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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82화 (282/541)

도시들의 여제(18)

“죄송하지만, 한어를 몰라서.”

반쯤은 진심이다. 견하는 한어를 모른다.

하지만 저들이 여기 나와 있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젊은 친구가 내숭이 심하군.”

“짐작은 합니다만 짐작만으로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서.”

“하긴 자네는 자네 조국의 입장을 대변해야겠지.”

알렉시오스는 시위대가 외치는 구호를 읊어주기 시작했다.

“‘학살당하는 한족을 외면하지 말라’, ‘우리 민족에게도 주권을 달라’, ‘언제까지 우리가 타민족의 지배 아래 신음해야 하는가’, ‘부모 세대의 잘못이 자식 세대에도 대물림되어야 하는가’.”

견하는 한재연과 양수영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라면 여기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범죄 민족이 뻔뻔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범죄 민족은 영구히 고통받아야 한다며,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하지 않았을까.

“세계대전 당시 고려와 몽골, 동아시아 각국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자들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때 청년, 장년이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장년, 노년으로 한족 사회의 주축이 되어 있죠.”

견하는 한족에 대한 차별의식은 별로 없었지만, 고려와 다이온을 위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들이 독립 국가를 이룬다는 건, 그들이 세계대전에서 저지른 일들이 옳았다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고려인이든 몽골인이든,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겠죠.”

알렉시오스는 흐음, 하며 길게 목을 울렸다.

“잠깐 함께 걷지 않겠나.”

견하는 알렉시오스를 따라 다시 황궁 부지를 걷기 시작했다.

“그게 고려 측의 입장이고, 자네가 그걸 부정하기 어려운 처지라는 건 아네. 나 또한 그러니까. 세계경제를 구하려면 이러저러한 일들을 해야 한다, 어디서 경제를 복구하고 또 어디서는 손해를 보더라도 필요한 사업을 해야 한다…… 그런 말들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지.”

“하지만, 입 밖으로 내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견하가 아무리 태사와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 해도, 고려의 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말은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견하 역시 고려라는 시스템의 구성원이다.

“맞는 말일세. 그래서 저 회의장 안에서도 강하게 말하지 못하고, 심사가 뒤틀리면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올 뿐.”

알렉시오스는 뭔가 고민하는 것 같다. 견하는 그런 그를 지켜보다가 한마디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입을 열었다.

“지금 하시는 말씀은 제 가슴 속에만 묻어두겠습니다.”

“……으음. 이건 로마인으로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학자로서 하는 이야기일세. 정치와 외교의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경제를 조금 배웠을 뿐인 사람으로서 말이야.”

견하는 끄덕였다.

“나는, 지난 세계대전이 ‘제국의 해체’라는 인류 역사의 한 단계가 돼야 했다고 생각하네.”

“제국의 해체라고 하시면……”

“신 이슬람 제국은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령으로 쪼개졌지. 쪼개진 것 자체는 좋아. 하지만 우리 로마는 그 영토를 집어삼키면서 지나치게 비대해졌네. 바라트도 마찬가지고. 제국주의에 반대한다지만 그자들이 세운 것도 ‘공산제국’이지.”

신랄한 비판이었다. 알렉시오스의 비판은 바라트뿐만 아니라 조국인 로마에도 쏟아졌다.

“내가 뭐 민족자결주의를 신봉하는 인간은 아니지만, 그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이 상당히 유용하다고는 보고 있네. 거대한 식민지의 유지는 비용 낭비일 뿐이야. 국민 전체에 자긍심이라는 최면을 거는 허세지.”

그 모든 군비 경쟁, 그 모든 갈등은 인류의 자원을 끊임없이 소모한다.

“차라리 민족별로 독립 국가를 형성할 수 있게끔 하고, 그들이 적절한 규모의 경제를 키워 기존 제국들과 자유롭고도 공평한 교역을 할 수 있게끔 해야 하네. 그런데 이전 세기엔, 일단 ‘공평’이 무너져버렸어. 공평이 무너진 자리에 함께 넘어진 국가들은 ‘주권’을 잃어버렸지.”

태평천국과 신 이슬람 제국이 비판받아야 할 부분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면 브리튼이나 신성 제국, 에스파냐도 그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순 없네. 어떤 머저리들은 대체 왜 식민지로 전락한 국가들의 책임을 강국이 져야 하냐고 하지만…… 책임을 져야만 하네. 누군가가 책임지지 않는 화폐는 폐지일 뿐이야. 마찬가지로 강국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강국 자신이 무너지게 되네.”

자유 무역, 자유 시장은 단기적 이익에만 눈이 먼 사기꾼들이 활개치라고 만든 자리가 아닌 것을…… 이라며 알렉시오스는 다시 한번 혀를 찼다.

“옳은 말씀이라고는 생각합니다. 그게 ‘경제’의 관점에서 봤을 때 가장 이상적인 세계의 형태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현 가능하겠습니까?”

“실현 가능성이나 묻고 있으면 세상이 그걸 억지로 실현해주는 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라네, 젊은 친구. 그렇게 억지로 실현된 일들은 꽤 불쾌한 형상을 띠기 마련이지. 세계대전이 그렇지 않았나?”

태평천국, 신 이슬람 제국이 다른 나라들과 평화적 공존 체제를 만들지 않는다면, 다른 나들이 그들의 팽창 정책을 저지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세계대전’이라는 불길로 응답한다.

“나는 지금이라도 제국들이 덩치를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네. 아즈텍이든 신성 제국이든 브리튼이든…… 우리 로마나 바라트도 마찬가지야. 이대로라면 세계는 남아있는 제국들마저 강제 철거하는 방향으로 굴러갈 걸세.”

아마 그건,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겠지.

알렉시오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금 얼굴 근육을 비틀었다.

쓰게 웃는 것 같았다.

***

알렉시오스가 불길한 예언을 하는 그 시각.

예언자가 시간이 촉박하다고 말할 때, 비극은 코앞까지 다가오기 마련이다.

테노치티틀란과 타카마가하라를 중심으로, 아즈텍 연방의 서부와 남부에서 봉기의 불길이 타올랐다.

‘철혈의 꽃’에 충성하는 군대. 자칭 ‘대륙해방군’이라는 그 무리는, 정체불명의 신무기를 앞세워 광대한 전선을 마구 휘저으며 북쪽으로, 동쪽으로 진격했다.

“이 진격 속도라면 쿠아우테목 함락은 몇 주 정도면 충분하겠군.”

반란 소식을 대문짝만하게 찍어낸 신문을 접으며, 한 고려인이 중얼거린다.

그 고려인은 연방 동부의 한 항구에서 여객선에 올랐다.

“민중의 선동, 지원병의 조직화, 값싼 무기의 대량 생산, 거기에 더해 열화판이긴 하지만 기갑사의 생산 기술도 전수했지. 내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조건은 모두 갖추었다.”

신수덕은 자신을 따라온 부하에게 ‘콘스탄티누폴리에 연락을 넣으라’고 말했다.

거기서 자신을 초청한 벨리사리오스라는 황자와, 오랜 인연이 있는 토칸을 만나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차차 ‘귀국 계획’을 진행할 것이다.

“하나가 일어나면, 다른 것들도 일어나기 마련이지. 여기서 시간을 끌고 있을 순 없어. 아즈텍 동부까지 전쟁의 불길이 미치는 건 순식간이다.”

한 표정에 비웃음과 만족을 동시에 담으며, 이 이방인은 유럽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

아즈텍 북서부와 오대호 일대의 공산주의자들은 당황했다.

이들도 아즈텍 내부에 분란을 일으켜오긴 했지만, 이토록 갑작스럽게 내전이 터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몽골의 범좌익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도 꽤 오래 격론을 벌였다.

그 결과 ‘대륙해방군’에 맞서는 한편, 그들보다 먼저 쿠아우테목에 입성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행동에 들어갔다.

‘대륙혁명전선’이라 이름을 내세운 이 집단은 한편으로는 ‘해방군’과 맞서면서, 역시 온 힘을 기울여 아즈텍 정통 정부에 대한 공세에 들어갔다.

신수덕이 떠나자마자, 동부 역시 혼란에 휩싸였다.

대서양 전쟁 이후 아즈텍 연방에 정복되었던 동부 지역은 ‘유럽인’으로서의 정체성, 그 정체성을 누릴 자유를 부르짖으며 독립 투쟁에 나섰다.

그들의 정체성은 따지고 보면 브리튼계, 에이레계, 예스파냐계 등으로 다양했지만, 어쨌든 ‘유럽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자신들을 묶어내고야 말았다.

이른바 ‘정통 원주민’들의 크고 작은 차별이 조금씩 형성해 낸 정체성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철혈의 꽃도 이러한 정체성 형성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아즈텍 정통 민주 정권을 무너뜨린다는 공동의 목표 앞에, 일단은 협력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정통 정부가 무너지면 곧바로 이들 사이에도 대륙의 완전 정복을 두고 내전이 이어지겠지만.

***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발언할 기회는 충분히 있었는데.”

잠잠한 아즈텍 측 대표단을 보며, 조유관과 차무룡은 그렇게 속삭였다.

그저 ‘대양 건너편 일은 우리 관심사가 아니다’라는 태도였다면, 그들도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즈텍 측 대표단의 태도는 무관심이 아니었다.

도저히 관심을 쏟을 수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까부터 저쪽 보좌관들이 바빠 보입니다.”

“계속 들락날락하고 있는데…… 뭔 이야기들을 저렇게 속삭이는지.”

안 좋은 소식임에는 분명했다.

조유관은 몇 가지 불길한 예상들을 떠올렸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내쫓았다.

그것은 현실성 여부를 따진 게 아니라, 조유관의 희망 사항에 따른 사고였다.

그렇기에 현실은 조유관의 희망 사항을 배신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갑자기 아즈텍 측 대표가 회의장 내에 오가던 모든 말을 끊고, 발언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쭉 별다른 말이 없던 아즈텍 대표의 목소리였기에, 모두가 순순히 대화를 중단하고 아즈텍 쪽에 집중했다.

아즈텍 대표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우리는 옛 동맹, 여러 우방국의 도움을 청합니다. 우리의 조국 아즈텍 연방이, 내전이라는 크나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대공황이 몰고 온 절망을 극단주의자들이 파고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부는 군사적 원조, 경제적 원조를 비롯한 다방면의 도움을 바랍니다.”

세계 최강국…… 이라고 자부하던 아즈텍이 솔직하게 자기네 처지를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경악스럽지만, 그 의미를 되짚어보면 더욱 경악스럽다.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차무룡은 욕설을 뱉으며 서류를 팽개치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억눌렀다.

세계 경제의 회복 방안에 대해 아무리 고민한들 무슨 소용인가! 매번 이렇게 난리가 나는데!

세계 경제는 이제 수십 년간 끝 모를 구렁텅이로 빠져들 것이다.

아직 정식으로 탄생하진 않았지만, ‘다이온 연방’ 혼자라도 살아남는 방법을 궁리하는 게 낫겠지.

바라트 연방 쪽에서 가장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다. 그들은 아즈텍 내전에 하나의 축으로 참여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논의 중이다.

회의장을 나가버리면 아즈텍의 처지를 외면하겠다는 듯이 비칠 수 있기에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

의장 국가인 로마 측 대표가 간신히 먼저 동요를 억눌렀다.

“지금까지 이루어졌던 모든 논의는 잠시 훗날로 미뤄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당장 눈앞에 닥친 거대한 위기, 아즈텍 연방의 내전에 대한 대책만을 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우방을 도울 방안을, 모든 지혜를 짜내 생각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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