민들, 정치권의 기대는 분명 우흥섭의 피부에 끈적하게 와 닿는다.

고려의 패권이라는 기대가.

“고민되는군.”

휘하 참모들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문제다. 털어놓는 순간이 온다면, 정말로 그런 날이 올지 모를 쿠데타 결행의 날이겠지.

잠시 안경을 벗고, 손가락으로 피로한 눈두덩을 누른다.

낭키아스와 고려만의 문제라면 상황은 좀 더 단순해졌을 것이다. 단순한 만큼 편했을 테고. 하지만 여기에는 키타이, 더 나아가 칸발리크 황궁도 얽혀 있다…….

“키타이라.”

뭔가가 퍼득 떠올라 종이 위에서 펜을 놀리기 시작한다.

우흥섭에겐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지가 있다.

키타이 파견군의 사령관 장해진.

낭키아스의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가 전해졌다면, 장해진 대장 역시 지금쯤 뭔가를 지시받았을 것이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알 수 있겠지.

한시름 덜어냈다.

종이를 접어 가슴 주머니에 넣고, 우흥섭은 눈 아래에 놓인 작전도에 다시 주의를 기울였다.

뭔가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일단은 반란 진압이 마무리된 이후일 테니까.

***

적은 약하지만, 전선은 길다.

낭키아스의 서남부.

서쪽의 대예에서 남쪽의 보우슈엥에 걸쳐 길게 늘어진 국경지대.

숲과 산악, 구릉, 강과 습지가 정신없이 얽힌 변방이다.

너무도 날것의 자연이라 변방이 된 듯도 하다.

이 자연을 무대로 반란군은 고려와 낭키아스의 군대를 괴롭혀 왔다.

그간 일본 측 관전무관의 눈치를 보느라 계곡 하나, 동굴 하나를 제압하는 데에도 너무나도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었다.

하지만 아즈텍 내전의 발발 이후 일본과 합의를 보면서 관전무관은 철수.

이제는 마음껏 기갑사를 꺼내 쓸 수 있게 되었다.

기갑사 C-31 모델이 몽골 전역에서 화려한 데뷔전을 치른 후, 일반 부대에도 조금씩 기갑사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물론 최신예 C-31이 아니라 낡은 C-30이나 C-29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낭키아스 파견군에겐 든든한 전력이다.

보병들은 안 그래도 강력한 이단이 갑옷까지 두르고 적을 박살내는 모습을 여유롭게 구경한다.

기갑사 하나가 적이 저항 중인 동굴 안으로 진입.

동굴 안의 적은 기꺼이 희생하기로 한 미끼였는지, 동굴 입구가 폭파되어 무너진다. 저것 때문에 전에는 동굴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적의 흔적부터 말끔히 제거해야 했다.

게다가 동굴 안으로 진입하지도 못하고, 불편하게 밖에서 간접적인 수단을 써야 했고.

바위에 날카로운 선이 그어진다. 기갑사가 들고 있던, 이단의 힘이 작용한 칼날이 바위를 가른 것이다. 말도 안 되는 힘으로 기갑사는 깨진 바위를 밀어낸다.

기갑사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동굴은 더 심하게 무너진다.

“조금 부서진 건 어쩔 수 없나.”

“뭐, 기갑사도 이단도 불사신은 아니니까.”

그래도 맨몸의 보병이 저런 데 있다가 어떤 끔찍한 꼴이 되었을지를 생각해보면, 손해는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동굴이 산 너머까지 뚫려 있는 게 아니라면, 반란군이 저걸 치우고 살아 나올 순 없겠지.”

“이대로 전진해도 무방하겠어.”

작전의 흐름 자체는 단순하다. 이렇게 의심 가는 곳 전부를 뒤져서 철저히 장악한 후 전진하는 것이다.

기갑사의 도입이 그 과정을 시원하게 밀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작전은, 분명 낭키아스 내에서 반란군의 기반을 걷어낸다는 점에서는 효과적이나, 부작용도 동시에 가져왔다.

반란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긴 했지만 섬멸되진 않았다.

그들은 그대로 국경을 넘었다.

그 너머에도 그들의 동포가 살고 있으니까. 모든 동포가 우호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심정적으로나마 동조해준다.

즉 낭키아스에서의 토벌 작전은 반란군을 국경 너머로 몰아냈을 뿐, 완전한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다이온의 전신인 관세동맹 4개국에 비해, 보우슈엥과 대예의 행정력은 현저히 뒤떨어져 있다.

참으로 운이 좋아서 옛날과 같은 왕정을 유지하는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행정이든 군대든 개혁하기보다는 세계대전이 만들어 준 안전망 위에서 현상 유지를 즐겼다.

그런 그들에게 국경을 넘어 들어온 한족 반란군은 태평천국의 악몽이 돌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패배를 거듭했다고 해도 어쨌든 고려 및 낭키아스군과 싸우며 전투 경험을 쌓은 군인들이다. 대예군이나 보우슈엥군에 비한다면 지극히 정예한 부대다.

결국 대예와 보우슈엥은 칸발리크와 응천에 항의와 문제 해결 요청을 전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시골 지역을 장악해가는 한족 반군과 힘겨운 싸움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이온 측에서도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결국은 움직일 것이다. 그런 희망적인 관측을 하고 있었건만.

서쪽에서 들려온 소식은 두 나라의 왕궁 위로 먹구름을 드리웠다.

***

바라트의 주석, 아슬란이 오늘 주재하는 회의는 오랜만에 중대한 사안의 결정을 앞두었다.

아슬란은 여전히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회의 참석자들은 내각과 군의 인사들이 뒤섞여 있었다.

“세계혁명이라는 목표는 전진해야 하오. 허나 불가피한 물리적 거리, 그리고 현실적인 국제 정세의 문제로 아즈텍 대륙의 동지들을 지원하지 못함은 유감이오.”

현실적인 국제 정세의 문제란, 고려 및 다이온과의 협약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

누가 여기서 아슬란을 비판할 수 있으랴.

아슬란의 말 자체도 옳긴 하지만, 그가 승리자였기에 더욱 비판할 수 없었다.

그는 바라트 혁명의 승리자였다. 세계대전의 승리자이며 후계자 경쟁의 승리자였고, 페르시아 혁명 확산의 승리자였다.

얼마 전, 6차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에서는 외교적 승리까지 거두었다. 이제는 세계가 공식적으로 바라트가 승전국임을 인정해준다.

승리, 승리, 승리, 승리, 승리…….

승리는 압도적 권위를 보장한다.

게다가 그 많은 승리 중에서, 그 무시무시한 공산당 총서기를 끝장냈던 승리는 델리의 주석궁에 출퇴근하는 모든 사람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모두가 경외의 가면을 쓰고 아슬란의 말을 경청한다.

아슬란은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그는 옳다고 생각한 방안을 밀어붙인 끝에…… 그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 분위기의 정권을 만들었다.

후회.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그러나 여러 동지들의 외교적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우리는 동쪽으로도 혁명을 확산할 기회를 잡았소. 버마에서의 혁명, 그 혁명에 대한 지원, 혁명의 성공 후 우리 공산권 동맹에 참여시키는 것 모두, 고려는 묵인하겠다고 했소.”

물론, 하면서 아슬란은 눈을 감았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승인을 받아 혁명을 진전시키는 듯한 모양새는 좋지 않겠지. 맞소. 지극히 비굴한 데다 반혁명적이라는 비판을 들을 수도 있는 일이지. 그런 비판은 충분히 가능하오.”

아슬란의 자아비판에 모두의 눈에 놀라움이 차오른다. 뭐지? 무슨 말일까? 저 말에 누가 동의하는지 시험해보는 걸까?

“하지만 우리는 과학적 혁명을 추구하오. ‘과학적’이란 말에는,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태도라는 의미가 담겨 있소. 혁명의 폭발력이 20년 전과는 다르다는 걸 우리는 인정해야 하오. 여기 혁명 초기의 동지들도 있는데,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 거요. 그렇지 않소 동지?”

“그, 그렇습니다!”

지목당한 관료 하나가 뻣뻣한 자세로 답한다. 답하자마자 얼굴의 핏기가 가신다. 이 대답이 실수는 아니었을까.

하지만 아슬란은 부드럽게 웃을 뿐이다.

“옛 추억을 떠올리는 건 즐겁군. 어쨌든, 솔직해집시다. 우리의 관절이 이제는 삐걱댄다는 걸. 우리는 늙었소. 혁명은 다음 세대가 이어받을 거요. 그런데 그 전에, 좋은 일을 하나 남기고 가야 한다는 말이 하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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