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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90화 (290/541)

이리떼의 아가리(8)

발표자는 잠깐 말을 멈춘다. 목이 마른 모양이다. 물 한 잔을 마시고 마저 말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발해도라는 한정된 지역에 적용되었던 정책을, 기계적으로 전 국토에 적용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발해도에서야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만, 그게 다른 지역에서도 성공을 거두리라는 보장은 없지요.”

그렇다. 발해도의 성공 사례를 확대 적용한다 치더라도, 그 전에 충분한 검증 기간이 필요하다.

한족은 많고, 한족이 분포한 대륙 영토는 넓다. 기후를 비롯한 자연환경, 전통과 역사, 문화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지역별 차이를 보인다.

몇몇 공통점을 중심으로 ‘한족’이라 묶을 수 있을 뿐이지 그 세세한 면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다른 민족으로 분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실제로 중세 다이온 시기에 한족 강역을 주변 번국에 분배했던 정책은 한족을 ‘잘게 분해하는’ 효과를 노렸던 것 같다.

“반발을 최소화한 동화 정책, 신중한 검토를 거친 자치 허용…… 이러한 정책은 분명 ‘안정적인 민족 동화’라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정적인 만큼, 오래 걸린다는 단점도 있지요.”

동화 과정에는 교육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에는 한계가 있다.

교육 다음으로 바랄 수 있는 건 피지배 민족의 자발적 학습.

그러나 이 역시도 지배 민족으로 편입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혹은 지배 민족의 문화가 취미로 향유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거나.

그 외의 경우라고 한다면…… ‘시간’이 지나 지배 민족의 문화나 통치 방식에 자연스레 익숙해지게 만드는 것뿐.

그리고 그 시간은 ‘세대’ 단위가 될 것이다.

태평천국의 영광, 세계대전, 패배와 식민 지배의 시작.

이것을 모두 기억하는 세대는 다이온의 통치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다음 세대는 이전 세대의 교육으로 한족 제국의 기억을 충분히 물려받았을 것입니다. 태평천국의 신민으로 살아본 적은 없다고 하더라도, 지배 민족에 대해서는 충분한 반감을 지니고 있겠죠.”

그러므로 세 번째 세대가 중요하다.

“이 세대에 이르러서 태평천국은 완전히 ‘먼 역사’가 됩니다. 이들은 키타이나 낭키아스, 혹은 고려나 몽골령 식민지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태평천국 신민으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하죠.”

발표자는 살짝, 비웃음 비슷한 미소를 띤다.

“이런 세대에는 손쉽게 ‘민족주의’를 유치한 것, 구시대적 발상인 양 생각하게끔 할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을 ‘유치한 민족주의 광신도, 테러리스트’로 여기게끔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죠. 그렇게 냉소적인 태도가 멋있는 것이라는 사고를 10대, 혹은 20대일 때 불어 넣으면 그러한 흐름은 더욱 가속화될 것입니다.”

고려와 몽골의 ‘세련된 문화’를 선전하는 사업은 ‘세 번째 세대’의 감각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이렇게 멋진 문화를 만들어낸 민족’과 ‘자신들을 지배하는 민족’을 동시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꽤 헷갈리겠지.

문화의 가치는 정치적 이해관계와는 완전히 별개 문제인 것을 깨닫기 전에, 여러 가지 사고혼동을 일으키자.

-고려, 몽골의 문화를 좋아하면 친려파, 친몽파다.

-고려, 몽골의 통치를 비판하려면 그들의 문화도 멀리해라.

이런 식의 유치한 말만으로도 어설픈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세 번째 세대’는 스스로 자기 민족을 배신한다.

민족 감정은 어리석은 것이며, 제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게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말로 고려, 몽골의 통치를 비판하기 위해 그 문화마저 멀리하는 자들도 나오겠지만, 이들도 어리석긴 마찬가지.

‘유치한 민족주의에 물들었다’는 손가락질 몇 번이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거기까지 들은 견하는 중얼거린다.

“문제는 신수덕의 학살극인데…….”

이것은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만큼 오래 기억에 남아서, 민족 정책의 발목을 잡겠지.

저 학자는 어떤 대책을 내놓을까?

“한족 대상 역사 교육에 있어 다소간의 ‘정치적 배려’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견하는 피식 웃었다.

“왜곡하라는 말이군.”

견하의 목소리는 재연에게만 들린다. 재연은 견하의 웃음 섞인 말을 들으면서, 동시에 학자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이를테면 신수덕의 학살극은 ‘격화되어가던 한족 독립 운동이 고려의 내전이라는 혼란상과 충돌해 벌어진 비극’이라는 식으로 말을 모호하게 돌린다든가 하는 것이지요. 세월이 지나면 ‘당시 시대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평가로 객관적인 태도를 위장하는 식으로 교육의 내용을 바꿔가면 됩니다.”

혹은 ‘공정한 역사 평가는 100년 뒤에나 가능하다’는 식으로 피해자가 모두 죽어 없어질 때까지 시간을 번다든가.

한족이 입은 피해는 최소화하거나 삭제하고, 정묘한란이나 세계대전의 서술 분량을 늘려 한족의 지금 처지가 ‘인과응보’라는 인식을 확산시킨다.

이런 방식의 대응은, 대(對) 한족 정책에서 고려와 몽골이 저지른 모든 실책을 무마하는 데 적절히 활용될 것이다. 일부는 지금도 활용되고 있다.

“한족 대상 역사 교육에서의 ‘정치적 배려’는, 근현대사뿐만 아니라 전근대 역사에서도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태평천국의 성립 이전에는 모든 한족 제국이 ‘지방 간 느슨한 결합체’에 불과했다는 식으로 말이죠. 태평천국이 비로소 근대적 국가를 흉내는 냈지만, 그 국력을 다른 민족을 침략하는 데에나 낭비했다…… 즉, 한족에겐 제대로 된 근대 국가를 만들 능력도 의지도 없다.”

이러한 교육은 이번 한족 반란을 진압하고 나면 전 민족적 ‘무기력증’을 유발할 것이다.

한족은 안 된다. 실패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할 리 없다.

현실적으로 고려 또는 몽골에 기대는 것이 한족의 미래를 위해 좋다.

현실적으로.

이런 생각이 만연하게 되면, 한족이라는 민족성은 철두철미하게 해체된다.

“남은 문제는 ‘그런 시점이 오기까지’ 세대교체를 기다리는 동안, 다이온의 통치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저는 기존에 제안되었던 ‘알타이 민족’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하는 바입니다.”

알타이 민족 개념은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처음 제안해, 알타이 자유공화국이나 허동주의 천손민족협회에서도 활용되었다.

즉, 어디까지나 ‘몽골과 고려 두 민족의 통합’을 위한 개념이다.

그 외에도 중앙아시아 여러 민족의 통합까지도 내다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에서는 다이온의 강역을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어쨌든 그런 개념이기에 ‘한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의 통합까지 바라기엔 무리가 있다.

이번 발표자의 발표는 그걸로 끝이었는지 강단에서 내려오고, 다른 학자가 올라간다.

“앞선 발표자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우리 AN연구소는 향후 ‘다이온 체제’의 존속을 위해 ‘민족’ 이상의 개념, 즉 다이온의 강역 내 모든 민족을 포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재연은 소책자를 넘긴다. 견하는 그 소책자를 곁눈질하며 학자의 말을 듣는다.

“우리는 고전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탐구했습니다.”

한족의 천자.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이슬람의 칼리프.

민족 문제를 초월한 종교나 정치체, 혹은 그 혼합체의 지도자가 대변하는 국가 이데올로기.

고려에도, 더 나아가 다이온에도 그것이 필요하다는 건가.

“그건 마치…… 전에 재연이 네가 제안했던 ‘신황(神皇)’ 개념과 비슷하잖아.”

재연은 시선은 강단을 향한 채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견하 네가 기각한 아이디어지. 황제를 한계 없는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 순 없다고.”

“그랬지. 그럼 지금 발표는 그 대안으로 나온 건가?”

“네가 말했던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다이온을 통합하는 상징적 기능만큼은 확실히 붙잡는 방향으로 고민해봤는데…….”

재연이 말꼬리를 흐린다. 견하의 눈이 다시 강단을 향한다.

“한족의 천자, 몽골의 카간, 고려의 황제라는 상징을 모두 한 분이 맡도록 해야 합니다. 즉 우리의 황제 폐하께서 ‘몽골 카간’을 겸하면서, 동시에 그 자리에는 한족에게 익숙한 ‘천자’의 관념이 깃들어야 합니다.”

쿠빌라이 카간은 다이온이란 국호를 편 이래, 한족의 ‘천자’가 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유가의 지식인들, 도가의 도사들을 포용하고, 그들의 사상 속에 몽골 ‘카간’의 존재가 천자로서 자리 잡도록 이론적 토대를 닦았다.

그걸 다시 한번 활용하자는 것일까.

“그러나 이 모든 구상의 전제로서, 일단 황제 폐하께서 서둘러 몽골 카간의 자리에 오르셔야만 합니다.”

그렇다. 그것은 루우의 목적이기도 하고, 재연이 구상한 ‘다이온’ 체제의 완성이기도 하니까.

“아즈텍에서의 급변 사태, 커져만 가는 한족 위기는, 단순히 고려의 국력과 강역을 확장하는 것 이상의 시대적 요구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의 첫 구상은 돌아가신 시레문 카간 폐하의 뒤를 우리 황제 폐하께서 잇는, 수십 년에 걸친 장기적 구상이었습니다만…… 이제는 급히 움직여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죽어버린 시레문.

그 뒤를 이어 즉위한 게레센제.

일단은 야심을 굽히기로 한 울제이.

속을 짐작할 수 없는 볼로드.

이 인간군상의 불안정한 균형 상태로 다이온을 이어나갈 수는 없다.

“긴급한 상황에는 긴급한 해결책이 따르는 법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어떤 방향이든 정치적 격동을 발생시켜, 게레센제 카간이 퇴위하고 우리 황제 폐하께서 카간으로 즉위하실 수 있도록 상황을 조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바입니다.”

***

류성일과 안세규의 만남은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명백히, 나를 견제하기 위한 배치겠지요.”

법무장관에서 카라코룸 특별행정장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서열상으로는 좌천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일종의 ‘총독’으로 가는 것이기에 상당한 권한을 누릴 수 있다.

카라코룸에서만큼은 ‘태사’에 버금가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사법기관과의 연계, 그리고 장관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인맥, 구 제국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나 저와의 연대도 불가능하게 만들겠다는 뜻이겠죠.”

안세규는 그렇게 평했다.

그만큼 급하고,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조치다.

“동시에 저도 장관님의 도움을 바라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내전에 쿠데타 시도까지 겪고 난 뒤라 우리도 ‘기습적 행동’에 나서긴 어렵게 됐군. 안 장관, ‘일단은’ 몸을 굽힌 채로 태사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 같소.”

‘일단은’이라는 말이 묘하게 힘을 준다. 안세규는 그 미묘한 뉘앙스에 눈썹을 뒤튼다.

“혹, 태사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자는 말씀이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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