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떼의 아가리(2)
먹을 것을 살 돈도 없는데 신문을 살 돈이 있을 리 없다.
먹을 것을 살 돈도 없는데 라디오를 유지할 이유가 없다.
그 틈을, ‘무료’로 제공되는 값싼 읽을거리가 파고들었다.
그 읽을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그 ‘방향’을 알려 주었다. 가난한 이들은 팸플릿 따위가 떠드는 말에서 그럴싸한 ‘이론’을 읽었고, 그걸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선동 구호는 그런 그들이 무척 지혜롭다고 칭찬해주었다.
직업을 잃고, 혹은 막 사회로 나와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느낀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다.
선동가들은 그들에게 ‘무언가 할 일’을 주었다.
처음에는 구호도, 운동도 단순했다.
-이 상황에서도 부자들은 매일 연회를 벌인다.
-여러분의 돈을 빨아먹으며, 이 대공황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이런 구호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신수덕은 여기에 살짝, 다른 아이디어를 얹었다.
그렇다면 그 부자들, 자본가들은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제시했다.
기존의 ‘아즈텍인’들에게, ‘동부 유럽계’가 연방의 자본을 꽉 쥐고 있다고 선동한다.
전쟁에서 패배한 침략자들의 후손 주제에, 연방의 자유와 평등을 침해하며 경제를 좀 먹고 있다고.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냐고.
사회의 모순 아니냐고.
‘자본가’라는 말보다 피부색과 언어와 문화가 다른 ‘유럽인’이라는 구분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쉬웠다. 전자는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후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체니까.
선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떨 때는 그 ‘유럽계’가 유럽 국가들의 사주를 받아 아즈텍 연방을 위협한다는 말도 했다.
또 어떨 때는 유럽계가 주축이 되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연방 정부를 잠식해 들어간다는 말도 했다.
지금 이 대공황은 ‘아즈텍인’의 경제기반을 완전히 붕괴시켜 주도권을 넘겨받기 위한 공작이라고도 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근거도 빈약하고, 선동 구호들끼리도 모순되는 어설픈 음모론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지치고 절망한 사람들에게, ‘명확한 증오의 대상’을 일깨워주는 말들은 그 자체로 희망이 된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
그 나라는 부자 유럽인들의 탐욕에 물들지 않은,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일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자유와 평등을 파괴하는 길을 걸어가면서,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을 바랐다.
이런 절망적인 희망이 민중들뿐만 아니라, 군에도 스며들었다.
연방을 구성하는 모든 민족이 함께 나라를 지킨다는 이상.
그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아즈텍군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민족 갈등이 경제적, 사회적 갈등과 일치점을 보인 것처럼,
그대로 군부대 간 갈등으로 이어졌다.
여기, 미시시피강 하구의 어떤 전장.
한 병사도 그런 갈등의 산증인이었다.
젊은 군인. 어쩌면 ‘어린’ 군인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가정이 있었다. 봉급 일부를 꼬박꼬박 집으로 보내는, 가족의 성실한 기둥이었다.
대공황 이전에는 그의 봉급 일부와 아버지, 어머니가 버는 돈으로 동생들의 학비를 댈 수 있었다. 그러나 대공황 이후 부모님 모두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병사는 집에 보내는 돈을 늘렸지만, 그의 봉급으로는 결국 한계가 있었다.
사회 자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 그의 가족은 굶어야 했다.
동생들은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러니 맏형은,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소박한 꿈을 품고 ‘대륙해방군’으로 들어갈 수밖에.
봉기에 동조하지 않는 전우들을 죽였을 때의 충격은 컸지만, ‘그 새끼들은 유럽 부자들의 하수인이었어’라고 몇 번 되뇌자 차분해졌다.
“사연 없는 놈이 어디 있냐, 요즘 세상에.”
귀중한 담배를 끝까지 빨아낸 동료가 그런 말을 한다. 병사는 말없이 끄덕였다. 다들 그래서 들어온 것이다.
포격이 시작된다.
언제 들어도 뼈가 얼어붙는 듯한 소리지만, 병사는 몸을 일으켰다.
가족을 위해.
자유롭고 평등한 새 조국을 위해.
그러나 그의 용감한 한 걸음이 아즈텍의 자유와 평등을 산산조각 냈듯,
날아온 총탄이 그의 머리를 산산조각 냈다.
***
동명에서는 조유관과 차무룡에게, 평화회의 과정을 보다 상세히, 지속적으로 보고할 것을 요구했다.
그 명령대로 두 장관은 며칠째 열심히 회의에 참여 중이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 그 누가 회의에 소홀하겠는가.
시시각각 변해가는 아즈텍의 상황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각국의 반응에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일본공화국은…… 안도하는 것 같군요.”
조유관이 속삭이자, 차무룡은 비웃듯 답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즈텍의 상황이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하리라는 보장은 없는데 말이죠.”
“장기적인 정세보다는, 당장 눈앞의 이익을 취할 생각에 부풀어 있는 것 같습니다.”
“본국에 ‘성과’랍시고 자랑할 거리를 들고 갈 생각에 신났을지도 모르죠. 아니면 본국의 방침 자체가 저런 걸지도 모르고.”
일본을 중심으로, 아이누, 류큐, 다리다가 참여하는 해상방위동맹.
그 결성에 대한 이야기를 ‘아즈텍 문제에 대한 일본의 대응’이랍시고 꺼냈는데, 다들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다.
아즈텍 내전보다 중요한 사안도 아닐뿐더러, 어떻게 튈지 모르는 아즈텍의 상황에 대처하겠다는데 막을 명분도 없다.
고려도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동명에서는 해상방위동맹이 노골적으로 베트남이나 마자파히트, 에스파냐와 손잡으려 들지 않는 이상 내버려 두라고 하지만……”
언젠가는 골치 아픈 요소가 될 것이다, 조유관은 그렇게 내다보았다.
그러면서 슬쩍, 차무룡의 눈치를 본다.
차무룡은 아즈텍 내전 이후 부쩍 냉소가 늘었다.
아마도 대공황의 해결과는 더욱 멀어진 세계정세에 짜증이 난 거겠지. 이해는 한다.
하지만 ‘이제 그냥 망할 놈들은 망해버려라’는 태도는 좀 거둬줬으면 좋겠는데.
“일본도 우리 눈치를 보는지 선은 지킬 모양인 것 같군요.”
“일본이야 태평양이라는 해자가 있으니까요. 그보다, 보십시오, 조 장관. 유럽인들 떠드는 광경 말입니다.”
조유관은 미간을 찌푸렸다. 차무룡의 냉소도 냉소지만, 유럽 열강들이 떠드는 꼬락서니도 참 볼썽사나운 것이었다.
시작은 칼마르.
“평화회의가 아즈텍의 현 정권을 정통 정부로 지지함은 변하지 않을 테지만, 솔직히 내전의 향방이 어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우리는 가까이에 그린란드라는 영토를 두고 있는데, 이 지역의 방어를 다소 강화한다 해도 문제 될 건 없겠지요?”
그 말을 브리튼 측에서 받는다.
“긴밀한 동맹인 칼마르의 안보 문제라면, 우리도 협력하지 않을 순 없지요. 아니, 에스파냐 측에서도 함께 대서양 안보 문제를 논의했으면 합니다만.”
그들의 말을 듣고만 있던 아즈텍 측에서, 묻는다.
“대서양의 안보는 아즈텍 대륙의 안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대서양의 안보를 우려하신다면, 아즈텍 대륙의 안정을 위해 유럽의 군사적 지원도 바랄 수 있는 것입니까?”
“구호물자 지원, 경제분야 협력은 지금 즉시 보장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무력 개입에 대해서는 뭐라 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아시다시피…… 민주주의 국가잖습니까?”
그렇다. 민주주의 체제는 저러하다.
어떤 나라를 전쟁의 광기로 몰고 가는 것도 국민의 뜻이지만,
맞서 싸워야 할 때 물러서게 만드는 것도 국민의 뜻이다.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부담을 질 정치가는 많지 않다.
혹은 ‘국민의 뜻’을 핑계 삼아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지.
조유관의 귓가에 차무룡이 속삭인다.
“신성 제국과 로마 제국은 아예 침묵을 지키고 있군요.”
“으음…….”
아즈텍이 세계 경제에 책임을 질 생각이 없다고 실컷 비난해 온 주제에, 저 육중한 두 제국도 책임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유럽인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옛 식민지라도 되찾을 생각인 걸까요?”
조유관은 그 말에 꽤 놀랐다. 고개를 홱 돌려 차무룡을 바라본다.
“설마요. 안정을 위해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도 부족할 판에?”
대서양 전쟁에서의 설욕을 바란다기엔 너무 옛날 일이다.
“안정을 바란다면 지금이라도 적극 내전에 개입해서 반란군을 분쇄하는 게 옳습니다. 이 혼란을 빨리 끝내면 끝낼수록, 대공황의 극복도 가까워지겠죠. 하지만 무력 개입을 꺼린다면……”
혼란은, 지속된다.
차무룡은 그 말은 삼켰지만, 굳이 삼킬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확한 사실이었다.
“혼란을 수습할 용기는 없다. 그러나 어쨌든 혼란은 지속되고, 그 속에서 살아남고는 싶다. 그렇다면…… 각 국가가 택할 방법은 많지 않습니다.”
“……각자도생.”
협력은 단절되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국가끼리 뭉쳐서 각자 살길을 찾는다.
지금 고려를 비롯한 4개국 관세동맹이 그러하듯이.
일본이 추진하는 해상방위동맹도 그 일환이다.
브리튼을 중심으로 한 대서양 동맹은 말할 것도 없다.
신성 제국은 에이레, 프로이센, 보헤미아와 협력을 강화할 테고, 로마 제국은 동유럽의 정교회권을 더욱 끈끈한 덩어리로 묶으려 들겠지.
공산권의 우두머리인 바라트도 마찬가지다.
열강들은 거대해지고, 세계는 거대한 덩어리들로 더욱 뚜렷이 분단된다.
“패권 갈등이 일어나기 너무 딱 좋은 구도군.”
“경제적 안정도 멀어지고, 평화도 멀어지는 거죠.”
각자도생의 길로 나아가게 되면, 타국을 죽여서라도 자국이 살아남자는 유혹에 간단히 빠져들 수 있다.
아즈텍 대륙에 다시 식민지를 펼치진 않더라도, 몇몇 독립 정부들이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유럽 열강에겐 하나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자기네 영향권으로 끌어들여, 실컷 경제적 이익을 빨아먹는 것이다.
어떤 결과로 이어지든, 경쟁 관계에 놓인 강대국의 파멸을 무작정 기뻐하고 보는 머저리들이 세상엔 가득하다.
“그건 세상에 전혀 좋은 게 아닙니다. 대공황은 극복되는 게 아니라, 그냥…… 피범벅으로 만들어서 덮어둘 뿐인 것 아닙니까? 그런 식이라면 유럽이, 자유세계가 자랑하는 민주주의도……”
“파멸하겠죠. 세계를 단순히 힘의 강약 관계로만 파악하는 인간들이, 세계를 파멸로 몰아갈 겁니다.”
차무룡은 그렇게 말을 툭 던져놓고는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한참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연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보다 국내 문제에 더 신경 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국내 문제라면……?”
“세계가 각자도생의 길을 걷는다면, 우리도 4개국 관세동맹을 비롯해 각종 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쪽에서 답을 찾겠죠. 그리고 그것은……”
다이온 연방 성립의 가속화.
일단은 고려를 제외한 몽골 본국과 키타이, 낭키아스가 참여하지만, 고려에서는 고려까지 참여하는 것을 다이온 연방의 최종 완성이라고 본다.
즉, 황제 왕서라, 루우 테무르께서 카간 자리에 오르시는 것을.
그 방향으로 가속한다면, 고려와 몽골을 둘러싼 정세 역시 마구 요동칠 것이다.
조유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본국에 ‘아즈텍 내전에 개입할 뜻은 없는지’부터 물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