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온(4)
“나한테 끈질기게 달려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게.”
각자의 다음 용무를 향해 걷고만 있는 담담한 얼굴들. 그러나 그들은 그 얼굴로 허공에 말을 실어 서로의 귀에 보낸다.
“아까 바이다르 전하를 ‘낭키아스의 칸’으로 봉하는 방안에 대해 말씀드렸었죠.”
“그랬지. 바이다르를 키워서 형님의 세력을 꺾는다, 고.”
“그건 장기적인 계획이고, 그 전에 기회를 만들 수 있다면 시도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아까 칸께서도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직 어린 바이다르 전하는 카간 폐하의 영향권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바꿔 말해서, 바이다르 전하와 카간 폐하 사이의 연결이 튼튼하다는 말이기도 하죠.”
“두 사람의 연결이 튼튼하다는 게, 뭔가 문제가 되기라도 하나?”
“……바이다르 전하를 흔들면 그만큼 카간께서도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울제이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걸음도, 시선도.
거의 완벽한 자기통제다.
견하도 울제이가 대답하건 말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미 낭키아스 조정과 칸발리크 조정 사이의 틈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낭키아스에 남아 여전히 ‘칸의 궁정’을 지키는 자들과, 칸발리크에서 ‘카간의 궁정’에 흡수된 자들 사이엔…… 예전엔 동료였을지 몰라도 조금씩 이해관계에 충돌이 생기기 마련이죠.”
“바이다르를 낭키아스의 칸으로 임명하면, 그런 틈에 쐐기를 박는 꼴이 되겠군.”
만약 게레센제가 낭키아스를 완전히 몽골 본토로 편입시켜, 균일한 행정구역으로 재편한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물론 그러기엔 낭키아스 내 민족 문제 같은 것들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무엇보다도 몽골 본토와 낭키아스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 그 두 영토 사이엔,
“칸의 키타이가 있죠.”
“바이다르를 낭키아스 칸으로 세우고 나면 어떻게 해야겠나?”
“칸발리크와 벌어진 ‘낭키아스의 신료들’에게 칸께서 접촉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개봉에서 응천으로…… 쿠데타라도 사주하라는 건가?”
“그 과정에서 바이다르 전하의 신변을 칸께서 확보하신다면…… 더욱 좋겠죠. 키타이와 낭키아스를 통합한 한족 영토를 수중에 넣으면 카간이라도 칸을 위협하진 못할 것입니다.”
카간 자리까지 가지 못하더라도, 그 세력만큼은 무시할 수 없지 않겠는가.
견하는 그런 계획을 제안하고 있었다.
“너무 나만 위해주는 것 아닌가.”
“글쎄요. 저도 그저 우리 폐하를 위해 기회를 만들고 싶을 뿐이라서.”
“어쨌든 판을 흔들면 나에게도 루우 테무르에게도 공평하게 기회는 생긴다는 건가……. 나와 루우 테무르 중 누가 이겨서 카간이 될지는 그다음 문제고.”
“고려의 황제께서 카간을 겸하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칸께서는 조카를 섬기시게 되겠지만, 그 조카는 ‘제후 중 으뜸’인 칸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겠죠.”
한참 대답이 없다.
견하도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시간도 없으니까.
두 사람이 갈라져야 할 길이 다가온다. 울제이는 자신의 참모들과 추가 논의를 해야 할 테고, 견하는 루우에게 돌아가 보고를 올려야 한다.
“아까 나눴던 이야기까지 포함해서, 생각은 해보지. 쿠릴타이에서 보세.”
그렇게 말을 던지고 몸을 돌린 울제이의 등에, 견하는 예를 표했다.
***
“바이다르 황자는 아직 어리긴 하나, 나라 하나를 맡아 다스릴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이에 참관국 고려의 국가 원수이자 다이온과 카간의 보호자로서, 그리고 황실의 일원으로서 제안하는 바, 바이다르 황자를 낭키아스의 칸으로 봉하셨으면 합니다.”
루우가 그렇게 권유하면, 황실 내에서 서열 높은 사람의 말이니만큼 게레센제도 진지하게 듣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여기에 울제이마저 말을 보탠다.
“신의 의견도 같습니다. 바이다르에게 그만한 지위를 내려주시어 위엄을 세우게 하시고, 경륜을 쌓아 바깥에서 황실을 보호하는 신하가 되게 하소서.”
게레센제의 시선이 아들, 바이다르를 향한다.
바이다르도 무슨 생각인지 이 의견에 찬동하는 것 같다.
아직 어리기만 한 바이다르가 낭키아스 영지에 무슨 야심을 품었을 리는 없고, 아마 주변에서 그렇게 하도록 떠민 거겠지.
루우 테무르와 고려가 이 문제에 가장 앞장섰을 것은 뻔했다. 그녀가 바이다르와 접촉한 것도 확인됐고.
저들의 노림수도 대충은 짐작이 된다. 카간인 자신에게서 어떻게든 낭키아스를 떼어내려는 거겠지.
침묵하고 있는 볼로드도 이 일에 개입했다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신경을 곤두세워두자.
울제이는 말할 것도 없고.
낭키아스에 남은 자신의 부하들도 이 문제에 찬성표를 던졌을 가능성이 높다.
게레센제는 서글픈 눈으로 바이다르를 바라보았다.
내전과 국가 재건뿐만 아니라, 게레센제를 지지하여 카간의 자리에 올리는 데에도 볼로드와 루우 테무르가 깊게 관여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루우 테무르의 의도가 훤히 보인다 해도 그 뜻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게레센제 자신이, 이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의견을 따랐을 때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을 계산하고 있었다.
낭키아스, 응천의 궁궐에 바이다르를 두면 하나의 ‘보험’이 된다.
만에 하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 시, 몽골 카간 자리는 빼앗기더라도 낭키아스라는 유산은 확실하게 바이다르에게 물려줄 수 있지 않은가.
낭키아스에 남겨둔 인적, 물적 자원은 상당하다. 바이다르가 독립된 칸으로서 자리 잡는 데에는 충분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저들이 노리는 대로 낭키아스 칸이 된 바이다르가 아버지인 자신을 견제할 경우.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다.
바이다르는 아직 야심이고 뭐고 없는 어린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낭키아스 칸이 되어, 울제이의 말대로 경륜을 쌓고, 장차 아버지의 카간 자리를 넘본다면 환영할만한 일이다.
바이다르가 야망도 없이 주변에 휘둘리는 게 더 큰 비극이니까.
바이다르가 카간이 되고자 한다면, 아버지인 자신은 세력 투쟁의 장에서 적당히 울제이를 치워버리고 바이다르에게 양위한다는 깔끔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루우 테무르에게 카간 자리가 가더라도 결국은 칭기스 카간, 쿠빌라이 카간의 혈통이 계승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게레센제는, 자신의 혈통에게 카간 자리를 계승시키고 싶었다.
게레센제 자신의 황조(皇朝).
자신의 혈통이 후계자로서 자리를 확고히 하고, 그렇게 카간 자리가 게레센제의 후손들에게 계승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는 것만으로도, 게레센제의 황권은 강화된다.
바이다르뿐만 아니라 그 이후 카간들의 정통성도 강화된다. 군주의 정통성은 곧 권위와 권력의 확대, 안정화로 연결된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보면 단순히 게레젠제가 자신의 혈통에 집착한다고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결국 모두의 손익 계산이 맞물려, 게레센제는 바이다르를 낭키아스의 칸으로 봉하자는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계획대로 돌아가니까 만족해?”
루우는 팔짱을 낀 채 그렇게 물었다.
견하는 고개를 저었다.
“만족했다고 말하기엔 이르지. 계획대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밑 작업’이 간신히 끝났을 뿐이야.”
작년에 칸발리크에 왔을 때 받았던 방. 견하와 루우는 그 방에 머물고 있다.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나눠야 하기에 견하는 루우의 침실로 들어와 곁에 앉았다.
누군가 이런 모습을 목격하고 수군댈 일은 애초에 없겠지만, 수군댄다 해도 지금 나눌 이야기는 훨씬 중요한 것이니까.
“밑 작업…….”
루우가 견하의 말을 그대로 받아 되뇐다.
“밑 작업 이후에는 뭘 할 생각이야? 정말로 바이다르가 응천에 들어가면, 응천 정권에 울제이 숙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게끔 유도할 셈이야?”
“아니. 그렇게 되기 전에 막을 거야.”
“막는다면 어떻게?”
“볼로드는 대충 짐작하고 있겠지. 짐작하지 못했어도 너를 몽골-고려 동군연합의 군주로 세울 생각이니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면 입 다물고 있을 거야.”
루우는 견하의 말을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울제이, 바이다르, 볼로드, 이 세 사람 말고 아직 접촉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 더 남아 있어. 바로 게레센제 카간이지.”
“게레센제 숙부를 활용한다?”
“울제이는 우리가 ‘키타이 파견군’을 통해 자신을 지켜주리라 생각한 것 같지만, 우리는 여차하면 게레센제 카간에게 정보를 흘려서 울제이를 막아서게 할 거야. 울제이는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제거되는 거지.”
“좋아. 그러면 울제이의 제거와 함께 키타이도 해체되겠네. 그러고 나면? 게레센제, 바이다르 부자가 나란히 국토를 양분하고 안정적인 후계구도를 준비하게 둘 생각은 아니겠지.”
“물론 아니야. 우리는 게레센제 카간이 울제이 칸을 제압하는 동안 ‘바이다르를 확보한다’.”
루우는 견하의 얼굴을 보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울제이 숙부는 우리가 움직일 기회를 주는 꼴이네.”
“다들 울제이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낭키아스 파견군을 움직이는 거지. 명분도 있어. 울제이의 쿠데타 시도로부터 바이다르 칸을 보호한다, 는 식으로.”
“그럼 우리는 확보한 바이다르를 통해 게레센제 숙부를 압박하는 건가?”
“다방면에서 압박이 들어가겠지. 고려 본토에서도 직접 압박할 테고, 카라코룸처럼 우리가 직접 관리하는 대도시에서도 압박하는 거야. 키타이와 낭키아스 파견군은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리고 칸발리크 내부에서도 압박은 시작될 것이다. 볼로드도, 몽골 내 제국입헌당도, 게레센제에게 선양을 요구하겠지.
칸발리크 테러 당시 루우의 활약을 보고 들었던 모든 시민들도 루우 지지를 선언할 테고.
결국 게레센제가 그 요구에 굴복하면, 루우 테무르, 고려의 황제 왕서라가 몽골과 고려를 통합한 새로운 제국의 원수가 된다.
단 한 번의 격동.
게레센제와 울제이와 바이다르를 모두 물러나게 하고, 루우 테무르만이 통합된 다이온의 유일한 군주로 우뚝 서는 것이다.
“……라는 계획이지만 여기까지는 누나에겐 알리지 않을 거야.”
“태사에게 들어갈 보고는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 고려가 각기 군주를 옹립하고 대등하게 교류하는 연방체제가 되었다…… 까지겠군.”
“누나는 고집이 세니까. 상황이 불가피해지지 않는 이상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겠지.”
카라코룸 공략전에 개입할 때도 그랬다. 태사의 권위로 밀어붙이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되는 상황이 와서야 몽골로 들어왔다.
“모든 게 잘 되어서 네가 다이온의 유일 군주가 된다 해도 해결해야 할 일들은 많아.”
“그래. 견하 네가 원하는 건 태사를 다이온의 ‘유일한 태사’로 만드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