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떼의 아가리(12)
견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과도정부로 그렇게 해둘 수는 있겠지만 그 체제를 계속 두진 않을 거잖아요.”
견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단 지나가 뭐라고 하는지 그저 듣기만 했다.
“선배 머릿속에는 ‘태사 각하의 강대한 권력 건설’ 밖에 없잖아요. 그러면 최종적으로는 다이온 내에서 몽골과 고려는 완전히 융해. 하나의 나라가 되겠죠. 하나의 나라. 하나의 군주. 하나의 태사.”
견하는 계속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그 침묵이 긍정이나 다름없다는 건 알았지만.
지나는 조금 토라진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런데 그건 태사 각하께서 바라는 바는 아니니까, 선배의 독단적 결정이겠죠.”
“각하께서 뭘 바라시는지 알고 있나.”
“각하야 어디까지나 연방 안에서 분리된 나라들로 있기를 바라시는 거 아니에요? 그 점에 있어서는 안세규 장관이랑 의견이 일치하실 텐데.”
영리한 후배는 기특하지만 조금 피곤하다. 하지만 리안에게 견하가 중요한 참모이듯이, 견하에겐 지나가 중요한 참모다.
그러니 여기까지 도달하는 동안 치열하게 공부했을 그 노력을 봐주도록 하자.
“일단 볼로드가 실각하고, 황제께서 카간까지 겸하시고 나면…… 그 권력 공백은 ‘누군가는 채워야 하는’ 거야. 각하는 그 공백을 그냥 방치하실 분이 아니지.”
결국에는 리안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이온 연방은 그런 식으로 완성된다.
지나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한 방식이에요. 막연한 가능성에 기대고 있다구요.”
견하는 지나의 얼굴을 보면서 효윤의 얼굴을 떠올린다.
역시 이런 방식에 대해서는 모두들 걱정하는구나.
하지만 지나가 효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계획의 속도를 조금 늦추시든지, 아니면 체계적으로 보강하셔야 해요.”
견하의 의견을 지지해준다는 것.
“……있잖아, 후배. 나처럼 위험한 방식을 좋아하는 사람을 계속 따라다니면 언젠가는 나랑 싸잡혀서 크게 고생할지도 몰라.”
“선배가 실각하면 그렇게 되겠죠. 저는 그렇게 안 되게 하려고 노력 중이고요.”
견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이렇게 힘이 나는 일이다.
“좋아. 생각해보자. 좀 더 ‘안전한 방식’으로 상황을 움직이는 법 말이야.”
***
아즈텍 연방의 수도 쿠아우테목 시.
대서양 전쟁 때 맹활약한 영웅의 이름을 딴 이 도시는 지금, 음울한 분위기에 짓눌려 있다.
서쪽, 북쪽, 동쪽에서 연방 정부를 덮쳐오는 거대한 내전.
수도에서 소요 사태라도 일어나면 끝장이기에, 계엄령이 발동되었다.
그 어떤 군사 정권 못지않은 살벌함이 쿠아우테목의 모든 거리를, 골목 구석구석을 지배한다.
통령궁의 분위기는 더욱 어두웠다.
도저히 밝은 미래상이 그려지질 않았으니까.
-어찌어찌 유럽의 지원물자가 도달하고는 있습니다만……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보고를 받으며, 통령 네자우알 테콜로틀은 침묵을 지켰다.
온 얼굴에 어둠이 드리웠다.
지원은 말 그대로 지원에 불과했으니까. 저쪽의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지 중단될 수 있는 것이다.
빚…… 을 진다면 차라리 편하겠지만, 열강 어느 쪽도 그렇게 생각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차피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테콜로틀의 연방 정부가 승리해도 국가를 재건하는 데 더 많은 원조가 필요할 것이다. 아즈텍이 빚을 다 갚는 데에는 100년 이상 걸리지 않을까.
연방 정부가 패배한다는 전망도 있기에 유럽 열강들은 ‘성의’ 수준의 지원을 보낸다.
여차해서 아즈텍 연방이 멸망하고, 대륙해방군이든 대륙혁명전선이든 이 나라의 주인이 되고 나면 다음 일을 준비해야 할 테니까.
일단은 새 주인이 ‘적’을 지원한 유럽 열강에 강력한 항의를 해 올 텐데, 그걸 어찌어찌 달래서 국교를 정상화할 변명이 필요하다.
그 변명으로는 ‘적’에 대한 지원이 형식적이었다는 게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물론 지원의 총량이 적은 건 결코 아니다.
아즈텍을 혼란으로 몰아넣은 이 내전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혁명의 성격을 띤다. 고려 내전 당시에도 미리안 태사 측은 친위‘혁명’을 칭하지 않았던가.
아즈텍의 경우 우익과 좌익에서 동시에 일어났다는 점이 특이하지만.
여하튼 이 혁명이란 것은 각 국가의 지배자들을 긴장시키기 마련이다.
원래는 혁명으로 일어선 자들이라 해도 지배층이 되는 순간 다른 혁명을 두려워하기에, 가급적이면 연방 정통 정부의 승리로 이 내전이 끝나길 바란다.
“하지만 동쪽, ‘자유주 독립군’을 자처하는 역도들이 승기를 잡으면 표정을 또 바꾸겠지.”
그때는 본격적인 군사 개입이다.
일반적으로 전쟁은 돈을 잡아먹는 괴물이지만, 어떤 전쟁은 ‘사업’의 성격도 띨 수 있다.
대서양 전쟁을 설욕하고, 대공황을 이겨나가기 위해 아즈텍 대륙의 자원을 잔뜩 뜯어먹을 기회.
굶주림 끝에 인육을 뜯어먹게 된 난파선의 선원들처럼, 아즈텍의 시체를 난도질하러 올 것이다.
“이중전선도 아니고 삼중전선…….”
절망으로 쉬어버린 목소리. 테콜로틀은 중얼거리다 말고 서랍을 한 번 손바닥으로 쓸어본다.
그 안에는 권총 한 정이 있다.
호신용, 이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그거야 국가원수에게 차마 권총의 정확한 용도를 말해주긴 민망하기 때문이다.
자살용, 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지.
하루에도 몇번 씩, 그걸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기는 상상을 한다.
아마 반란군이 통령궁까지 밀려오는 날에는 그렇게 될 것이다.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그 어설픈 늙은이처럼 도망치다 비참하게 죽진 않을 것이다.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죽지 않고 버티는 이유는, 전선에서 죽음과 싸우는 병사들 뒤에서 비겁하게 죽음으로 도피할 수는 없기 때문.
“……그래도 오늘 이건 정말 버티기 어렵군.”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
어지럽게 흩어진 종이들 사이로, 사진 몇 장이 보인다.
전장의 격렬한 상황 때문에 선명하진 않다. 그러나 이 사진을 찍은 이가 얼마나 커다란 용기를 발휘했을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적의 총탄에 죽을 수 있다는 공포도 공포지만, 사진 속 저 ‘괴물’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든 찍어서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게 참으로 가상하다.
“칸발리크…….”
칸발리크에서 일어났던 참극은 대사관을 통해, 첩보원들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괴물의 외양에 대한 자료도 상당히 수집해뒀다.
대책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저런 형태로 아즈텍 대륙에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저게 나타났다는 건, 쿠아우테목에도 칸발리크와 같은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인가.”
무섭다. 몸이 떨린다.
죽음이 무섭다. 적의 화기가 무섭다. 패배가 무섭다. 치욕이 무섭다. 아픔이 무섭다. 괴물이 무섭다. 수도가 유린당하는 것이 무섭다. 시민들이 죽어 나가는 것이 무섭다. 연방의 마지막 통령으로 기록될 것이 무섭다. 무능한 자라 손가락질받을 것이 무섭다. 속속 올라오는 전황 보고가 무섭다. 국무회의에 나가야만 하는 하루하루가 무섭다. 가족들마저 희생될 것이 무섭다. 국토가 잿더미가 되어버릴 것이 무섭다. 최강국의 위상이 사라지는 것이 무섭다.
심호흡을 한다.
“시레문 카간도 칸발리크 테러로 죽었다. 국가원수가 하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받아들이자.”
정말로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였는지 어쨌는지, 테콜로틀은 알 수 없었다. 그저 받아들이기를 바라며 되뇔 뿐이었다.
***
“쿠아우테목은 최대한 온전한 상태로 손에 넣는다.”
테노치티틀란의 시청에서, 대륙해방군의 최고지도자 쿠에츠팔린은 그렇게 선언했다.
이제는 대륙해방군 속으로 녹아서 사라진, ‘철혈의 꽃’의 수장이었던 남자다.
연방 통령 테콜로틀이 들었다면 상당히 안도했겠지만, 마냥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대륙해방군은 쿠아우테목에 큰 피해를 입히지 않고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으니까.
“북쪽 전선에 경계를 늦출 수가 없는 게 좀 아쉽군.”
북부를 장악한 대륙혁명전선. 당장은 연방 정부라는 적을 눈앞에 두었기에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언제 상대방이 돌변할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적지 않은 병력이 세력 간 경계선을 지키고 있다.
연방 정부로서는 반란군끼리도 서로 싸워서 전력을 소모해주길 바라지만, 두 반란 세력은 절대로 연방 정부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연방 정부만 좋을 그런 바보 같은 일을 왜 하겠는가.
“양쪽 모두 바보가 아니라서 다행인 점도 있다.”
어느 한쪽이라도 바보가 있었다면 이 전쟁은 연방 정부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북쪽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한 혁명전선은 동부의 ‘자유주 독립군’과도 경계를 맞대고 있다. 여기도 상황은 좋다. 어리석은 전력 소모는 일어나지 않는다.
“세 방면에서 포위했다고는 해도, 연방 정부가 여전히 가장 강한 세력임은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그들은 외국의 원조를 받는다.
분노한 열강의 군사 개입이 있을까 두렵기에 외국의 선박을 공격할 수도 없다.
따라서 세 반란 세력은 쓸데없는 전력 소모를 줄이고, 연방 정부가 새로운 활로를 찾기 전에 신속하고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야만 한다.
“때는 왔다.”
신수덕이 준 괴물.
병사들을 ‘두 번’ 죽여가며 연방 정부의 온 정신이 남부의 항구를 향해 집중되게 했다.
“연방 정부는 우리가 항구를 틀어막고 자기네들을 말려 죽이는 전략을 짰다고 착각하겠지. 한창 그런 착각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단숨에 수도를 친다.”
간부들이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사실상 모든 걸 건 작전이다.
승리를 의심하지 않지만, 패배하면 죽을 각오는 해 둔다.
“쿠아우테목을 함락시킨다. 대륙의 주인은 우리가 될 것이다.”
최고지도자 쿠에츠팔린의 연설을 듣는 모두가 경례를 올린다.
그 경례를 받아주면서, 쿠에츠팔린은 일말의 불안감을 곱씹었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며 떠나던 신수덕의 얼굴과, 그의 말을 떠올려 본다.
-앞으로는 새로운 형태의 군대가 전장을 지배할 겁니다.
-각국이 자기네 나름대로 지혜를 짜내, 새로운 형태의 군대를 만들겠죠.
-그리고 새로운 군대는, 새로운 사회를 형성할 테고요.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였을까.
역시 떠나기 전에 제거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든다.
아니, 후회는 잠깐이었다. 곧바로 소름이 돋는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수작을 부렸다간 신수덕의 손에 죽었을 것이라는 예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