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온(7)
벌여놓은 일이 많은 만큼, 예기치 못한 요소가 자신을 위협하는 일을 방지하려면 시선 한편에 정계의 변화를 담아두고 있어야 한다.
“정보력이 정말 고프군.”
감찰국 조직으로서는 한계가 있다.
소꿉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고 비하할 수준은 아니지만 정치경찰실의 한 부서에 불과하다는 점은 엄연한 현실이다.
정치경찰실 또한 옛 야별초에 비하면 미약하기 짝이 없고.
견하는 아직 평범한 소년이던 시절, 야별초가 얼마나 두려운 이름이었는지를, 어른들이 야별초 이야기만 나오면 조심스러워졌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 조직을 박살 낸 것은 견하와 루우지만, 야별초가 지녔던 조직으로서의 위상은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요즘은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제국정보사령부와 하루빨리 접촉할 필요가 있겠어. 굽히고 들어가더라도 일단은 정보 조직으로서의 자산이 필요해.”
군 정보부라고도 불리는 제국정보사령부.
일단은 이들의 협력을 구해야 한다. 야별초의 인적 자산이 거의 증발해버린 지금, 정보의 수집과 취급에 관해 배움을 청해야 한다.
다소 굴욕적일 수는 있겠지만.
로마에서 벨리사리오스를 통해 배운 바도 그렇다. 그들 역시 적어도 군 정보부와는 척을 지지 않고, 어떻게든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고 했다.
거기서 인재를 빼 오기도 하고, 자기네 사람을 심기도 하고.
“구 야별초에서 일하다 살아남은 사람 중에, 사상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은 얼마나 되지?”
수첩을 꺼낸다. 귀국하면 나제홍을 통해 할 일이 많다. 구 야별초 직원 중 충분히 검증된 사람들, 혹은 무방한 인재들은 재교육을 통해 정치경찰실로 끌어들여도 좋을 것 같다.
“제국정보사령부의 경계를 사지 않을 만큼 조심스러워야겠지만.”
옛 경쟁자의 부활이라고 여겨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각사각. 펜이 수첩 위로 미끄러진다. 대충 갈겨 쓰고 나서 주머니에 꽂은 후, 생각을 전환한다.
이번엔 ‘장소’의 문제다.
왜 류성일의 임지는 카라코룸인가.
“류성일을 법무장관 자리에서 밀어낼 필요는 있었다. 그러나 아예 은퇴시킬 수는 없었다…….”
류성일 정도 되는 경력과 위치의 인물이라면, 몽골 제2의 도시 카라코룸의 행정장관 자리에 어울리긴 했다.
그런 거물급 인사를 카라코룸에 배치했다는 것 자체로, 리안이 카라코룸을 무겁게 여긴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카라코룸 시민들에게도 그 의미는 각별할 것이다. 어쨌든 군인인 김천열이 행정장관으로 있을 때는 ‘군정’이 펼쳐졌다.
그러나 민간인인 류성일이 행정장관으로 왔다는 건 ‘민정’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이제 시민들은 정말로 내전이 끝났음을 실감하겠지.
그러나 초점을 조금만 달리하면, 문제가 보인다.
“카라코룸을 ‘어떤 정치인의 은퇴 과정’으로 활용한다는 건 큰 문제야.”
리안이 카라코룸을 무겁게 여긴다 해도, 그 무게감은 딱 거기까지라는 뜻이다.
향후 다이온의 수도, 유일한 황제와 유일한 태사의 본궁으로 삼으려는 견하의 계획과는 어긋나 있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균열.
무시하고 넘어가도 무방한 균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견하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여기서 어긋난 일이 미래에 얼마나 더 큰 괴리로 돌아올지 알 수 없어.”
견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다.
효윤도 지나도, ‘견하의 뜻이 리안과 일치하는가, 견하의 독단은 아닌가’ 걱정했었다.
그 걱정은 이런 뜻이었나.
리안은 말했었다. 시행착오를 해보라고.
견하는 자신이 불가피한 ‘상황’을 만들면 리안이 어쩔 수 없이 그 안을 채택해줄 것이라 생각해왔지만…… 어쩌면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리안이 용인할만한 선이기에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이다.
카라코룸을 둘러싼 이런 의견 차이는, 다이온과 고려의 미래에 대한 전망의 차이를 반영한다.
그리고 이 차이를 좁히려면…….
“……한 번 누나 정면에서 의견을 세워 볼 수밖에 없나.”
다소 대립하게 될지라도.
어쩌면 하던 일을 모조리 중단당하고 근신 처분을 받게 될지라도.
거쳐 가야만 하는 과정이라면.
***
오랜만에 응천의 왕궁에 도착하고서야, 바이다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왕궁이지 이곳도 명나라의 역대 황제들, 순나라의 이자성과 주나라의 오삼계, 그 오삼계의 후예들이 살던 황궁이다. 비교적 짧은 기간 존속했지만 태평천국의 황제들도 이곳에 살았다.
화려함과 규모로는 칸발리크의 황궁에 뒤지지 않는다.
바이다르는 칸발리크에서 이 아름다움을 그리워했다. 그에게는 숨통 트이는 ‘집’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바이다르의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하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소?”
“부끄럽기는커녕 자랑스럽소. 이것이 전하를 위한 최선이기 때문이오!”
“그런 건 최선이 아니라 매국이라 하는 것이외다!”
“말씀 삼가시오!”
그 ‘집’에서 바이다르는 지금, 자신의 앞을 오가는 고성에 깜짝 놀란 눈으로 앉아 있다.
어좌 위에서 몸이 굳어버렸지만, 떨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 소년은 잘한 것이다.
누구나 루우 테무르나 미리안이 될 수는 없다. 열두어 살 소년이 높은 어좌에서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눈앞에서 건장한 사내들이 목소리를 높이면 어린 소년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언성을 높이는 이들 중에는 세계대전 당시의 용사도 있다. 덩치는 작아도 놀라운 기백을 뿜어내는 정치가도 있다.
물론 바이다르도 칸의 아들로서 정치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보고 들어왔다.
하지만 칸의 아들과 ‘칸’은 엄연히 다르다.
관료들의 합의로 꾸려나가는 섭정 체제지만, ‘칸 바이다르’는 반드시 각종 회의를 주재해야 했다. 형식적일지라도 말이다.
매일같이 어좌로 끌려 나와 언쟁의 한가운데에서 흔들리는 것이 바이다르의 일과가 되었다.
바이다르의 어머니, 즉 게레센제의 아내라도 이곳에 와서 섭정을 맡았더라면 바이다르의 짐을 덜어주었겠지만…… 그녀는 카툰(皇后)으로서 게레센제의 곁에 남아야만 했다.
눈앞의 관료들은 다양한 목적을 끌어안고 응천에 남은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낭키아스에 자신의 이권이 달려서 남았다.
누군가는 게레센제의 영지를 지키고자 응천에 남았다.
또 누군가는 게레센제의 어린 아들을 보좌하고자 칸발리크에서 응천으로 돌아왔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격론을 벌이는 주제는, 바로 한족 반란 토벌이었다.
토벌의 큰 틀 자체는 이미 정해져 있다. 승리도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하는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 볼로드가, 그 배후의 루우와 주견하가 정치 공작을 벌여두었다.
“이 섭정 체제에 고려의 우흥섭 대장을 참여시키자니, 무슨 의도인지 도무지 모르겠군!”
“고려군은 어디까지나 우방으로서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해 파견된 것. 정치 문제는 그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오!”
일각에서 낭키아스 섭정 체제에 고려의 파견군 대장인 우흥섭을 참여토록 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의견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낭키아스가 다이온의 일부가 되었고, 고려가 다이온의 참관국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국경을 허물 필요가 있을까?
“반란군의 습격이나 점령으로 낭키아스 국토의 적지 않은 부분에서 행정이 마비되었소. 반란을 진압하고 나면 일정 기간 불가피한 군정이 이어질 거요. 이 군정에는 고려군이 당연히 참여하게 될 테고, 우리는 군정의 ‘자문위원’으로서 우흥섭 대장을 초빙해야……”
“고려군은 외국군이오! 사설 경비업체가 아니란 말이오! 반란 진압이 끝나면 철수하는 것이 당연하지, 군정에 고려군을 참여시킨다는 발상 자체가 어떻게 당연할 수가 있는지, 원!”
“그럼 지금 낭키아스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을 상대로 다시금 ‘일반’ 행정을 펼칠 여력이 있습니까? 몽골인으로서 한족을 통치한다는 것이 얼마나 섬세함을 요하는지는 잘 아실 텐데요?”
“저도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한족도 우리를 못 믿지만 우리도 반란을 일으킨 한족을 마냥 믿을 수는 없지요. 군이나 관료 집단에 들어온 한족들이 아무리 몽골어를 구사하고 몽골식 이름을 짓고 몽골문화를 즐긴다 해도…… 뒤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압니까?”
“의심 가는 자들을 배제하고 나면, 정말 믿을만한 몽골인 관료와 군인은 한 줌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란을 진압한 이후에도 내심 반란군에 동조하고 있을 한족 주민들을 통치하려면 턱없이 부족합니다. 손을 벌릴 수밖에 없습니다.”
찬성하는 쪽이 그럴싸한 논리를 펼친다. 그러다 곧바로 반론이 들어온다.
“그러니까 그 손을 왜 고려 쪽으로 펼치느냐, 이 말입니다. 카간 폐하께 원군을 청할 수도 있고, 가까이로는 울제이 칸을 향해서도 손을 벌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본토는 내전의 뒷수습만으로도 정신이 없습니다. 우리야 서부 일부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본토는 아예 나라가 두 쪽이 났었어요! 반역자들의 처리, 행정과 치안의 재건에만 매달려도 언제 마무리가 될지…….”
“오죽하면 카라코룸을 고려가 관리하는 특별행정구역으로 지정했겠소.”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고려의 의도는 뻔하지 않습니까! 몽골을 집어삼킬 겁니다. 낭키아스와 키타이는 덤이지요!”
“울제이 칸은 대체 무엇이 루우 테무르 폐하보다 낫기에 그토록 믿는단 말입니까? 그는 아예 카간 자리를 두고 군대까지 동원해서 폐하와 대치했어요! 회수 대치를 벌써 잊었습니까? 말이 좋아서 ‘대치’라고 하고 넘어갔지, 북쪽에서는 아예 교전까지 벌어졌어요!”
“고려의 폐하께서 품은 야심이 크신 건 저도 인정합니다만, 몽골을 위해 많은 걸 하신 분입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죠.”
“어디까지나 민심 장악용 선전……”
“선전 좀 해보겠다고 괴물을 향해 몸소 뛰어드는 황제도 있습니까!”
“나도 차라리 울제이 칸을 믿느니 고려 황제 폐하의 비호를 청하겠소이다!”
“이 사람들이! 어쨌든 우리는 여기 계신 칸 전하의 신하요! 어떤 논의든 결국 전하를 중심에 두고……”
격론에 격론이 더해져만 간다.
루우와 볼로드, 주견하가 ‘고려군의 낭키아스 정계 간섭’이라는 바람을 불어넣은 건 맞지만, 그들 모두 그 의견이 받아들여지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이 기대한 것은, 그 바람을 둘러싼 논쟁의 격화.
낭키아스를 둘러싼 정세를 관료들이 다시 꺼내서 되짚어 보고, ‘길을 모색하게끔 한다’.
모색된 길을 향해 걷기 시작하면, 그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된다. 변화는 발전을 향한 위대한 걸음이지만.
원래 걸음이란, 불안정한 것이다.
울제이 역시 냄새를 맡을 테고, 울제이에게서 길을 찾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 그리고 그들은 손을 잡기 마련이다.
우흥섭 대장과 낭키아스 파견군은 적절한 시점에 움직여주면 그만이다.
“전하! 참으로 황공하옵니다만 이토록 신들의 의견이 모이질 못하니 전하께서 결단을 내려주심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어허, 자네 지금 전하께 뭘 하는 건가?”
“섭정 체제라 해도 군주의 결정권이 소멸한 건 아니외다.”
“이보시오, 지금 그걸 핑계라고 대는 거요? 전하를 이용하는 것뿐이지 않소?”
바이다르는 하마터면 양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싸쥘 뻔했다. 관료들의 말이 마치 자신을 윽박지르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소년은 보르지긴 가문의 일원답게, 그간 받은 예절과 품위에 관한 교육이 헛되지 않도록, 왼손만을 들어 올렸다.
그 손짓에 모두의 말이 멈춘다.
효과가 있다. 다행이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완전히 홀로 서게 된 궁정. 바이다르는 간신히 이렇게 답할 수 있을 뿐이었다.
“고(孤)가 깊이 생각해보겠다. 경들은 필요한 자료를 정리하여 차후 논의를 더 잇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