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온(3)
쿠릴타이는 다이온의 부활을 선포한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이온은 그 이름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연방이 그 구성국들에게 얼마만큼 구속력을 지닐 것인가, 그에 관한 논의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논의에 따른 세부 사항에 관한 조율도 계속된다.
보통 그런 조율은 물밑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몽골의 타이시 볼로드도 물밑 조율을 모색한다.
그의 권력은 여전히 강대했지만, 위로는 카간인 게레센제에게 눌리고, 남은 것은 울제이 칸과 나눌 수밖에 없었다.
울제이를 달래기 위해 내무장관과 전쟁장관을 겸직한다는 막대한 권력을.
울제이는 지금 한편으로는 각료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후왕으로서 칸발리크의 안팎으로 영향력을 뻗는 중이었다.
그와 그의 측근들을 제외하면 울제이의 계획이 어디를 향하고 있고, 어디까지 왔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볼로드는 밀담에 울제이를 참여시킬 수밖에 없었다.
울제이도 나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사안임을 알기에, 홀로 볼로드의 집무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자는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볼로드를 상석에 앉혀두고, 아주 공손한 자세로 옆에 앉은 청년.
주견하를 보자마자 울제이는 그 정체를 알아차렸고,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볼로드는 별것 아니라는 듯 두 손바닥을 울제이 쪽으로 내민다.
“필요한 논의를 이어나가는 데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칸. 앉으시죠.”
울제이는 일단 앉는다. 그러나 시선은 견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안다, 책사.”
견하는 슬며시 짓는 미소와 함께 그 말에 답했다.
“저처럼 아무것도 아닌 자를 칸께서 알아주신다니 황공합니다.”
“진심도 아닌 황공 운운하지 마라. 모든 일이 네 뜻대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에 취해 있나?”
볼로드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 되었지만, 견하는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칸께서 왜 저에게 이토록 노여움을 품으셨는지 알기 어렵군요.”
“첫째는 네가 고려 태사의 최측근이기 때문이지. 네가 고려 태사의 중요한 결정에 이것저것 의견을 덧붙인다고 들었다. 고려 태사가 나의 카라코룸 입성을 가로막은 것도, 얼마만큼은 네 생각도 들어 있겠지.”
“거짓을 고할 수는 없겠군요.”
울제이는 리안에게 ‘너’라고 불렸던 굴욕을 기억하는 듯하다.
감히 왕작으로 태사에게 덤비느냐는 그녀의 말에, 그 위세에 조금이지만 밀렸던 굴욕.
그는 견하에게 리안의 모습을 겹쳐보고 있었다.
“둘째. 나는 네가 형님을 모시고 칸발리크에 들어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까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니라 형님이 카간이 되시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을 건 뻔하지.”
“……칸께서는 듣는 귀를 조금 조심하시는 게 어떨지.”
울제이는 코웃음 친다. 호통을 칠 뻔했지만 그 코웃음으로 간신히 열기를 뽑아낸 듯하다.
“네놈이 걱정해줄 정도로 이 울제이의 위세가 우스워지지는 않았다. 보르지긴 가문의 사내라면 당연히 품는 열망을 감출 정도로 졸렬해지지도 않았지.”
울제이는 볼로드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세 번째 이유는, 칸과 타이시가 의논하는 자리에 장관급도 아닌 자가 들어와 대등한 대화를 나눈다는 건 전혀 격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격, 이라. 이런 종류의 대화가 격을 따질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이 한 말을 얼마만큼 보증할 수 있는지 미지수인 자를 데리고 이런 대화를 하는 것도 웃긴 일입니다.”
울제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장 견하는 말을 꺼냈다.
“보증을 드릴 수 있을지는……”
“너는 감히 칸의 말을 끊는가!”
“고려 황제 폐하와 태사 각하의 말을 전하는 자를 이리 대하신다면 저 또한 키타이에 상상 이상의 굴욕을 준비할 뿐입니다!”
호통에는 호통으로.
벽력처럼 몰아친 울제이의 호통에, 견하는 곧바로 거센 파도 같은 호통으로 맞선다.
그리고 파도는 수면 아래에 더 은밀하고 위험한 물살을 감추고 있다.
“협박하는 건가?”
견하를 입 다물게 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울제이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져 이렇게 물었다.
“협박을 실행에 옮기리라는 보증은 확실히 드리도록 하죠.”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 여우 같구나.”
“그리고 제 호랑이는 실존하는 호랑이입니다. 이빨도 발톱도 적을 찢어발기기에 충분히 날카롭죠.”
울제이는 다시 코웃음을 친다.
“그 말이 허세가 아니라 정말로 자네 나라에 대한 충의이길 바라지.”
볼로드는 이 잠깐의 신경전이 피곤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이제야 간신히 생산적인 대화를 해볼 수 있겠군요.”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나눌 의논은, 일단은 아주 추상적인 개념 문제부터 시작한다.
“다이온 연방은 몽골의 확장으로 봐야겠습니까, 아니면 몽골이 다이온을 구성하는 나라들 중 하나인 것으로 봐야겠습니까.”
말장난 같지만 중요한 문제다.
“카간의 직할령인 몽골이 다이온의 ‘구성국 중 하나’라면, 카간의 권력은 몽골 본토로 제한됩니다.”
“아니, 타이시, 형님은 낭키아스도 갖고 계시오.”
“아, 그 문제에 관해선…… 우리 황제 폐하가 바이다르 황자를 낭키아스의 칸으로 올리라고 카간께 권하는 중입니다.”
“고려의 황제께서?”
울제이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도 고려의 의도를 재보려 한다.
“바이다르 황자가 낭키아스의 칸이 되면, 낭키아스의 독립성도 어느 정도는 보장받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바이다르는 아직 어리고, 무엇보다도 형님의 아들이지. 카간의 영향력을 벗어나긴 힘들 텐데.”
“올해 생일이 지나시면 황자는 열세 살이 되시죠. 그리고 거기서도 몇 년 안 있으면 우리 폐하께서 즉위하신 나이가 됩니다.”
그때쯤 되면 슬슬 바이다르 황자께도 ‘독립심’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라고 견하는 묻는다.
“형제끼리도 공유하기 어려운 것이 권력. 부자간에도, 공유하긴 어렵겠죠.”
“그러니까, 자네 말은 그건가. 바이다르를 키워서 형님에게서 낭키아스를 떼어내고, 형님의 권력을 견제하게끔 한다?”
“물론 그때는 바이다르 ‘칸’이 키타이의 칸이나 우리 폐하와 경쟁하려 들 위험도 있습니다만……”
견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감출 듯 말 듯한 미소를 짓는다.
“일단은 현 카간을 ‘치워버려야’, 다음 카간이 누가 될지를 두고 싸울 수 있겠죠.”
맞는 말이다. 게레센제가 카간위를 잡고 있는 상태에선 울제이가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신하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다.
일단은 게레센제가 카간 자리를 놓게 해야 한다.
그 뒤에는 바이다르나 루우 테무르 같은 경쟁자들과의 힘겨운 싸움이 또 기다리고 있겠지만, 싸움의 무대부터 만들지 않으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울제이는 볼로드의 눈치를 살핀다.
볼로드는 별다른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은 채, 시선을 아주 약간 내리깔고 있다.
볼로드는 아직도 루우 테무르를 지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만약 자신이 키타이까지 통합한 다이온의 군주가 된다면 볼로드의 계획도 더 진행되기는 어려울 터.
안정을 중시하는 볼로드의 성격상 깔끔하게 승복할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는 협력하는 수밖에 없군. 하지만 의문이 하나 남는데.”
울제이는 다시 견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본다. 견하도 전혀 눈을 돌리지 않고 마주 바라본다.
“자네는 고려 태사의 사람이지. 고려 태사는 다이온을 ‘느슨한 연방’으로 두려는 사람이고. 하지만 자네나 고려 황제의 계획대로라면……”
“다이온은 몽골 제국이 그대로 확장한, 하나의 균일한 국가가 되지 않는가, 그것은 태사의 뜻에 반하지 않는가, 물으시는 겁니까?”
“그렇네.”
“답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일단 이 문제에 대해선, ‘황제 폐하의 뜻을 따른다’고 해두죠.”
울제이는 견하의 말을 굳이 걸고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도 않았다.
볼로드가 시선을 들어 올린다.
“자, 대략적인 방향은 정해진 것 같으니, 이제 ‘다이온 연방 설립 이후’를 이야기해보죠.”
다이온 연방이 세워지고 나서 바로 해결해야 할 ‘첫 문제’.
“한족 반란 문제가 바로 그렇지.”
“키타이군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견하의 물음에, 울제이는 대답해줘도 상관없겠다 싶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는다.
“일단 주요 전장은 관중 지방으로 넘어갔네. 키타이 내에도 산발적인 교전은 있지만 제압하는 중이고.”
“관중 지방으로 넘어갔다면, 탕구트군의 협력을 얻고 계십니까?”
“그렇지.”
“탕구트군은…… 아군으로 삼기에 적합한 군대인지요?”
상당히 빙 돌린 질문이다.
탕구트군과의 협력은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관중 지방의 한족 반란 진압은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키타이군의 작전 수행 능력을 대놓고 들먹일 수는 없기에, 이렇게 물어본 것이다.
울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적합하진 않네. 내전 때도 느꼈네만 탕구트 정부가 문제의 심각성은 인식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고.”
한사코 몽골군의 진입을 반대하다, 국내가 한족 문제로 뒤집히자 그제야 손을 벌린 나라다.
당연히 이 문제에 제대로 된 대비가 되어 있을 리 없다.
대비가 없으니 작전도 엉망.
현지 군대의 협력을 받아야 할 키타이군의 발목도 잡는다.
견하는 이번엔 한결 조심스러운 어조로 제안했다.
“지금 고려령 산동, 즉 발해도 일대에는 ‘키타이 파견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고려의 협력을 받아보시는 건.”
“필연적으로 다이온 내 고려의 영향력 증대로 이어지겠군.”
“그렇긴 합니다만, 일단 칸발리크에서 본격적인 투쟁을 시작하려면 다이온에서 일어나는 기타 잡다한 일들부터 정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투쟁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 조성입니다, 라고 견하는 덧붙였다.
“고려에서 보낸 ‘낭키아스 파견군’의 상황은 어떤가?”
“얼마 전까지도 성과가 좋지 않았습니다만, 지금은 일본이 아즈텍 문제로 시선을 돌린지라, 덕분에 ‘관전무관’들도 물릴 수 있었죠.”
“보다 자유로운 작전이 가능해졌다는 말이군.”
“예. 기갑사도 꺼낼 수 있고요.”
울제이는 턱을 쓰다듬는다.
무골 같은 덩치만 봐선 떠올리기 힘들지만, 이 남자의 생각은 꽤 멀리, 깊숙한 곳까지 닿는다.
“좋아. 생각해보도록 하지.”
***
견하가 다소 무리를 해 가며 볼로드와 접견한 것은, 또 다른 노림수가 있어서였다.
물론 볼로드와 만나서 나눈 이야기들이 전부 소용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견하가 노리는 것보다 중요하진 않다.
볼로드는 언젠가 ‘도려낼 자’니까.
견하는 ‘울제이와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