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떼의 아가리(5)
견하의 머릿속에 계속 한 가지 광경이 맴돈다.
블라헤르나이 궁 밖에서 시위하던 한족들의 모습.
자신들의 속죄는 언제까지여야 하냐는 민족의 모습이었다.
“국내 여론을 종합해보자면, 그러한 주장은 ‘한족이 전혀 반성하고 있지 않다’는 확실한 증거겠지.”
견하와 함께 앉아 있는 두 장관 중, 차무룡이 그렇게 입을 열었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선의로 포장한다 해도, ‘이제 반성 그만하고 싶다’는 말을 뻔뻔하게 꺼내는 민족을 어떻게 신뢰한단 말인가.
“백보 양보해서 설령 우리가 저들의 독립 국가를 승인해준다 치더라도, 다음 순간 여론이 정권을 끝장낼 걸세.”
조유관이 한마디 거든다. 그 말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로서 최선은 ‘발해도’ 같은 상당한 자치가 인정되는 행정 구역을 만드는 거겠죠. 그러나 이 정책에 한족을 인구를 보유한 다른 국가들도 동의해줄지는 미지수에요.”
키타이, 낭키아스 뿐만이 아니다.
그 주변의 보우슈엥, 대예, 티베트, 탕구트까지 모두 한족 인구라는 부담을 안고 있다.
이 부담을 기꺼이 감수하는 이유는, 한족을 수탈해서 얻는 이익이 분명하기 때문.
고려를 포함해서 구 태평천국 영토를 분할한 국가들은 어쨌든 그만큼의 이익을 거두고 있다.
겉으로는 ‘교육, 국방, 치안, 의료 등의 혜택을 제공한다’고 떠들지만, 그건 설령 고대 국가라 해도 국가가 국가로서 살아있는 한, 숨 쉬듯 작동하는 시스템일 뿐이다.
사람이 호흡할 때마다 ‘나는 식물의 광합성에 기여한다’고 자랑스레 떠드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런 혜택을 제공할 수 없는 국가는 망했거나 망해가는 국가일 뿐이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각국의 동의를 얻어낸다 해도, 이 지경까지 와서 한족들이 ‘발해도 같은 수준의 자치’를 받아들일지도 문제지.”
차무룡이 그렇게 말하며 끄덕인다.
“무력 투쟁까지 벌어진 이상, 한족도 독립 국가를 이루어내든지 아니면 확실히 멸망하든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겠죠. 일단 벌어진 전쟁을 쉽게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어요.”
그러나, 라며 견하는 말을 이었다.
“우리의 진압이 지지부진한 것도 사실이죠. 키타이의 울제이 칸은 자기네나 탕구트의 힘만으로 일을 해결해보겠다고 해서 키타이 파견군은 그냥 발해도 일대에 주둔 중. 낭키아스 파견군도 일본 측 관전무관이나 다른 외국의 눈치를 보느라 적극적인 작전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더군요.”
조유관이 한숨을 내쉰다.
“키타이에서는 울제이 칸과 합의를 보고, 낭키아스에서는 외국의 눈을 신경 쓰지 않을 만한 자유를 얻어야겠군.”
“동명에서는 일본에 일정한 지원을 해주는 대신, 한족 반란 진압이나 다이온 문제에서 손을 떼 달라고 할 예정이라죠?”
“그렇다고 하네. 자세한 이야기는 귀국해서 들어봐야겠지만, 아즈텍 문제가 우리에겐 실마리를 준 셈이야.”
조유관의 그 말에 차무룡은 다소 못마땅한 표정이 된다. 그도 국제 정세에 대한 식견은 높았지만, 아무래도 이런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다.
죽은 여준설이나 다른 경제 분야 거목들도 그렇지만, 차무룡 역시 자유로운 무역이 이루어질 수 있는 안정된 국제 정세를 이상적인 상태로 본다.
이 비합리적 상황에 적응해 단기적 이익을 얻어내는 건 그의 성미에 전혀 맞질 않았다.
차무룡의 성미야 어쨌건, 견하는 잠시 감았던 눈을 뜬다.
“방법은 단 하나, 강경하고 신속한 진압이겠죠. 그걸 위해선, 말씀하셨던 것처럼 키타이 및 일본과 합의가 필요할 테고요.”
합의를 이끌어내려면 당사자들 간 대화도 중요하지만, 다른 나라의 중재가 있다면 일이 더욱 쉬워진다.
“벨리사리오스 황자가 ‘동맹’을 제안해왔어요.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랄 건 없지만.”
“두 사람이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싶더니 그런 말이 오갔었군. 그런데 그 황자가 정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가? 그건 들은 바가 없는데.”
조유관의 의문에 견하는 고개를 저었다.
“로마 대 고려, 국가 간 동맹이 아니라 그 황자와 태사 각하 간 사적인 동맹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거예요.”
“알다시피 로마 황제가 로마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은 우리 폐하께서 고려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영향보다는 작네. 황자라면 더욱 작겠지. 벨리사리오스 황자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건 아닌가?”
“그래도 그 인맥을 타고 다른 나라들과 보다 ‘부드러운’ 협상을 진행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긴 하네. 하지만 상징적 로마 황실의 일원이 고려 정권의 정점인 태사와? 구도가 영 이상하단 말이지.”
“단순히 막내 황자라기엔 여러 가지 수상한 일들을 꾸미고 있는 것 같더군요. 최근 유행하는 파시즘 집단의 배후에 그 사람이 있는 모양이에요.”
두 장관 모두 고민하는 얼굴이 된다.
“그래서, 황자께선 파시즘 집단을 등에 업고 황위 찬탈이라도 노리신다는 건가?”
“황위를 찬탈하려는 건지 뭔진 모르겠지만, 정치체제의 변화는 확실히 바라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을 때 고려의 지지를 바라고 있고요.”
세 사람 모두 말이 없어졌다.
한참 만에야 조유관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입을 열면서도 신중하게 검토를 거듭하기 때문이었다.
“동맹 제안을 거절했다가 괜히 앙금만 남게 할 순 없지. 하지만 이 시점에 장관이 눈에 띄게 움직이는 것도 무리가 있어. 그러니…… 이건 주 국장이 황자에게 가서 매듭짓고 오는 게 어떤가?”
견하는 싱긋 웃었다.
“일단 받아는 들이되, 상황을 지켜보면서 언제든 발을 뺄 준비는 해두자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
견하가 벨리사리오스의 제안에 마음이 끌린 이유는 몇 가지 더 있다.
다이온 연방이 창설되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주변국의 경계는 살 것이다.
“아즈텍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당연히 우리와 우호적이긴 힘들겠고, 아즈텍 정통 정부가 자기 자리를 지켜도 다이온을 경계하긴 마찬가지겠지…….”
중앙아시아의 국가들뿐만 아니라, 이제 영향권을 맞댈 바라트, 일본과도 크든 작든 마찰을 일으킬 것이다.
주변에 우방이라 할만한 나라가 없는 상황.
이건 좋지 않다.
서쪽으로도 동쪽으로도 잠재적 적국이라면, 만약의 사태가 발생했을 시 전선이 계속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억제할 무언가가 필요해.”
아즈텍은 억제해 줄 나라가 거의 없다. 서쪽으로는 태평양, 동쪽으로는 대서양으로 다른 나라들과 확실히 거리를 두고 있는 데다가, 육상 국경을 접한 잉카 공화국의 국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잉카 쪽에서 딱히 북부 대륙의 정세에 관여하려는 생각도 없는 것 같고.
하지만 바라트는 억제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이 확실히 고려, 다이온의 우방이 되어준다면…… 아니 적어도 여론이 고려에 친밀하게 바뀐다면 상당한 힘이 된다.
바라트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고려와 다이온의 행동은 상당히 자유로워진다.
또 다른 이유는 이단 문제, 파멸인 문제에 대한 협력. 특히 기술적인 협력을 바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루우가 로마의 연구 성과들을 알아 오라고 했던 것도 있지만, 견하 개인의 흥미도 있었다.
“이단이 통치하는 사회…….”
벨리사리오스가 했던 말을 되뇌어 본다.
이것도 일종의 사회 실험이겠지.
몽골에 있을 때 토칸의 제안을 거부하긴 했지만…… 고려가 아니라 로마에서 실험해본다면 그 경과를 지켜보고 싶다.
그리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로마와 고려가 유지 중인 체제에 대한 이해를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
자유세계라곤 해도 어쨌든 로마는 식민제국이다.
로마가 세계대전 이후 얻은 광범위한 식민지에서, 종교도 민족도 다른 피지배자들을 어떻게 통치하는가. 어떻게 억누르고 구슬리는가.
한족을 제압하고 앞으로 계속 통치를 이어나가야 할 다이온에겐 꼭 참고해야 할 모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차는 벨리사리오스의 별장에 도착했다.
안내를 받아 벨리사리오스가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황자는 일어나서 똑바로 걸어와, 견하와 악수했다.
“역시, 내 제안을 받아들이러 왔군.”
“‘일부’를 시험 삼아 받아들일 겁니다. 황자께서 계획하신 일의 진척에 따라 동맹은 결렬될 수도 있고, 더 굳건해질 수도 있겠죠.”
벨리사리오스는 씩 웃었다.
“대담하군.”
“예의보다는 본격적인 협상이 필요한 자리니까요. 어쨌든 저도 애국자입니다. 이런 일을 벌이면서 국익에 도움이 될지, 아닐지 계속 재봐야죠.”
“좋아, 일단 앉게.”
밀담.
혹은 반역 모의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
견하는 다시 한번 자신이 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감찰국장 주견하가 벨리사리오스와 접촉한 사실은 웬만한 나라에서는 이미 다 파악했을 터.
하지만 장관급이 온 게 아니니까 사안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하긴 어려울 것이다.
단순한 친교 행위라고 발뺌하면 어떻게 더 캐보기도 힘들다.
“황자께선 다음 황위를 노리시는 겁니까?”
“딱히 황제가 되고 싶은 건 아니야. 하지만 만일 로마가 황실을 폐지한다면 나는 통령 같은 자리에 나가 보고 싶은 생각은 있어. 설령 황실이 유지되고 아버지가 퇴위하시지 않아도 정치가로서 일할 방법은 많지.”
그럴 것이다. 장관이든 총리든 뭔가 한 자리 차지하면 되겠지.
어쨌든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적절한 ‘권력’이 있으면 되는 거니까. 그 권력의 형태는 상관없다.
“좋습니다. 저는 태사께, 황자께서 정권을 잡는 대로 승인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씀드려보죠. 군사적 원조는 거리상 어렵겠고, 로마가 경제적 원조를 필요로 할 것 같지는 않고.”
각국에 외교적 압박을 가해 벨리사리오스의 정권을 지지한다. 무형의 도움 같지만 다른 어떤 유형의 도움 못지않다.
“그쪽에서 제안할 건 없나? 그냥 호의로 이렇게 응했을 리는 없고, 그냥 내 미래를 보고 그럴싸해서 투자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 점도 솔직히 말해두겠습니다. 현 단계에서 우리가 ‘동맹’이라고 칭하긴 하지만, 만약 황자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고려는 모른 척할 겁니다. 깨끗하게.”
“냉정하군.”
“제안할 건 이겁니다. 저에게 전하께서 지도하고 계시는 여러 단체의 ‘조직화’에 대해 알려주십시오. 앞으로 며칠밖에 체류하지 않겠지만, 그사이에 많은 걸 배워두고 싶군요. 아, 만약 군과도 연줄이 있다면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하시는지도.”
벨리사리오스는 폭소했다.
견하는 싱긋 웃는 얼굴로 그 폭소를 마주할 뿐이다.
“무슨 제안을 해올까 했더니, 감찰국장 자네의 야심을 충족할 셈이었군. 아, 그렇겠지. 아무래도 부족하겠지. 조직을 더욱 거대하게 키우고 싶다.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 그리하여 권력을 잡고 싶다. 그런데 보고 배울 교재가 부족하다…….”
폭소를 그친 벨리사리오스는 한결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로, 수락한다는 듯 끄덕였다.
“이 동맹은 나와 태사의 동맹이기도 하지만, 주견하 국장과 나의 동맹이기도 하군.”
견하 역시 웃는 얼굴을 유지하되, 다만 이렇게 답했다.
“전하의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