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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99화 (299/541)

다이온(5)

그 이후로도 할 일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다이온 연방을 완전히 하나의 국가로 통합한다 해도, 내전과 반란으로 망가진 국토의 재건, 민족 문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모든 ‘다이온인’들에게 적용될 법제, 그들이 만들어나갈 문화 등은 앞으로 최소한 백 년은 내다보면서 풀어나갈 숙제다.

견하에게 그런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있을까. 루우는 어렴풋이 생각해본다.

하지만 알 수 없다. 루우 자신도 그 정도로 먼 미래까지 내다보고 있지는 않다.

지금은 그저 눈앞에 있는 청년, 아니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이 남자의 모습만을 보고, 뭔가를 읽어내려고만 할 수 있을 뿐.

그러고 보니, 키가 좀 컸나?

어깨도, 날렵한 턱선도 전보다 좀 더 올려다봐야 할 것 같다.

루우는 일어섰다. 견하의 쇄골 근처에 시선을 둔 채로, 묻는다.

시험 삼아.

“너 말이야.”

“응?”

“……타이시랑 잤어?”

견하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다.

“누나가 얘기한 거야?”

루우는 그 물음에는 답하지 않은 채 견하의 얼굴을 본다.

콘스탄티누폴리에 다녀온 뒤, 견하는 요즘 들어 더욱 기민하게 행동하고 있다. 무엇을 보고 배웠을까. 아니면 거기에 더해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닐까.

저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보면 아직 사람다운 감정은 남아 있는 것 같다.

얼마나 오래 남아 있을까.

오래 남아 있으면 좋겠는데.

얼굴을 바싹 들이대 본다.

견하는 물러나지 않는다. 빨개진 얼굴이 좀 더 빨개질 뿐.

아주 잠깐이지만…… 루우는 이대로 밀어 붙여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탐한다, 빼앗는다, 차지한다.

하지만 곧 냉정한 자제력이 루우의 뇌에 돌아왔다. 리안을 생각해서도, 효윤을 생각해서도 그건 못 할 짓이다.

루우는 몸을 일으켰다.

“그 문제는 너랑 타이시가 잘 알아서 하겠지. 다만 내가 카간이 되는 계획에 소홀해지지만 말아줘.”

농담처럼 내뱉고 루우는 싱긋 웃었다.

그 미소에 견하도 오랜만에, 따뜻하게 마주 미소 지었다.

***

전력 집중.

대륙해방군은 얼마나 희생이 나든 전혀 상관없다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공격을 쿠아우테목 방면에 쏟아부었다.

아즈텍 연방 정규군도 당연히 수도의 방비에 심혈을 기울였기에, 쉽사리 수도로 진입하는 길을 뚫지는 못한다.

‘괴물’에 대응할 준비는 되어 있다. 포격과 소각을 통해 최대한 적의 신체를 손상시킨다. 아무리 괴이한 현상을 보더라도 병사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철저한 사전 교육도 이루어졌다.

칸발리크 테러 사태를 염두에 두었기에, 도시 내부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과 물자는 철저한 검역을 거친다.

그렇지만 대륙해방군의 기동은 빨랐다.

미시시피강 하구를 향해 공세를 집중시키다가, 언제 이런 여력을 준비했나 싶을만큼 신속하게 전력을 쿠아우테목에 쏟아붓는다.

연방군도 방어 체제를 수도로 다시 집중시켜야 하건만, 연방군의 물류나 기동은 그렇게 원활하지 못하다.

대륙해방군이 시체를 괴물로 재활용하며 시간을 벌 수 있는 것과 달리, 연방군의 병사들은 한 번 죽으면 끝이다.

게다가 북쪽과 동쪽의 전선도 방어해야 한다. 쉽게 부대를 뺄 수가 없다. 간신히 균형을 맞춰 둔 부대 배치 전략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으니까.

혹은 수도 쿠아우테목을 향한 공세마저 양동이고, 다시금 미시시피강 하구를 공략하려는 것 아니냐는 참모진의 의견도 있었다.

쿠아우테목 공세가 거세다고 해서 부대를 함부로 움직이면 그것이야말로 적의 수작에 놀아나는 것 아니냐고.

연방의 참모본부는 뚜렷한 타개책도, 적절한 대응책도 꺼내지 못했다.

게다가 참모본부에서는 또 다른 일로 발목이 잡혀 있다.

-반란군에 아무개 장군이 가담한 건 아시오?

-그 사람 동부 출신 아니오?

-역시나 배신의 민족이구만.

-아무개 장군은 또 어떻고. 그 사람도…….

-이거 다들 사상 검증이나 민족정체성 검증이라도 해 봐야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군.

-요즘 우리 군의 작전이 자꾸만 새어나간다는 느낌은 나만 받고 있소?

터져 나온 민족 갈등과 사상의 문제. 다른 누구도 아니라 연방 정부에 충성해야 할 군인들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모두의 가슴 속에 의심의 씨앗을 뿌렸다.

또 누군가 배신할지도 모른다.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의 충성심은 뭘로 보장할 것인가. 반란군의 끄나풀로서, 연방군 내에서 배신의 순간이 오기까지 위장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 비협조. 검증. 고함. 다툼. 앙심.

의심의 독은 군을 중독시킨 것으로 모자라 혈관을 타고 흐르듯 자연스레 정부 내부로까지 번져갔다.

연방의 통령 네자우알 테콜로틀은 의심의 시선을 주고받는 정부 요인들을 통합시키지도 못했고, 의혹들을 잠재우지도 못했고, 혹시나 무고한 사람일까봐 의심가는 사람들을 제거하지도 못했다.

고려 내전 초기에 가혹한 조처를 단행했던 미리안과는 다른 행보다.

당연히 국가 기구들이 기능부전에 걸릴 수밖에.

대륙해방군이 적들의 이런 처지를 예측한 건 아니지만, 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조금씩 시험 운용을 하듯 내놓았던 기갑사를, 쿠아우테목 전선 북쪽의 한 지점에 집중시킨다.

얼마 안 되는 전차를 비롯한 기갑 전력도 그 뒤에 집결한다.

완전히 돌파만을 목표로 한 배치.

그간 보병과 괴물의 돌격에만 익숙해진 연방군에게 신선한 선물을 안겨주기로 한 것이다.

새벽과 함께 돌격이 시작된다.

기갑사 전력을 이미 맛본 고려나 몽골이었다면 더 잘 대처할 수 있었겠지만, 아즈텍 연방군에는 아직 그런 대처 능력이 없다.

괴물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이기에, 포격도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무엇보다도 기갑사에 탑승한 자는 이단이다.

순식간에 연방군 참호와 요새로 접근.

연방군을 도륙 내기 시작한다.

일단 이렇게 달라붙은 기갑사를 걷어내려면 같은 기갑사나, 전차 등의 전력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혹은 아군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포격을 집중시키거나.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린 보병이나 괴물의 대응책만 세워뒀을 뿐, 이처럼 기갑사를 대량으로 운용하는 경우를 대비하지는 못했다.

물론 세계대전 이래 통상적인 전차전을 대비한 훈련도 받아오긴 했다. 그러나 기갑사는 전차보다 훨씬 유연하게 움직인다.

그렇기에 아즈텍 연방군 장교들의 결단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을 대륙해방군 기갑사들은 놓치지 않았다.

기갑사라도 몇 겹에 달하는 참호를 완전히 장악할 수는 없다. 그러니 오로지 시간 내에 한 지점을 ‘날카롭게 돌파’하는 것만 집중한다.

육중한 강철의 몸을, 기이한 소리와 열을 내며 움직인다. 얼핏 보면 갑옷을 걸친 거인들 같기도 하다.

기갑사들이 뚫고자 하는 지점에서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운 좋게 살아남은 어떤 군인들이 있다.

그들은 전장에 나타난 그 환상적인 광경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내전이 시작된 이래, 군인들은 상상하지 못했던 기이한 광경을 몇 번이고 보고 있었다.

그렇다. 고려 내전과 몽골 내전이 기갑사, 혁세주의 실험장이었듯이,

아즈텍 내전도 기갑사와 괴물들의 실험장이 된 셈이다.

대륙해방군의 전차가 밀어닥친다.

아즈텍 연방군도 전차로 맞대응하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기갑사가 달려들어, 걸레짝으로 만들어놓는다.

끝내, 전선은 돌파되고 만다.

전선의 후방으로 돌아간 대륙해방군은 그대로 수도 쿠아우테목을 직격할 수 있게 되었다.

연방군은 전선을 물릴 수밖에 없다. 당장 도시의 방어에 들어가야만 하니까.

앞뒤로 둘러싸인 전선 일부가, 이어지는 대륙해방군의 포위 공격으로 소멸한다.

전사하지 않은 대륙해방군 병사들이, 먼저 나갔다 전사한 전우들, 이제는 괴물이 된 그들을 소각했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이제는 ‘약’을 먹지 않은 부대만 전진한다.

오로지 수도만을 향한 공세.

지나친 돌출로 후방이 끊어질 염려가 있었지만, ‘설령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쿠아우테목을 향해 달려드는 공세는 멈추지 않는다.

***

싱거울 정도로 아즈텍 연방군은 쉽게 무너졌다.

항복하는 부대가 속출한다. 원래부터 배신자였는지, 아니면 마음속에 배신할 경우를 생각해두었던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연방은 끝났다’는 걸 느꼈다는 것.

그런 생각이 연방 정부의 종말을 가속화한다.

어딘가에서 하나의 연방이 탄생할 때, 다른 곳에서는 연방이 해체되고 있다.

수도를 지킬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자, 여전히 남아 있던 충성파 군인들은 ‘연방 수뇌부가 탈출해야 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통령의 보좌관들은 곧장 네자우알 테콜로틀의 집무실로 뛰어갔다.

그들의 바쁜 발소리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각하, 피하셔야 합니다”라는 급박한 보고.

그것들이 방아쇠가 되었다.

통령의 집무실에서 들려온 단 한 발의 총성.

모두들 그 소리를 듣자마자 테콜로틀의 운명을 알았지만, 그래도 억지로 문을 부수고 들어간다.

통령이 앉아있던 곳 바로 뒷벽이 피로 흥건했다. 두개골 조각이나 뇌수 같은 건 구별되지 않는다.

아마도 입에 총구를 물고, 당겼겠지.

비명, 울음, 혼란.

누군가는 그 틈을 타 밖으로 나간다. 피난일까 투항일까. 아무도 그를 붙잡고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통령의 시체를 수습하려는 듯 다가갔다가, 피묻은 권총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충성의 맹세인지 사죄의 외침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고는, 관자놀이에 그대로 한 방.

모든 것이 잦아들고, 흐느껴 우는 소리만이 도저히 침묵을 못 견디겠다는 듯 통령궁 바닥에 낮게 깔렸다.

연방제, 공화정, 민주주의의 최후였다.

***

마치 전선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감독하고 있었다는 듯, 최고지도자 쿠에츠팔린을 태운 차가 정신없이 쿠아우테목을 향해 달렸다.

수도로 진입하자마자 하나의 세상이 끝장나기를 바랐던 모든 시민들이, 그를 숭배하는 군인들이 환호로 그를 맞이했다.

통령궁 앞 광장은 깨끗하게 치워졌다. 통령궁 안쪽의 시체들이나 부서진 시설물을 치우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기에, 쿠에츠팔린은 아직 통령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연설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 행동 자체가 마치 ‘쉬지도 않고 사태 수습에 매진하는 최고지도자’를 연출해냈다.

물론 도시를 대륙해방군이 완전히 장악한 후에 들어온 것이긴 하다. 그러나 저격의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는 지금, 광장에서 연설한다는 건 쿠에츠팔린의 담력이 보통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눈치 빠른 부하들이 그럴싸한 광경을 준비한다.

도열한 전차.

도열한 화포.

도열한 기갑사.

그 앞에 당당히 선 쿠에츠팔린을, 카메라가 정신없이 찍어댄다. 사진과 영상은 아즈텍 대륙 사방에, 전 세계에 뿌려질 것이다. 그의 쿠아우테목 입성과 승리를 선전할 것이다.

“아직 내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부패한 연방 정부의 잔당, 동쪽의 자유주 독립군, 북쪽의 대륙혁명전선이라 자처하는 폭도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유럽 열강은 우리의 진정한 ‘해방’을 두려워하며 군대를 보낼지도 모릅니다. 그들과 싸워서 진정한 대륙 해방을 쟁취합시다.”

한결 낮고, 깊게 울리는 목소리로 쿠에츠팔린은 말을 나열한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멕시카 자주국’의 성립을 선포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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