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온(2)
소년 바이다르는 꿈꾸는 듯한 기분으로, 아버지 게레센제의 ‘다이온 연방’ 창설 선포를 바라보았다.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 열두 살.
정치나 권력, 그 역사적 맥락 등의 문제를 이해하기엔 어린 나이다.
그러나 그도 황금 가문 보르지긴의 일원이었기에 오늘 일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다.
그 또래 아이들보다 높은 역사 지식과 교양을 요구받았으므로, ‘다이온’이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일본과 고려, 남쪽으로는 모든 한족의 땅, 서쪽으로는 페르시아와 루스에 이르기까지 지배했던 그 이름.
다이온 예케 몽골 울루스.
오늘은 그 영광이 회복되는 날.
아버지가 영광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었지만, 바이다르는 멍한 기분으로 다른 사람들을 따라 박수를 쳤다.
별로 기쁘지 않았다.
기분이 나빴는가 하면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아무리 눈을 깜박여 보아도, 눈앞의 일들이 현실처럼 생각되지 않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처음 카간으로 즉위하는 모습을 볼 때도 그랬다.
-아버지가 카간이?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아버지 카간께서 다이온 연방의 성립을 선포하신다고?
역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자신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바이다르에게도 주변에서 들리는 말을 담을 두 귀가 있다.
그런 말들을 이해할 머리도 있다.
-아마…… 바이다르 황자가 태자가 되기는 힘들 거예요.
-무슨 말씀이세요? 바이다르 황자는 카간 폐하의 유일한 아들이시잖아요?
-고려의 황제 폐하도 선대 시레문 카간 폐하의 유일한 따님이시죠.
태어났을 때부터 칸의 자식이기에 왕자라 불렸다.
아버지가 카간이 되고 나서는 격을 한 단계 높여 황자라 불리기 시작했다.
‘태자’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들리는 말을 종합해보면 ‘다음 카간이 될 사람’이라는 뜻인 듯했다.
그러니까, 바이다르는 자신이 아버지의 후계자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매일 그런 이야기만 들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자주 들려온다.
-하지만 고려의 황제 폐하는 여자의 몸인데, 바이다르 전하를 제치고 다음 카간이 되신다는 건…….
-그렇죠. 게다가 황통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그게 안 된다면 형에게서 동생으로 이어지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법인데.
-고려 황제께선 본인의 영지와 막강한 군사력을 지녔다는 걸 잊어선 안 돼요. 만약 바이다르 전하를 태자로 세우려는 논의라도 일어난다면…….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은 거기서 잠시 잦아들었다.
자신을 태자로 세우려 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바이다르는 덜컥 겁이 났다.
어린 소년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무서운 일’이 일어나리라는 느낌 정도는 받는다.
-……그건, 내정간섭 아닌가요.
-계승은 나라와 나라 간의 일이 아니라 황실 내부의 문제니까요.
-그렇다면 고려 황제 폐하께서도 고려의 힘이 아니라 보르지긴의 일원으로서 칸발리크로 직접 들어오셔야…….
다시 말이 끊긴다. 누군가 주의를 주는 것 같다.
-황실의 세력 구도는 언제 어떤 식으로 변할지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 목숨들 보전하고 싶으면 말을 아껴야 해요.
-옛날도 아니고, 목숨까지야 걸겠어요? 다 앞으로의 출세길이 막힐까 벌벌 떠는 거지.
누군가 그렇게 비아냥거리는 투로 대답한다.
-어허. 우리 앞길만 걸린 게 아니에요. 바이다르 전하의 미래를 위해서도 하는 말입니다.
-전하 핑계는……
-이게 정말 핑계라고만 생각하세요?
-핑계가 아니면요?
-저렇게 생각이 짧아서야……. 바이다르 전하가 방해가 되리라 판단되면, 고려 황제께서 가만히 계시겠어요?
-바이다르 전하의 신변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전하께서 언젠가 태자가, 카간이 되시는 길을 무사히 걷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혹은 그렇지 못하셔도 고려 황제께서 바이다르 전하를 내치지 않으시도록…….
누군가 훌쩍인다.
-바이다르 전하가 불쌍해요.
-그게 황금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난 자의 숙명이지요. 어떤 식으로든 무거운 짐을 질 수밖에 없는 것…….
선대 시레문 카간.
청년기를 세계대전과 함께 보내야 했다.
바이다르의 아버지인 게레센제 카간, 숙부 울제이 칸, 사촌 누나 루우 테무르 황제.
그들은 시레문이 죽자마자 카간 자리를 둘러싼 다툼을 시작했다.
간신히 타협으로 마무리된 게 얼마 전의 일이었다.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싸워야 하는 걸까.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다. 카간 자리를 두고 분투하는 자신의 모습이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
바이다르가 다음 카간 자리를 두고 다툰다면, 아마 그 상대는 숙부인 울제이 칸, 사촌 누나인 루우 테무르겠지.
회상에서 깨어나 그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옮긴다.
울제이는 무표정하다. 그는 칸의 위엄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무표정을 유지한 채 똑바로 게레센제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기에 감정을 읽어내기 어렵다. 여전히 카간 자리를 향한 열망을 품고 있는지, 체념하고 전적으로 충성을 바치기로 한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 다이온 체제 속 자신의 이권 확대를 계산하고 있는지.
바이다르는 이번엔 울제이보다 조금 더 멀리 떨어진 곳, 루우 테무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사촌 누나는 아버지의 카간 즉위 때도 봤지만, 그때는 바이다르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어렸을 적 칸발리크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때 누나는 지금과는 달랐던 것 같다.
아직 시레문도 살아있고, 사촌 누나는 몽골의 공주님이고 자신은 낭키아스의 왕자님이던 시절.
대화는 많이 나누지 않았지만, 어른들의 지루한 이야기를 피해 구석으로 온 바이다르 곁에, 누나가 조용히 앉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줬던 것 같기도 한데.
눈이 마주쳤다.
금빛 눈동자를 보고 바이다르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살의도 미움도 적개심도 없는, 그저 던질 뿐인 시선이었지만.
바이다르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단의 시선이어서일까?
아니다, 그런 건 아닐 거다.
아버지의 이단 부하들은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들을 봤을 때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바이다르는 아직 어려서 몰랐지만, 루우의 저 눈은 ‘피를 본 사람의 눈’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볼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눈’이기도 하다.
만약 언젠가 바이다르가 성장해 대항해온다면, 루우 테무르도 바이다르를 죽일 각오로 응전할 것이다.
그런 각오가 선 사람의 눈앞에서, 바이다르는 떨 수밖에 없었다.
감히 태자가, 다음 카간이 되겠다는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랬기에 바이다르는 서둘러 눈을 돌려버렸다.
그래서 그는 루우의 뒤에 앉은 청년이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
“폐하.”
“바이다르 황자.”
대략적인 절차가 끝나고, 쿠릴타이는 만찬으로 옮아간다.
바이다르는 루우를 피해 동선을 잡고 싶었지만, 루우 테무르 쪽에서 바이다르와 딱 마주치는 동선을 잡았다. 아까 눈이 마주친 탓일까.
황실의 어른을 맞이하는 예의로 바이다르는 루우에게 경의를 보인다. 루우도 점잖게 받아주었다.
“만찬까진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까,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바이다르 측 수행원들은 당황했다. 게레센제는 카간이 되었지만 바이다르는 다소 어정쩡한 위치에 남아 있었다. 이 때문에 ‘바이다르의 판단’에 따른 일처리가 필요할 땐 무척 난감해지곤 했다.
작은 체구의 소년은 열심히 고민한다.
고려 황제의 물음에 답하기까지 주어진 시간은 짧다. 그 사실이 소년을 압박한다.
관자놀이가 순식간에 땀으로 촉촉해진다.
바이다르는 슬쩍 수행원들의 눈치를 살핀 후, 대답했다.
“폐하와 말씀을 나눌 기회를 얻어 영광입니다.”
두 사람의 최측근만 바짝 붙어 따라온다. 물론 이 최측근에는 당연히 주견하도 포함되어 있다. 나머지 수행원들은 조금 거리를 두고 따라온다.
고려 황제와 몽골 황자가 도착한 곳은 쿠릴타이 의사당 건물에 마련된 수많은 응접실 중 하나였다.
옛 시대의 쿠릴타이였다면 서로의 게르로 초대해 대화를 나눴겠지만, 이제는 다른 나라들에서도 볼 수 있는 의사당에서 정치가 이루어진다.
유목민의 후예들은 이제 정장을 입는다.
격식 차릴 공식적인 자리는 아니었기에 루우와 바이다르는 편하게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대화가 시작된다.
“이제 게레센제 숙부는 다이온의 카간이 되셨지. 울제이 숙부는 키타이의 칸이시고 나는 고려의 황제야. 우리 가문이 이처럼 각자의 영지를 갖고 있는데…… 바이다르 너에겐 아직 영지가 없는 게 마음에 걸려서.”
바이다르에겐 아직 루우의 발언에서 의도를 읽어낼 능력이 없다. 그저 어렴풋한 분위기만을 짐작할 뿐이다.
황자의 측근들도 고려 황제의 바로 앞에서 끼어들 수는 없기에, 일단은 바이다르가 잘 대처하기만을 바라고 있다.
게레센제에게 보고하고 바이다르에게 조언하는 건 이 만남이 끝난 뒤의 일이 될 것이다.
“저에게…… 영지가요?”
“그래.”
“하, 하지만 저는 아직 누나나 울제이 숙부에 비하면 어리고…….”
“나이는 문제가 아니야. 중요한 건 황실 구성원의 격에 맞는 지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거지.”
바이다르의 측근들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전하께 어울리는 지위는 바로 다이온의 태자입니다!’라는 말을 삼켜야만 했다.
도저히 그런 말을 뱉을 분위기도 아니었고, 고려 황제 앞에서 그런 불손을 저지를 수도 없었지만, 그보다도……
루우의 뒤에 서 있는 저 청년의 눈길이, 무척 서늘했기에.
말없이 자신들을 응시하는 청년을 보면서 바이다르의 측근들은 직감했다. 지금 루우가 내놓는 말들은 모두 저 청년이 뒤에서 꾸민 일일 것이라고.
그들이 견하를 보며 어떤 기분을 느끼건 상관없이, 루우는 자신의 말을 이어나간다.
“게레센제 숙부께서 카간의 자리에 오르시기 전에는 낭키아스의 칸이셨지. 지금은 낭키아스의 칸이시면서 동시에 몽골의 카간…….”
루우는 참으로 걱정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잠깐 틈을 둔다.
“다이온이 연방으로 재탄생한 지금도 낭키아스의 지위는 문제가 되고 있어.”
루우는 손을 뻗어, 사촌 동생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녀는 이번엔 무표정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웃음 짓는 듯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이다르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다.
“어때? 네가 낭키아스의 칸이 되면, 낭키아스 문제도, 바이다르 너의 격에 맞는 영지 문제도 해결되리라 생각하는데.”
“네…… 그, 아, 아버지 카간께 말씀드려 볼게요.”
“그래. 보르지긴 가문의 사내답구나.”
두 사람의 대화는 간단하게 끝났다.
이후 만찬 자리에서 두 사촌은 아까보다 훨씬 가벼운 느낌으로 담소를 나눴다.
바이다르는 사촌 누나에게 조금은 친밀감을 느끼는 듯했지만, 루우의 부드러운 어조가 연기인지 아닌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