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온(6)
“대원철도주식회사(大元鐵道株式會社)라.”
어감을 혀 위에서 맛보듯, 견하는 일부러 천천히 그 이름을 발음해본다.
서류 위에 한자로 쓰인 그 이름을 한 번 손끝으로 쓸어본다.
한족을 지배하고 한족의 문화를 말살하려 하면서, 그들이 발명한 문자의 멋들어짐은 거리낌 없이 가져다 쓴다.
한족 동화 정책을 구상한 사람들은, 어쩌면 한족의 문화에서 유용한 것들은 실컷 뽑아낼 심산이 아니었을까.
어떤 자는 아예 한족이 발명한 문자가 아닌 듯 날조하려 들지도 모르고,
어떤 자는 철저히 보조 문자의 지위로 격하시키려 할지도 모르지.
또 어떤 자는 이런 식으로 몽골 및 고려의 문화에 한족 문화가 ‘흔적’을 남기며 순수성을 흐트러트리는 걸 염려할지도 모른다.
견하는 거기까지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한자로 적힌 이 새로운 집단의 이름이 주는 위압감을 즐겼다.
감찰국장의 흡족함에 철도성 장관도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약칭은 ‘원철’이라고 하네.”
정부 내 서열상으로는 분명 까마득한 위에 있는 사람이건만, 임병욱은 권력 핵심의 냄새를 맡고 허리 숙이기를 꺼리지 않았다.
물론 실제로 허리를 숙이는 건 아니다. 견하도 상대방에게 그 정도 체면을 세워줄 줄은 안다.
장관님, 장관님 불러대는 깍듯함은 철저히 지킨다. 임병욱이 그 태도를 오해해 건방지게 나온다면 좀 달라지겠지만.
임병욱은 굳이 따지자면 나제홍 실장에 가까운 사람이다.
나제홍이 안정적이고 두둑한 연금에 더 관심이 많다면, 임병욱은 출세에 더 관심이 많다는 차이가 있을 뿐.
“탁월한 작명이십니다.”
그렇게 칭찬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진심으로 감탄하기도 했지만, 칭찬은 원래 구체적일수록 더 효과적이니까.
“침략이나 정복 의도를 내포하지 않은 이름. 다이온(大元)이라는 새로운 체제에 딱 걸맞게,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데 앞장서겠다는 듯 친근하면서도 적절한 권위를 갖춘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철도망을 통한 몽골 잠식과 합병 작업의 선봉으로는 아주 알맞은 이름이다.
이런 이름에, 고려 제국의 지원을 받는다는 배경. 유능한 인재들을 끌어들이면서 무럭무럭 자라기에도 딱 좋지.
“이름뿐이겠는가. 보게. 주 국장이 아주 좋은 아이디어를 주었어. 선대 태사 시대의 메갈로폴리스 건설 사업. 이것도 일단 그 이름부터 신경을 좀 썼네. ‘대원수도권확장계획’이라고 말일세.”
아즈텍 연방의 마지막 통령, 네자우알 테콜로틀이 자결하기 전.
그리고 쿠에츠팔린이 수도의 광장에서 멕시카 자주국의 성립을 선포하기 전.
주견하와 임병욱 두 사람은 철도 공사가 한창인 현장을 감독한다는 명분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주 국장 자네나 황제 폐하, 태사 각하께서 전용열차로 오가시던 철도는 이미 있었지. 이 철도는 양국 간 무역 등에도 쓰이는, 절대로 형편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철도네만, 지금 이렇게 확장하고 있는 노선은 성격이 또 다르네.”
이른바 ‘요서’라 불리는 땅.
고대 고구려로부터 지금 고려 제3제국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국토의 중심부이기보다는 변경이었던 역사가 더 길었다.
한족계 국가들과는 물론이고, 몽골의 수도가 칸발리크가 된 이래로도 여긴 국경지대였다.
그러나 다이온 연방이 창설된 지금, 이 땅은 동명과 칸발리크, ‘두 수도 사이에 놓인 땅’이 되었다.
“말하자면 다이온의 ‘수도권’이라고 할 수 있지. 이곳에 새로 들어서는 철도는, 이후 도시들이 자리를 채울 것을 예비해 그 기반을 닦아두는 작업이 될 걸세.”
아무것도 없는 땅에 계획된 도시도 있지만, 보통은 이미 사람이 사는 마을들을 도시로 확장할 계획을 짠다.
마을이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사람이 모여서 살기 적합한 지역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변방 도시들, 점점이 흩어진 마을들에 기차역이 들어선다. 시골 사람들은 갑자기 마을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역이 들어서는 걸 보며 어리둥절해 한다.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지만 뭔가 경사가 난 것 같은 기분에 마을 잔치가 열린다.
한편에서는 먼지구름 일으키며 제국과 제국을 잇는 공사가 진행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왁자지껄한 술판이 벌어진 광경.
종종 잔치판에 있던 사람들이 술을 들고 공사장으로 가 인부들에게 나누어준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즐겁게 받아마시는 인부들.
정겹다면 정겹다고도 할 수 있는 모습이다.
저런 밝은 웃음들이, 그대로 제국의 미래가 된다면 좋을 텐데.
철도장관 임병욱은 그런 견하의 귀에 대고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는다.
“공업, 물류, 금융…… 새로운 수도권이 이 모든 것의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할 걸세. 철도가 확장되면 될수록 칸발리크의 재건 사업도 속도를 내겠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살게 될까? 이천만? 인구 증가가 이대로 계속 이어진다면 살아있을 때 삼천만쯤 볼 수 있지 않을까?”
임병욱은 이 순간만큼은 몽골 합방 계획의 첨병이 아니라, 순수하게 철도인으로서 즐거워했다.
이곳이 화려한 수도권으로 성장할 미래가 그의 머릿속에 펼쳐져 있겠지.
물론 임병욱은 아직 ‘카라코룸 천도 계획’, 즉 화림계획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건 기껏해야 견하와 재연, 그리고 감찰국 내부에서나 오가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견하는 빙 둘러 물어보기로 한다.
“여기 철도망은 새너두로도 이어지나요?”
“그렇다네. 그물처럼 촘촘하게 도시와 도시 사이를 잇지. 해안의 거대한 수도권이 받은 혜택은 내륙으로도 전해져야 하니까.”
내륙으로. 좋은 말이다.
그렇게 내륙으로 점차 파고 들어가, 마침내 카라코룸에 닿아야 한다.
이는 시레문이 가꿔온 사업이기도 하고, 견하가 구상한 미래상이기도 하다.
“카라코룸으로도 이어집니까?”
“물어볼 줄 알았네. 카라코룸은 특별한 도시지. 몽골 내부에 있는 우리 고려의 조차지 같은 곳 아닌가. 법무장관이던 류성일 박사를 특별행정장관으로 보내면서까지 관리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견하는 임병욱의 통찰력이 의외라는 듯 돌아본다.
천도 계획까지 꿰뚫어 보진 못했어도, 카라코룸이 견하에게 있어 중요한 도시라는 사실은 인지한 모양이다.
하긴 그도 장관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남자다. 이 정도 눈치는 있겠지.
“말씀대로입니다. 내전으로 권력 공백이 발생한 내륙 몽골 지역에, 우리 고려의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결정이었으니까요. 다만 아무래도 외떨어진 섬 같은 곳이어서…….”
카라코룸으로 향하는 철도선의 중요성은 더더욱 커진다.
“알고 있네. 그래서 우리 ‘원철’은 세 가지 방향에서 접근하기로 했지. 서북부에서 카라코룸으로 향하는 철도, 칸발리크에서 카라코룸으로 향하는 철도, 이 두 기존 노선의 확장과 보강에 이어……”
동명에서 카라코룸으로 직행하는 철도를 건설한다.
“건설뿐만 아니라 향후 노선 관리까지 원철에서 담당할 걸세. 이게 무슨 말이냐면 여차할 때 우리가 몽골 물류의 적어도 절반을 완전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지.”
그리고 전쟁성만 준비되면 언제든 즉각, 몽골에서의 급변 사태에도 개입할 수 있다.
“어떤가? 위치를 옮겨서…… 한 번 살펴보러 가지 않겠나?”
견하는 임병욱의 권유에 고개를 저었다.
“보러 가긴 할 겁니다만, 그보다 먼저 둘러볼 곳이. 원철에서는 칸발리크 재건 사업에도 손을 대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 그것 말인가.”
임병욱은 씩 웃는다. 숨겨두었던 깜짝 선물을 들킨 것 같은 표정이다.
“동명-카라코룸 간 철도 공사를 먼저 보여준 뒤에 가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주 국장 자네가 칸발리크가 먼저 보고 싶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견하는 마주 미소를 지어주었다.
“장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더욱 칸발리크부터 보고 싶군요.”
칸발리크를 향해 가는 차에 올랐다. 이 근처는 도로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아서 심하게 덜컹거린다. 하지만 언젠가 이곳에도 번듯한 포장도로가 들어서리라.
견하는 그렇게 차 안에서 조금씩 좌우로 흔들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 리안은 김천열을 국내로 소환하고, 류성일을 새로 카라코룸의 행정정관으로 보냈다.
왜 김천열을 불러들였을까?
왜 류성일을 내보냈을까?
이유를 짐작해보자. 어디서부터 짚어나가야 할까.
김천열의 무게, 류성일의 무게를 생각해보자.
둘 다 리안의 친위혁명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김천열은 가장 먼저 병력을 제공한 사람이고, 이후 삼한반도 잔당 토벌전에서도 맹활약했다.
카라코룸 공략전에서의 활약은 말할 것도 없다. 리안이 지도 위에서만 그렸던 기동전을 김천열은 지표면에 실제로 옮겨냈다.
능력의 검증은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은가?
능력이 검증됐다면 이번에는 충성심이다. 의심할 여지가 있는가?
처음 친위혁명에 가담할 때만 해도 자발적이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상황에 말려들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
하지만 그 후로는 충실한 미리안의 군인으로 남았다. 숙군과 그에 따른 쿠데타 시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소장에서 대장으로 빠르게 진급한 것도 그 덕분이다.
그 후로는 몸을 사린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직은 충성심을 재고할 필요는 없겠지.
“……류성일 쪽 문제인가?”
소거법으로 따져보면 그렇다.
김천열은 가까이에 두고, 류성일은 내각에서 쫓아내 카라코룸에 박아둔다.
“대체 왜?”
리안이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으니 알 수 없다.
다만.
“칸발리크 문제 해결에 협력해달라고 했을 때, 이상할 정도로 순순히 협력해줬지.”
비전향 한족 독립운동가와 흉악범들의 제공.
누가 들어도 ‘몰래 죽여도 뒤탈 없는 목숨들’을 달라는 요구였다. 아니, ‘죽이기 위한 목숨들’을 내어달라는 요구에 더 가깝겠군.
대량살인에 공범으로 가담해달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그때 류성일은 견하의 행동에 여러 가지 제약을 걸 수도 있었다.
류성일은 고려 제3제국의 건설과 미리안 정권 수립에 있어 어마어마한 위치를 점한 사람이다.
견하가 아무리 리안의 최측근이라 해도 그 정도 제약은 걸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괜한 트집일지도 모르지.”
상황판단이 빨라서 군소리 없이 견하의 요청에 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때 견하가 느꼈던 일말의 위화감 속에 뭔가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뭔가’가 문제가 되어서 일단 동명에서 내보냈다? 누나는 류성일을 동명에서 내보내고 난 후에 그 발밑을 파헤쳐볼 생각일까?”
견하에겐 알리지 않는 걸 보면 그 문제의 민감한 정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
“효윤이나 배영훈 중령 정도만 알고 있을까.”
그게 리안의 뜻이라면, 일단은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가까운 시일 내에 류성일의 은퇴 소식이라도 나오는 게 아닐까 모르겠다.
뭐 이런 것도 다 견하의 지레짐작이고, 통상적인 인사이동일 수도 있겠지. 리안에게 더 깊은 계획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알아야겠어.”
간섭하지는 않더라도 정보 자체는 손에 넣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