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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85화 (285/541)

이리떼의 아가리(3)

“군사 개입은 불가합니다.”

강태훈이 딱 잘라 반대 의견을 내세웠다.

장해진 대장이 이끄는 키타이 파견군, 우흥섭 대장이 이끄는 낭키아스 파견군이 여전히 서쪽에 묶여 있다.

김천열이 행정장관으로 나가 있는 카라코룸에도 상당한 규모의 부대가 주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지역에 병력을 파견할 여유는 없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이다.

고려 내전 후 재건 사업.

대공황으로 타격을 입은 경제 활성화 정책.

몽골 내전 피해 지원.

이 모든 것에는 돈이 들어간다. 내전 후 경기 부양에 총력을 다하고 있는 고려는, 군사 분야에 들어가는 비용을 꽤 줄여야만 했다.

그렇기에 카라코룸 진격이라든가 키타이, 낭키아스 파병은 상당히 무리한 구석이 많은 결정이었다.

“외교적 부담 역시 적지 않다고 봅니다.”

안세규가 덧붙인다. 그 말에는 리안도 동의했다.

“당장 일본부터가 아즈텍의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해상방위동맹’ 결성에 박차를 가했죠. 여기서 괜히 일본을 자극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려가 아즈텍 대륙에 군사 개입을 한다.

일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면 일본공화국으로서는 동쪽과 서쪽에 양면 전선이 형성되는 기분이 들 것이다.

과민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면 협력해도 모자랄 판에 일본공화국과 서로 신경전이나 주고받느라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겠지.

“언젠가는 ‘해상방위동맹’인지 뭔지 건방진 시도의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차라리 일본이 우리 대신 아즈텍 문제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도록 뒤에서 힘을 실어주는 게 나을 겁니다.”

다들 리안의 말에 동조하는 분위기다. 별다른 이의제기는 없다.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다이온’ 문제에 있어서 진척을 볼지도 모르죠.”

일본의 신경이 아즈텍 쪽으로 곤두선 이때 일본을 지원해주면서, 은근슬쩍 다이온 문제나 한족 반란 진압 문제를 눈감아 달라고 요구해볼 수 있다.

“다이온이라…….”

안세규가 썩 마뜩잖은 듯 말꼬리를 흐린다. 리안도 세규가 염려하는 바는 안다.

다이온 연방까지 가는 길을 막을 순 없겠지만, 그 과정에서 고려의 독립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계속 신경 써야 한다.

물론 그건 일단 ‘다이온’이 수립된 뒤의 일이고, 당장은 아즈텍 문제와 연계된 여러 사안에 대처해야겠지만.

“평화회의에 보낸 대표단의 보고에 따르면, 유럽 열강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는군요.”

“입으로는 지원을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할까…… 계산들을 굴리고 있다죠.”

“괘씸하긴 해도 마냥 열강들만 탓할 일은 아닙니다. 당장 아즈텍 내전 소식은 심각한 경제 지표로 눈에 보이고 있으니까요.”

지금 이렇게 회의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리안은 왼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굳은 얼굴로 보고를 들었다.

각종 도표며 자료가 각료들의 책상을 바쁘게 뒤덮는다. 전문가 혹은 자문위원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분석과 견해를 발표하고 질문을 받는다.

한참 만에 리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평화회의 대표단이 했던 말과 같은 말이었다.

“결국 전 세계가 각자도생을 택하는가.”

“……일단 겉치레나마 아즈텍을 도와 세계정세를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노력들은 하겠지요. 하지만, 노력이 수포가 되었을 때도 대비해야 할 겁니다.”

류성일의 의견이었다. 그 말은 타당했다. 결국 아즈텍 정통 정부가 스스로 일어서지 못해, 세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혼돈에 빠질 때가 온다면 어쩌겠는가.

열심히 아즈텍을 돕느라 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울며불며 호소할 것인가.

연민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만 그뿐이다. 그때가 되면 아즈텍 사태의 여파로 함께 무너지는 국가를 구할 나라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들 각자의 욕심 때문에, 혹은 조금이라도 더 버틸 힘을 얻기 위해 이리떼처럼 달려들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국제 정세는 각 국가가 냉혹하다고 해서 냉혹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냉혹할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냉혹해지는 법이지요.”

나 홀로 멍청하게 규칙을 지키고 있다가 당할 순 없다.

결국 어떤 강국도 ‘경찰’이 되길 거부한 결과…… 그 대가가 이렇게 돌아오고 만 것이다.

“우리도……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해야겠군요.”

“예. 그 방법은 역시 아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다이온 연방의 성립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요.”

리안은 별다른 의견을 말하지 않는 안세규의 얼굴을 흘끗 바라봤다.

그는 체념한 건지 무심한 얼굴로 자료들을 훑어보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있다.

-다이온 성립이라는 흐름 자체는 막을 수가 없으니까.

“이왕 다이온 성립에 박차를 가하신다면, 온 열강의 신경이 아즈텍에 몰린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게 양해를 구하듯이 말이죠.”

“예. 별다른 이의제기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설령 이 문제에 할 말이 있어도 아즈텍 사태가 진정되기 전까지는 말을 아끼겠지요.”

그럴 수밖에. 상식이 있는 정치가, 군략가라면 이중전선을 만들지 않는다. 아즈텍 내란이라는 혼란을 앞두고 다른 곳으로 전력을 분산시키지 않는다.

다이온 연방 설립은, 열강의 ‘묵인’ 아래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열강 역시 고려가 다이온에 정신이 팔린 사이 자신들의 행동을 ‘묵인’해주길 바라겠지.

마찬가지 원리로, 이번에 국제무대에 복귀한 바라트와의 평화는 꽤 오래 지속될 것 같다.

“조유관 장관과 차무룡 장관이 귀국하면 본격적인 연방 창설을 논의해보죠. 몽골의 볼로드 태사 및 게레센제 카간과……”

차근차근 방침을 하달하는 리안의 뒤로, 효윤이 다가왔다.

몸을 낮춰 귓가에 속삭인다.

“폐하께서, 잠시.”

리안은 심드렁한 표정을 유지하며 각료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오늘 회의는 이 정도로 하죠. 장관들께서는 논의된 사항들에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

어떤 궁궐이든, 비밀스러운 공간이 많다.

동명의 황궁도 마찬가지였다.

리안의 태사부와 루우의 침소인 세린전을 잇는 이 복도도 그러하다.

반쯤은 산책로인 듯, 반쯤은 지하도인 듯 각종 시설물에 교묘하게 가려진 이 길쭉한 복도 한켠으로, 아는 사람만 아는 응접실이 있다.

황제와 태사는 여기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의 내용은 늘 중요한 사안에 관련된 것으로, 여기서 황제와 태사는 어느 정도 합의를 본다.

의견 불일치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대립각을 세울 수는 없으니까.

황제에게 태사를 즉각 해임할 권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황제가 태사의 정책을 지지해주지 않는다면 태사는 큰 타격을 입는다. 국민도 태사를 불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제 막 자신의 황실을 세우기 시작한 루우 역시 리안의 권력이 불안정해지면 좋지 않다. 어쨌든 리안과 제국입헌당은 루우의 친위세력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어떻게 보면 기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나 다당제의 원칙을 따르는 듯 보여도, 중요한 일들은 이처럼 황제나 태사, 여러 장관이나 의원, 장군들 같은 요인들의 물밑 협상으로 미리 각본을 정해두니까.

물론, 끝내 각본에서 합의를 보지 못하고 대립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겉으로는 적절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여하튼 오늘 이 시각에도 황제와 태사는 ‘아즈텍 문제’의 대처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급하고 은밀한 회담이었기에 차나 과자는 없다. 예의를 차리지도 않아서 두 사람 모두 앉거나 서성이길 반복한다.

효윤도 의자에 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

“카라코룸 행정장관으로 나가 있는 김천열 장군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게 어떨까.”

루우의 제안은 갑작스러웠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리안은 그저 눈만 깜박였다.

루우는 리안이 자신의 제안에 대답할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며 기다리기만 했다.

태사는 잠깐 틈을 두고 적절한 대답을 찾아냈다.

“무슨 이유로……?”

“긴급사태를 맞아, 본토의 방위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불러와야 한다고 생각해.”

“별로 그럴싸한 이유는 아닌데.”

엉뚱하기까지 한 이유다. 고려가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로 군을 파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본토의 방위력이 심각하게 저하된 수준까진 아니다.

그저 어딘가에 추가 개입할 여유가 없을 뿐이지, 고려의 군사력은 여전히 강하다.

김천열 말고도 본토를 수호할 장성은 얼마든지 있고, 방위 체제도 굳건하다.

루우가 이러한 사정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니 루우가 들이댄 구실은 진심으로 한 이야기는 아닐 터.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김천열조차 루우가 화제 삼고 싶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김천열 대장을 본국으로 들어오라 하면, 카라코룸 행정장관 자리는 비게 될 텐데.”

루우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카라코룸’이 아닐까.

리안의 추측은 살짝 빗나갔다.

“그 빈 자리에는 류성일 법무장관을 보내자.”

아하. 핵심은 그쪽인가.

“……‘류성일’이어야할 이유가 있는 거야?”

루우는 입을 다문다.

황제와 태사는 친구이자 정치적으로 동지다.

그러나 동시에 미묘한 경쟁 관계에 있다.

따라서 루우 입장에서는 고려 각 정당의 세력균형이 필요하다.

그녀가 황제로 있기 위해서.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아마도 그 때문에 태사와 ‘공유하지 않는’ 정보를 늘 일정 분량 확보해두려는 거겠지.

리안은 그렇게 추정하고 있었다.

루우는 꽤 망설인 끝에 말했다.

“……류성일은 안세규와 위험한 협력을 하고 있어.”

리안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법무장관에게 아예 야심이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내무장관과는 동맹을 맺은 건가?”

“동맹이라고 할 정도의 관계는 아닌 것 같아. 그렇다면 맹우를 돕기 위해 다소간 손해를 보는 행동도 하겠지만…… 둘은 절대로 손해는 안 보려고 하지.”

“어디까지나 이익만을 위해 협력하는 관계라는 건가…… 법무장관이 순수한 학자이기만 할 거라곤 생각하진 않았지만.”

안세규와 손을 잡았다면, 다소 경계할 필요는 있다.

“역시 차기 태사 자리를 노리는 건가?”

“그렇지 않을까 싶긴 한데.”

“그래서, 황제께선 류성일과 안세규를 분리시키기 위해 김천열을 여기로 부르고 류성일을 카라코룸으로 내쫓겠다는 말씀이신가?”

“그래.”

리안은 눈을 가늘게 뜬다.

아니다.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뭔가 더 있지?”

황제 입장에서는 태사가 적당한 견제를 받는 쪽이 좋다. 그래야 황제와 태사의 상호 의존, 균형 관계가 유지된다.

루우는 전제군주제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제가 완전히 상징적인 존재로 물러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상징적 권위와 실질적 영향력, 그 어느 쪽도 버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루우는 리안의 존재를 필요로 하면서도, 리안이 완전히 황제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류성일과 안세규의 제휴를 사전에 찍어누르는 것은 그러한 견제 방침과 맞지 않는다.

루우는 한숨을 조금 내쉰다.

리안은 그런 그녀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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