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떼의 아가리(9)
“나는 이번 조치가 ‘태사가 뭔가 냄새를 맡은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소이다.”
냄새를 맡았다?
아마 1929년의 ‘그 일’을 말하는 것이겠지.
안세규를 비롯한 구 민국 정부의 각 파벌이 태사 미리안을 암살하려 했던 것.
류성일은 안세규를 뒤에서 지원했던 것.
태사도 체면이 있으니만큼 공개적으로 류성일과 안세규를 잡아 죽이려 들지는 않겠지.
지금 류성일을 카라코룸으로 보내는 것처럼, 서서히 힘을 깎아내면서 말려버릴 생각이다.
목숨은 잃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상 정치적으로는 사망한 상태로 만들겠지.
“……그런데 정말 태사가 ‘그 일’에 관한 냄새를 맡은 걸까요? 태사는 그저 제국입헌당이나 내각에서 자기 세력을 강화하려는 걸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류성일이 가는 자리가 한직이 아니다. 카라코룸은 황제 왕서라, 루우 테무르의 야망과 고려의 미래 전략이 모두 뒤얽힌 자리다.
류성일은 고개를 저었다.
“태사가 ‘아주 신중하게’ 우리를 말려 죽일 작정이라면, 한 번에 나를 몰락시키려 들진 않을 거요. 일단은 ‘사람들’부터 떼어내고, 또 나를 어딘가로 옮겼다가 서서히…… 어쩌면 명예는 지켜주는 방식으로 은퇴시켜줄지도 모르지.”
그 백부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나는 그 조카에게까지, 두 번 당하진 않을 것이오.”
안세규는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노인네의 집념에 질려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미승휴, 미리안 일가에 대한 원한이 강했군, 이 늙은이.
그리고 반드시 태사 한 번은 해보겠다는 야망도 크다.
류성일은 계속 말을 이었다.
“또한, 태사의 의도가 그리 가혹한 것은 아니라 치더라도 불안 요소가 너무 크다오. 안 장관…… 황제께선 장관이 했던 일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소?”
그 물음에 안세규의 얼굴이 굳는다.
“황제 폐하는…… 한때 제 경호원으로 위장하고 있었습니다만.”
다른 파벌들이 류성일의 총장실을 습격해 미리안을 죽이려 했던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 파벌들은 지난번에 안세규가 당권을 장악하면서 모조리 쳐내긴 했지만…… 조유관이라는 생존자도 있고, 그런 자들이 황제의 곁에서 ‘증언’을 쏟아낸다면?
“아무리 그래도 황제께서 태사에게 모든 정보를 넘기실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황제께선…… 여러 정파의 균형 속에서 그 권위를 확보하려 하십니다. 저나 류 장관께서 무너지면 그때는 태사의 독주 체제가 되어버리는데, 폐하께서 그런 위험을 감수하려 하시겠습니까?”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면?”
“그럴 필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를 들어 그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이라는 것 말이오.”
이제는 비밀이 아니게 된 그 계획. 대중에게도 슬슬 알려지고 있다.
이 문제는 안세규 역시 리안과 마찬가지로 반대하는 입장이다. 설령 다이온 연방이라는 체제가 실제로 만들어진다고 해도 ‘구성국의 상당한 자치’라는 한계는 꼭 지켜져야만 한다.
“칸발리크 사건, 몽골 내전 등을 겪으면서, 폐하께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건 아닐는지?”
“무엇을 용납할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신의 존재 말이오, 안 장관.”
숨을 삼킨다.
말을 종합해보자면 이러하다.
황제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안세규를 제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황제 자신이 몽골 카간 자리를 잇고, 다이온을 다시 만들어 동아시아 전체를 지배하는 군주가 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게다가 고려국민당,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공화제’를 포기한 것은 아니지요?”
“…….”
세규는 답하지 않는다. 감출 필요가 없을 정도로 고려국민당이 지향하는 바는 명확하지만, 어쨌든 세규는 황제의 신하로서 내각에 참여하고 있으니까.
“당장은 황실을 폐지하고 공화국으로 거듭나자는 목소리는 미약하기 짝이 없소. 그러나 미래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지. 그러니 폐하께선 아예 싹을 밟아버리자……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겠소?”
황제는 안세규를 제거하기 위해, 생각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태사에게 흘린다.
정보를 접한 태사는 일단 류성일을 제거하기 위한 공작에 들어간다.
세규는 떨떠름한 얼굴로 간신히 이렇게 대답했다.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한 말씀이십니다.”
“그렇지. 추정일 뿐이지. 허나 추정이란…… ‘가능한 것’이오.”
류성일은 슬쩍, 몸을 세규 쪽으로 내민다.
“역적으로 죽을 순 없소. 그러니 공격은 오로지 ‘태사에게만’ 집중되어야겠지.”
***
리안의 개인 기숙사, 라는 이름의 별장.
오랜만에 리안은 여기서 소년…… 아니 이제 청년으로 접어든 연인과 데이트를 즐기기로 했다.
“도저히 휴가를 낼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렇다고 정장에서 땀내가 진동할 때까지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을 순 없잖아?”
견하는 ‘자신만의 전쟁터에서 막 돌아온, 연인의 냄새를 맡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려다 그냥 삼켰다.
샤워를 마치고 얇은 반팔 옷을 걸친 리안은, 머리를 올려 묶는다.
소매로 살짝 드러난 하얀 팔과 거기서 이어지는 겨드랑이까지의 깔끔한 선이 매혹적이다.
그 긴 머리카락을 다 묶고 난 리안은 고개를 살짝 흔들어본다.
“어때? 효윤이 같지 않아?”
“음,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네요.”
견하가 소파에 앉아 머리카락 끝을 살짝 매만지자, 리안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대로 견하의 무릎 위에 앉는다.
바지도 짧은 반바지라, 하얗고 가느다란 다리가 소파의 검은 가죽 위로 도드라져 보인다.
피로를 풀듯 다리를 쭉 뻗는다. 함께 쭉 뻗는 발가락들이 귀엽다.
리안은 견하의 목덜미에 코를 댔다.
“일터에서 돌아온 내 남자의 냄새라…… 좋구나.”
견하는 아까 그냥 말할 걸 그랬나, 살짝 후회한다.
대신 눈앞에 길게 뻗은 다리 위에, 살짝 손을 얹어본다.
눈치채지도 못했다는 듯, 리안은 계속 태연하게 앉아있다.
“로마에서, 벨리사리오스 황자를 만났어요.”
“오, 그래? 잘 지내고 있어?”
오랜만에 듣는 옛 친구의 소식 때문인지 리안의 눈이 반짝거린다.
견하는 그 모습이 조금…… 아주 조금 짜증이 났다.
“건강이나 평판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어요.”
“음, 잘 됐으면 하는 친구야. 야심도 많고 당당하지. 내가 권력 쟁탈전에 뛰어들기 전에 많은 용기를 불어넣어 준 친구기도 하고.”
“당당하긴 하더라고요. 제가 누나의 연인인 걸 알면서도 면전에서 ‘청혼을 했었다’고 하던데요.”
견하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살피던 리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 청혼, 받자마자 거절했는데 외교 문제로 비화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 아닐까.”
리안은 이마를 긁적이다 덧붙였다.
“그 사람이 직접 나와서 너를 맞이할 줄은 몰랐는데. 내가 그 사람을 만났을 때도 꽤 과정이 복잡했거든.”
“누나와의 옛 동맹을 재확인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어요. 뭔가 계획을 진행 중인데…… 외부의 지지가 필요한 모양이에요.”
“황위에 대한 야망인가? 루우의 사례를 참고하려면 멀리 떨어진 고려보다는 옆에 있는 신성 제국에서 도움을 구하는 게 나을 텐데.”
“황위를 노리는 건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말을 하다 말고, 견하는 멈춘다.
리안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풋, 하고 웃었다.
“혹시 질투심이 났나?”
“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대답에, 리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쪽은 과시할 생각은 없으니 오해 말라고 했지만, 제가 모르던 시절의 누나 이야기를 듣는 게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어요. 게다가……”
이번에는 말을 끌다가, 정면으로 쏟아낸다.
“만약 그때 누나가, 조금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다면……”
자신의 것이 아니었을 거라는 상상.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머리를 맴돌고, 그리고 그 누군가가 구체적인 사람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그대로 굳어 있던 리안의 얼굴이 빨개진다.
귀까지.
목덜미까지.
쇄골 아래, 가슴팍까지 빨개진 것 같다.
“……확인해보고 싶어?”
무슨 말일까.
“내가 네 것인지.”
리안은 견하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리고, 어깨에 한 손을 짚었다.
뭔가 각오를 다진 것 같은 얼굴이다.
연상으로서 뭔가를 보여줘야겠다는 것 같은.
그도 그럴 게, 떨리는 다른 한 손으로, 웃옷 자락을 잡아 올리고 있었으니까.
견하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리안의 입술이 견하의 입을 막았다.
***
현실이긴 한 걸까.
그런 몽롱한 기분에 잠겨 있는 견하의 옆에서, 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이불로 몸을 가린 채로.
창밖 어딘가에서 들어온 희미한 빛이 리안의 피부 위에서 부드럽게 흩어진다.
그래, 부드러웠지.
지금 견하를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는 리안의 손길처럼.
멍한 기분으로 계속 누워 있는 견하의 귀에, 리안의 목소리가 와닿는다.
“그래서, 그 황자는 대체 뭘 하려고 도움을 구하는 거지?”
아까까지 들리던 목소리와 달리, 냉정하게 정세 판단을 내리려는 주군의 목소리다.
지금 이렇게 보고를 요구하는 사람이, 아까 전까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았던 그 사람과 정말로 동일 인물일까?
뜨거운 숨결로 첫 아픔과 사랑을 고백해오던 사람과 같은 사람일까.
등의 땀이 식어간다.
끈적이는 감촉을 아랑곳하지 않고 리안이 등을 쓸어준다.
견하는 자신이 고양이였다면 분명 골골거리는 소리를 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리안은 견하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다. 엄청 부스스해졌을 것이다.
리안은 그런 견하의 모습을 보곤, 소녀처럼 해맑게 웃는다.
소녀 시절에는 그런 웃음을 지을 여유가 없었다는 듯이.
“사자(獅子) 같아.”
방금 고양이를 떠올렸던 견하에겐, 마치 격려해주는 듯 들리는 말이다.
나를 지탱해주는, 나의 여자.
나의 소녀.
내가 품은 사람.
앞으로도 계속 품게 될 사람.
견하도 몽롱한 머리를 깨우려고 몸을 일으켰다.
“벨리사리오스는 차기 황제가 되는 게 목적이 아니었어요. 그는…… ‘천손민족협회’ 비슷한 단체들을 비호해주고 있었어요.”
리안의 얼굴에 굉장히 의아하다는 표정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녀의 의아함은 이해하지 못해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녀는 들은 정보를 종합하고 그 결론의 당혹스러움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다.
“제국의 황자가 제국의 체제 자체를 변혁하려 든다고?”
“‘이단’의 지배 운운하던데요.”
“……4년 사이에 대체 뭔…… 그런 몽상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 내가 그때는 사람 보는 눈이 없었나.”
이단? 이단의 지배? 대체 뭘 만들려는 거지. 그렇게 혼자 곱씹어보던 리안은 다시 견하에게 물었다.
“너는 뭐라고 대답했어?”
“그냥 대충 맞장구쳐줬죠. 현실성 없는 사업계획서를 보는 것 같았으니까요.”
“내 생각도 그래. 로마의 파시스트 단체가 황자의 이름 아래 보호를 받고 있다곤 하지만…… 실상은 황자를 자기네 방패로 쓰고 있을 뿐일걸. 벨리사리오스가 얼마나 강한 이단인지는 모르겠지만, 파시스트들의 정권 탈취에 실컷 이용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리안은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양손을 감싸 쥔 채 올려놓았다. 그 위에 턱을 괸 채 한참 생각에 잠긴다.
구부러진 등줄기가 매끄럽다.
“로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도 주의를 기울여야겠어. 뭔가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온 유럽이 불바다가 될 거야.”
견하는 리안의 옆으로 조금 더 다가붙었다. 어깨 위에 팔을 두른다. 피부가 그새 식어서 시원하게 맞닿아 온다.
리안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견하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낯선 행복의 감각.
그게 행복인지조차 모른 채, 두 연인은 체온을 나눈다.
“조금 더 열심히 해서, 승진해 봐. 그러면 혹시 알아? 결혼 발표가 앞당겨질지.”
결혼이라는 단어에 다시금 견하의 머리가 몽롱해진다.
파괴된 가족.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견하는 가족을 다시 가지려 하고 있다.
“열심히, 말이죠.”
동시에…… 다른 ‘열심히 할 일’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