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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95화 (295/541)

다이온(1)

봄이 가고 여름이 슬슬 사람들의 피부에 들러붙을 무렵에, 게레센제 카간은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낭키아스 쪽에서는 한족 반란군 토벌에 기갑사가 투입되면서, 서서히 전선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런 좋은 소식이 칸발리크에 전해지자, 마침내 게레센제 카간과 칸발리크 정부는 ‘다이온’을 선포할 순간이 왔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도 이제 보르지긴 황실의 어르신이니까, 다녀와야지. 정식으로 초청도 들어왔고.”

루우의 그런 말과 함께 황궁은 분주해졌다.

중세, 고려의 군주가 왕으로 격하되었던 시절. 고려왕이 몽골 카간의 사위가 되었던 그 시절부터 고려는 몽골의 의전 서열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었다.

루우는 선대 카간의 딸이기도 하니까 그보다 위상이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쿠릴타이의 소집 목적, ‘다이온 연방’의 선포는 루우가 추진해 온 일생일대의 사업.

반드시 눈으로 그 진행을 확인해야만 한다.

“견하를 데리고 다녀와. 칸발리크에서 볼로드나 ‘몽골 제국입헌당’ 사람들과 의견을 조율하는 데 도움은 될 거야.”

그 외에도 시간이 된다면 카라코룸 문제까지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철도성에서 진행하는 몽골 인프라 재건 사업도 좀 살펴봐야 하고.

리안의 눈길이 견하를 스친다.

그 어떤 손짓 한 번, 미소 한번, 달콤한 말 한마디 없었지만 눈빛만으로도 견하는 가슴 속에 뭔가 따뜻한 게 차오르는 걸 느낀다.

신뢰, 애틋함 같은 것들.

그녀의 제국을 위하여, 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견하는 무겁게 끄덕였다.

***

그리고 다시, 루우와 견하는 칸발리크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전에 탔을 땐 칸발리크를 구하러 가는 길이었지.”

두 사람 각자, 칸발리크를 구하기는 했다. 하지만 루우가 거기서 직접 사람들을 구한 것과 달리, 견하의 방식은 떳떳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견하는 말머리를 돌린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칸발리크를 삼킬까, 그 방법을 알아보러 가는 거지.”

웃음소리 없이, 루우는 작은 미소만 띤다.

“그러네. 오래 걸렸다면 오래 걸렸고, 빠르다면 빠르게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어.”

루우의 아버지, 시레문 카간의 죽음.

견하가 자신의 부모님이 오래오래 사실 거라고 생각했듯이, 루우도 카간 자리를 잇는 게 먼 미래의 일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좋든 싫든 카간 자리를 향해 달려야 한다.

다이온을 향해.

몽골 병합을 향해.

아버지 이야기가 나와서였을까, 아니면 시대의 격변을 감당하러 간다는 긴장감 때문이었을까.

루우는 맞은 편에 앉지 않고 자리를 옮겨 견하 옆에 앉았다.

향기. 리안의 목덜미나 머리카락에서 맡았던 것과는 다른 향기가 난다.

견하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루우가 화제를 전환했다.

“콘스탄티누폴리에 다녀온 보고를 간략히 듣기는 했는데, 당사자한테 좀 더 듣고 싶어. 어땠어? 거기 이단 연구.”

견하도 황제의 질문에 빠르게 적응한다.

“의외였어. 생각보다 유연하게 ‘우리가 생각해 온 방식의 신’은 없다는 것, ‘영혼은 없다’는 사실들을 받아들이고 있더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건 그, 벨리사리오스 황자가 비호하는 학자들뿐인 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접촉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벨리사리오스 측 사람들이었고, 로마 정부가 직접 진행하는 연구 사업에는 접근할 수 없었으니까.”

흠, 하고 루우는 생각에 잠긴다.

잠깐 사이에 생각이 정리된 듯, 금방 다시 견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외로 ‘정상적’인 방식으로 연구가 진행 중일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계속 주시하긴 해야 해. 칸발리크 테러는 이제 전 세계에 알려졌고, ‘신이 없다면 신을 만들겠다’고 생각하는 미치광이가 어딘가에 섞여 있지 않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있을법하지.”

견하는 씁쓸한 기분으로 토칸의 얼굴을 떠올린다.

칸발리크의 황궁에서 한 번, 그 의식 속 이상한 공간에서 한 번, 카라코룸 제압 작전에서 한 번, 이렇게 세 번 마주쳤지만 잡지 못했다. 죽이지 못했다.

신수덕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이렇게 놓친 인간들이 세계를 어떻게 헤집고 다닐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가능한 빨리 잡아야 한다.

혹여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대처할 수 있는 국가 체제를 만들어둬야 한다.

“그나저나, ‘이단에 의한 지배’라.”

꽤 흥미로운 생각이네, 라면서 루우는 다리를 까닥거린다. 황제의 동작에서 그 또래의 느낌이 묻어나와, 견하는 미소지었다.

“많은 왕조들이 ‘이단’이 시조였음을 생각해보면 특이한 발상은 아니야. 그냥 고대나 중세적 왕조의 재림에 불과한 체제가 될 수도 있겠는데. 몽골도, 고려도 그 조상들은 신종과 이단의 피를 물려받았으니까.”

당장 이단인 루우가 고려의 온 신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

루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벨리사리오스와 비슷한 생각을 떠올려,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타이시나 너를 통해 들은 벨리사리오스의 인물됨을 생각해보면, 그런 시대착오적인 발상은 아니겠지. 그 자신도 황족이자 이단인 사람이 그런 체제를 만든다고 해봤자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체제잖아. 그렇다면…… ‘이단에 의한 지배’는 조금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겠어.”

“다른 의미라면?”

“글쎄. 당장 구체적인 방법은 잘 안 떠오르는데. 굳이 억지를 좀 부려보자면, ‘모든 로마인의 이단화’ 같은 게 아닐까?”

모든 인민이 이단이 되는 것.

그렇다. 그것 또한 ‘이단에 의한 지배’라고 부를 수 있다.

견하는 살짝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면서,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설마. 그게 가능하긴 할까?”

“늘 그렇듯이 가능한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야. ‘어떻게든 가능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문제지.”

열차는 끝없이 덜컹인다. 일반인들의 여객열차와 달리 진동과 소음을 최대한 줄였다고는 해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모양이다.

황제와 그 수행원을 실은 열차는 고려-몽골 국경을 지난다.

창밖을 노려보는 견하의 어깨에, 루우가 머리를 얹는다.

열차의 덜컹임과 소음이 무척 피곤했던 모양이다. 황제의 업무가 피곤하기도 했을 테고.

놀라운 지혜와 힘을 지녔지만 아직은, 소녀다.

지금 그녀는 황제가 입는 정복이 아니라, 얇은 반팔을 걸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루우의 어깨에서부터 희미한 따스함이 견하의 팔로도 전해져 온다.

살짝 여름의 온도를 담은 따스함이다.

견하는 루우가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조용히 창밖을 계속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이내, 아까 나눴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어둑어둑 해져가는 바깥 풍경 속 어딘가에 토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듯, 노려보면서.

만약 루우의 다소 엉뚱한 상상이 현실이 된다면…….

모든 인간의 파멸을 가져왔던 ‘다른 세상’의 실험. 그것이 혁세주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벨리사리오스의 실험은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

쿠릴타이가 열리는 회의장은 늘 그렇듯 장엄함을 뽐낸다.

게레센제 카간, 울제이 칸, 황자 바이다르, 황제 루우 테무르. 이렇게 네 사람뿐만 아니라, 보르지긴과 혈연이 있는 거의 대부분의 왕공들도 모였다.

심지어 망명 티무르 황가의 일원들도 보인다.

그 왕공들의 작위는 형식적으로만 남아있어도 쿠릴타이의 ‘전통’은 여전히 무겁게 작동한다.

몇 가지 의례가 지나가고, 마침내 게레센제 카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견하는 루우의 수행원 자격으로, 그녀의 조금 뒤에 떨어져서 앉아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게레센제 카간은 그 학자 같던 모습이 꽤 사라지고, 이제는 통치자 다운 면모가 훨씬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리안이, 견하가, 루우가, 지나가, 효윤이, 재연이 성장하듯이, 게레센제도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카간이 숨을 크게 들이켠다.

“전례 없는 위기가 동아시아를 포위했다.”

위기론인가. 위기에 처했으니 하나로 뭉쳐야 한다, 다이온 연방 창설의 명분으로는 나쁘지 않은 논조다.

“경제를 뒤흔든 대공황은 물론이거니와, 바다 건너 아즈텍에는 극단주의자들이 패권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 우리의 내부로도, 한때 참혹한 전쟁을 저질러 그 형벌을 사는 자들이 염치없이 반란을 일으켜 무고한 피를 흐르게 한다.”

단순한 명분을 떠나서, 지금 몽골, 고려, 키타이, 낭키아스가 처한 처지는 상당히 위태롭긴 하다.

“우리는 이를 돌파하기 위해 하나로 뭉쳤으나, 황금 가문의 큰 어른이자 짐 이전에 카간이셨던 분을 잃고 말았다. 하늘이 찢어지는 듯하고 땅이 무너지는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게레센제는 두 번,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하지만 우리가 그 뜻을 잇지 않을 순 없다. 하나가 되어 위기를 돌파하라는 선대 카간의 가르침을 우리가 잇는다면, 우리의 가슴 속에 그 뜻은 살아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조금씩이나마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아까부터 ‘우리’라는 말을 계속 강조한다. 그 말은 몽골 황실과 신민을 뜻하는 것일까, 아니면 고려까지 포함한 관세동맹의 구성국들을 이르는 것일까.

어쩌면 게레센제는 그런 모호함을 노리고 이 연설을 이어나가는지도 모르겠다.

“이에 짐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위대한 옛 카간들의 전통을 이어, 잊혔던 이름을 꺼내어 ‘우리’가 누구인지 다시 규명하고자 한다. 그 이름은 다이온(大元)이다.”

사람들의 경청 속, 침묵이 무거워진다.

나올 것이 기어코 나왔구나, 하는 느낌.

게레센제의 어조가 달라진다. 조금 빠르고, 높아졌다.

“지난 세계대전의 처리에 있어, 아즈텍과 일본의 개입 과정은 부당했다. 마땅히 가장 많은 피를 흘린 몽골과 고려의 뜻이 우선해야 하는 데도, 태평천국의 해체 과정을 자신들의 뜻대로 주무르고자 했다.”

음, 저 발언은 조금 민감한 문제를 건드릴지도 모르겠다. 일본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몽골은 아즈텍 정통 정부의 회생 가능성을 그리 높게 치지 않는다는 암시일 수도 있으니까.

“몽골의 모든 적법한 영토는 하나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

루우가 뒤에 앉은 견하를 향해 손짓했다. 견하는 상체를 기울여 루우 가까이로 고개를 가져갔다.

“뭐야, 저게. 내가 했던 연설을 그대로 표절했잖아.”

“카간을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대로 넘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카간이 될 때는 좀 더 괜찮은 연설을 준비해야겠어.”

견하는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게레센제의 연설은 계속된다.

“분단되었던 공동체, 마땅히 얻었어야 할 영토는 이제야 비로소 하나의 공동체로 회복될 것이다. 많은 시간, 많은 절차, 많은 다툼이 있겠으나 우리는 지금껏 잘해온 것과 같이 성공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수가 쏟아진다. 아마 여기엔 예의상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겠지. 다이온의 부활에 열광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견하도 함께 박수를 쳤다. 그러면서 회의장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둘러본다.

한 소년이 견하의 눈에 들어왔다.

황자. 아직 태자가 되지 못한, 아니 앞으로도 될 수 없을 게레센제의 아들, 바이다르.

견하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샤냥감을 살펴보는 부엉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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