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떼의 아가리(4)
“……류성일이 안세규와 얼마나 손을 잡고 있었느냐에 따라 그 위험성이 달라져.”
“생각보다 그 둘 사이의 제휴가 오래되었을 수 있다?”
확실히, 그렇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고려의 국내 정세는, 해외 정세와 달리 서서히 안정되고 있다. 공통의 적이라는 이슈가 사라지니 정파를 초월해 단합했던 고려의 정치 판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차기 여당, 태사 자리 및 내각을 둘러싸고 경쟁이 시작된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리안은 그런 정치적 변화를 받아들이기로 이미 마음먹었다. 그러니 류성일과 안세규가 최근 손을 잡고 차기 태사 자리를 노린다 해도 큰 위협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얼마나 오래되었지?”
“정확하게는 짐도 몰라. 동명역 쿠데타를 전후했을 수도 있고, 타이시가 암살 위협을 받던 재작년 4월 이전일 수도 있고.”
“생각보다 오래됐군.”
동명역 쿠데타를 전후했다면 혹시 그 배후 세력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신수덕과 손을 잡았다? 한쪽은 내부에서, 다른 한쪽은 외부에서 현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아니, 그건 좀 말이 안 된다.
신수덕과 구 천손민족협회가 돌아오면 지금 정권뿐만 아니라 야당까지 다 죽는다. 류성일, 안세규가 얼마나 이해관계가 일치하든 신수덕과 손을 잡을 가능성은 없다.
다만…… 그때를 기점으로 뭔가 미리안 정권의 취약성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신수덕과 손은 안 잡더라도, 신수덕이라는 변수를 이용하는 것은 가능하니까.
“하지만 1929년 4월의 그날…… 이전이라면.”
“전에 해줬던 말 기억해? 제1대학교 총장실로 기습을 왔던 무리는,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다른 파벌이었다고.”
“그랬었지.”
“왜 하필이면 그들이 왔을지 생각해봤어?”
“글쎄…… 나는 분명히 나를 죽이려던 사람들은 허동주의 부하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거기까진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데.”
시치미 떼긴. 루우는 리안의 얼굴을 흘끔거린다.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게 아니라, 일부러 머리를 안 굴리고 있는 거겠지. 아니면 이미 결론까지 다 내려놓고 루우의 판단을 한 번 들어볼 작정이거나.
어쨌든 지난 내전은 ‘공식적으로는’ 허동주의 반역 시도에 미리안이 강경 대응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 ‘다른 의지’가 개입해 있다면, 리안의 입장은 상당히 난처해진다.
극단적으로 말해 지난 내전은 미리안 혼자 발광해 가만히 있던 허동주를 친 사건이 되고 만다.
“백부께서 점차 쇠약해지다가 끝내 돌아가신 게 허동주의 음모임은 확실해.”
“그런 명분을 내세우면 어쨌든 허동주 토멸의 정당성은 서지. 짐이 주살 칙령을 내렸을 때도 미승휴 태사의 살해를 죄목으로 내세웠고. 하지만 우리는 선대 태사 살해 문제를 다시 살펴봐야 해.”
“다시 살펴본다?”
“허동주 단독, 혹은 허동주 파벌만의 범죄는 아니지 않을까?”
그 말에 리안뿐만 아니라 효윤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떠올려보자.
미승휴가 막 쇠약해져 갈 무렵을.
그때 슬슬 후계자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지만, 리안은 그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5차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 때는 일개 외교관조차 은근히 리안을 무시할 정도였지 않은가.
“백부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나는 태사의 조카가 아니라 대충 부잣집 아가씨가 될 예정이었지.”
리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회상하지만, 효윤은 웃을 수가 없다.
리안과 루우의 말을 종합해보면,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모두가 백부를 죽이는 데 직간접적으로 관여되어 있다가, 내가 내전을 일으키자 입 싹 씻고 내 밑으로 들어온 건가.”
리안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린다.
역적들은 원로라는 이름으로, 또는 중역이라는 이름으로 현 정권에 남아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따지고 보면, 타이시가 친위혁명을 하기로 했던 건 잘한 일이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타이시는 어느새 잊히거나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겠지. 지금 고려의 정치판은 허동주냐 류성일이냐로 나뉘어 있었을 테고.”
“만약 류성일도 백부의 죽음에 관여했다면, 다른 여러 가지 일에도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아.”
리안이 그렇게 말하자, 지금까지 말이 없던 효윤이 입을 연다.
“선대 태사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류성일 장관은 허동주를 제거하려고 고려민국 임시정부와 손을 잡았던 걸까요?”
“류성일이 안세규와 손잡은 시점이 그 무렵이라면, 그렇겠지.”
“정면으로 허동주와 붙어서 정권을 잡을 순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다른 방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미승휴가 죽고 난 잠깐의 혼란기, 이때를 틈타 허동주의 기반을 흔들 방법은 몇 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라든가 공화정을 요구하는 여론을 확대한다든가,
매서운 단 한 번의 기습 쿠데타로 허동주의 목을 날려버린다든가.
“마치 김천열을 준비해두었다는 듯이 꺼내 들었지.”
루우가 중얼거린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것도 같다.
“류성일 장관은…… 자기가 정권을 잡으려다 안 되니까 언니를 내세우기로 한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본인이 직접 말하거나 우리가 제대로 캐보기 전에는 알 수 없어.”
류성일은 미승휴의 죽음에 얼마나 관여했을까. 깊게 관여했을 수도 있고, 허동주가 부리는 수작을 묵인하면서 기회를 엿보았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리안에게는 쓰디쓴 이야기다.
솔직히 백부의 옛 동지라는 이유로, 다소 의지하는 마음을 품긴 했었다. 백부를 대신할 든든한 어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냉정해지자.
의심할만한 정황이 나왔는데도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건 머저리다. 그 어떤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권력욕을 품을 수 있다.
권력을 놓고 벌이는 게임에서 선의나 호혜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설령 지금 이 추측이 모두 설레발에 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언제든 처형의 칼날을 내려칠 준비를 해둬야 한다.
“그래서, 폐하께선 류성일을 카라코룸 행정장관으로 보내 일단 안세규와 떨어뜨려 놓자는 거지?”
“류성일을 은근히 차기 태사로 생각하는 무리들과도 떨어뜨려 두는 거지. 그다음에 차근차근 캐보는 게 어때. 두 장관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 말이야.”
***
턱 위쪽 머리가 날아간 젊은 병사의 시체.
뇌는 흔적도 없고, 치아 몇 개도 없어졌다. 목구멍 안으로 이어진 혀만 축 늘어졌다.
그런 참혹한 시체들 주변으로, 그와 비슷한 시체가 수도 없이 많이 있다.
그 시체 중에는 젊은 병사의 살아생전 전우도 있고, 적도 있다.
전우들은 반란을 일으킨 ‘대륙해방군’들이고, 적은 아즈텍 정통 정부의 군대다.
젊은 병사의 시체가 꿈틀거린다.
늘어졌던 혓바닥이 물 밖에 나온 물고기마냥 파닥거리고, 팔다리는 금방이라도 관절을 부러뜨릴 듯 경련한다.
시체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터지고 찢겨나간 부분들 사이로, 하얀 촉수 같은 것들이 꿈틀대며 기어나온다.
그것은 점차 자라며, 인간의 신체 기관 비슷한 것으로 자라난다. 팔, 다리, 혹은 손가락이나 발가락 같은 것으로.
사람의 발톱이나 손톱 같은 것들, 눈알, 어금니, 코, 귀…… 점차 그런 것들이 선명해진다.
칸발리크 테러 때 나타났던 것과 비슷한, 파멸인과 군인의 시체가 결합한 괴물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현상은 젊은 병사의 시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와 함께 죽은 전우들의 시체 상당수에서 같은 일이 일어난다.
살아난, 혹은 활성화된 괴물들은 적을 향해 달려든다.
살아있는 ‘대륙해방군’은 미리 퇴각했고, 아즈텍 정부군은 ‘패퇴’한다고 생각했던 적들 뒤에서 전선을 정비 중이었다.
처음에는 놀라움의 고함이, 그다음엔 고통과 공포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 괴물들은 인간을 미묘하게 닮았기에 더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울음소리는 말을 더듬는 것 같고, 동작은 거미가 어색한 춤을 추는 것만 같다.
괴물들은 입, 혹은 입과 비슷한 흡입 가능한 모든 기관을 사용해 적을 물어뜯고, 잡아먹는다.
신체가 훼손되면 일단 무력해지는 인간과 달리, 이들은 신체가 어느 정도 남아있는 이상은 인간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아즈텍 정부군은 간신히 사기를 수습하고 보병을 뒤로 물린 후 박격포 등으로 대응하기 시작했지만, 그때는 이미 상당한 희생자를 낸 상황.
불행 중 다행으로 괴물은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녹아내렸지만, 아즈텍 정부군 병사들 사이에는 ‘옛 신화 속 사람을 잡아먹는 자들’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갔다.
***
대륙해방군의 또 다른 전선.
“이건 뭔데?”
병사 하나가 하얀 알약 같은 것을 들고 햇빛에 비춰 보며 묻는다.
“신형 각성제라던데. 야습을 나가야 할 수도 있고 적의 야습에 대비해야 하기도 하고…….”
“그럼 이거 완전 ‘오늘 야습 있어요’ 아니냐. 적의 첩보를 입수한 거든, 우리가 가는 거든.”
“그냥 야간 기동이길 바라자고.”
“이런 거 먹으면 사흘 밤낮으로 잠도 안 오지만 그 뒤로 한 달은 앓아눕는단 말이지…….”
투덜투덜하면서 병사들은 그 약간은 말랑거리는, 사탕 같기도 한 알약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게 자신들이 전사했을 때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지는 짐작하지도 못한 채.
그 약을 만들기 위해 신수덕과 ‘철혈의 꽃’이 어떤 실험을 반복해왔는지도 물론, 전선의 병사들은 모른다.
그저 전장의 하늘에 유난히, 유난히 먹구름이 많이 낀다는 느낌만을 받았을 뿐이다.
***
‘약’의 사용은 전선 전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갑이나 항공기에 비해 큰 성과를 내지는 않았다. ‘약’을 마구 사용했다간 승리, 전진한 대륙해방군 병사들이 뒤에 남은 전우들의 시체에 공격당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심리적인 효과, 즉 공포와 혼란을 일으켜 적 전선 일부를 와해한다는 점에서는 꽤 쓸모가 있었다.
대륙해방군의 병력 부족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과감한 돌격에는 많은 희생자가 나오기 마련이지만, 대륙해방군은 병사의 목숨을 두 번 활용할 수 있었으니까.
서남쪽에서 북동쪽으로, 대륙해방군은 전선을 밀어낸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대륙혁명군도 전선을 쑤셔댄다.
그리고 더욱 악몽같은 사태가 동쪽에서 일어났다.
동부 해안가, 옛 유럽인 식민주들이 일제히 봉기.
이른바 ‘자유주 독립군’의 깃발 아래 병력을 결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