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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81화 (281/541)

도시들의 여제(17)

로마 측 대표의 말은 ‘옳다’.

칸발리크 전체를 뒤덮는 테러는 여기 콘스탄티누폴리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신성 제국의 수도 엑스라샤펠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런던이나 쿠아우테목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로마 측 대표는 그 공포를 이용해, 화제를 세계 각국의 군사 안보로 돌렸다.

물론 ‘겉으로는’ 테러에 대비해 정보를 공유하자는 뜻을 내비치고 있지만, 속내는 조금 다르다.

당신네들이 그런 위험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면, 우리도 그걸 좀 알아야겠다. 그래서 우리의 군사력도 증강해야겠다.

이 자리에서 순순히 그 기술을 넘겨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략 어떤 기술이고, 어떤 방향을 잡아 개발해왔다는 단서만 잡을 수 있어도 큰 수확이다.

그러고 나면 첩보의 영역에서 기술을 빼 오든, 자체적으로 연구하든 돈과 시간과 사람을 들이는 일만 남을 뿐이다.

하지만 제6차 평화회의의 취지는 국가 간 군비 경쟁이 아니다. 브리튼 측에서도 칸발리크 테러와 거기에 쓰인 기술에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중재해야 한다고 느꼈다.

조심스레 몽골과 로마의 입씨름에 끼어든다.

“어쨌든 칸발리크는 현재 평화를 되찾았고, 몽골의 내전도 무사히 마무리되었죠? 테러에 대한 대응은 차차 몽골 대표단에서 정리해 발표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여기 모인 이유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성 제국에서도 한마디 거든다.

“맞습니다. 대공황. 이 고통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 어떤 경제 정책을 취하며 국가 간 정책들 사이에는 어떤 공조가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그것을 우선 논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앞서 몽골 측에서 4개국 관세동맹을 언급해 주셨는데,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고려 측에서도 정책 방향에 대한 설명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바라트가 구체적으로 세계 경제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그 이야기도 들어봅시다.”

그렇게 평화회의는 소모적인 입씨름을 간신히 물리치고,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한걸음을 내디딘 듯 보였다.

***

회의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한 방이 있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 알 수 없는 방이었다. 회의장 위쪽, 벽의 굴곡부에 교묘하게 배치된 그 방에는 벨리사리오스 황자와 토칸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느긋하게, 마치 음악이라도 감상하듯 회의장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방 안에 설치된 기계는 또렷하게 각국 대표의 목소리를 전해주었다.

“아무래도 몽골은 더 자세한 이야기를 공유할 생각은 없나 보군.”

“공유할 이야기가 없다, 는 쪽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네들……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어떻게 칸발리크를 지옥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들도 독자적으로 쌓아 올린 연구가 있는 만큼, 짐작 정도는 할 것입니다. 허나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그들 자신이 그런 기술을 어떻게 손에 넣을지…… 그건 아마 감도 안 잡히겠죠.”

“모르는 척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랬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협력적으로 나오지 않았을까요? 저들 말마따나, 테러가 남긴 상처는 세계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쳤으니까요.”

지금 당장 콘스탄티누폴리에 칸발리크에서와 같은 사태가 펼쳐진다면, 안 그래도 휘청이던 세계 경제는 아예 주저앉을 것이다. 짚고 일어설 지팡이마저 걷어 차버리는 꼴이겠지.

몇 가지 계산을 굴려본 뒤, 벨리사리오스는 말했다.

“나는 세상의 변혁을 바란다, 토칸.”

“그렇지 않으셨다면 저희를 이토록 돌봐주시진 않았겠지요.”

“어차피 되지도 못할 황제 자리 따위엔 관심 없네. 나는 중세적 가치에 집착하는 고려의 여제와는 다르다.”

주견하에게 이야기했던 대로, 그는 보다 우월한 인간에 의한 지배를 꿈꾼다.

“허나 소수만 우월해져봤자, 이전에도 있었던 체제의 반복일 뿐이지.”

이단이 어떤 왕조의 시조가 되어도, 일반인들이 구축한 시스템에 녹아들고 만다.

이단 집단이 엘리트가 되어 하층민인 일반인을 지배하는 시스템은, 지금도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시스템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모든 인간을 우월하게 개조한다. ‘저쪽 세상’에서 행해졌던 실험은 비록 실패했지만,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지.”

영혼이 없으면 영혼을 얻어오든 만들든 해서 주입한다.

신이 없다면 신을 찾아내거나 만든다.

“비록 그들은 ‘인류의 파멸’이라는 결말에 이르렀지만, 그것은 다시 말해 모든 인류가 한꺼번에 다른 단계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하께서 사회주의자들 같은 생각을 품고 계시리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토칸의 농담에 벨리사리오스는 코웃음 쳤다.

“바라트의 실험은 실패한다. 그건 인간이 지금 그대로인 이상은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실험일세. 일반인의 육신으로는 뚜렷한 한계가 있네. 사회주의 역시 인간이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야 가능한 이상일세.”

“육신의 한계를 벗어던진다면, 사회주의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탐구해볼 만한 길이긴 하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일단은 전제 조건을 갖추는 게 중요하네.”

잠시 뜸을 들인 후, 그는 자신의 말을 한마디 한마디 확인하듯이 말했다.

“모든 인간의 이단화. 혹은, 이단 너머의 어딘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한 수단, 중간 과정으로서의 ‘국가’가 필요하다.

아니 ‘국가들’이 필요하다.

국가들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적절한 무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신수덕이라는 자가 아즈텍을 움직이는 대로, 우리도 행동을 개시하도록 하지. 자네의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활약을 기대해보겠네.”

***

견하는 회의장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회의 내용을 알고 싶다면 나중에 조유관, 차무룡 두 사람에게서 전해 들어야 했다.

경호를 맡았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인 경호는 고려에서 온 경호팀과 로마 제국이 배치한 경호 인력이 따로 있었으므로, 견하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쿠아우테목에서 있었던 폭탄 테러 때문인지 로마 제국은 요인 경호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견하는 좀 더 심각한 사태…… 이를테면 이단에 의한 회의장 진입 시도나, 파멸인을 이용한 도시 단위 테러에 대응할 때 나서면 된다.

그래서 견하는 시간을 죽일 겸, 회의장 주변을 산책했다.

블라헤르나이 궁의 정문 근처로 가 보니, 상당히 소란스럽다.

깃발에 거칠 게 쓴 표어를 들고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시위인가……?”

입구 쪽 경비 병력도 테러를 우려해서인지 삼엄한 기세로 시위대를 가로막았다. 그래서 시위대는 소리높여 뭔가를 외치고 있었지만, 일정 선 이상은 입구에 접근하지 못했다.

“……한족이군.”

표어가 한자로 적혀 있었기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견하는 그 문장이 무슨 뜻인지까지는 모른다. 한어(漢語)는 한마디도 할 줄 모르기도 하고.

시위대의 선두에,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정장까지 차려입은 한 남자가 보인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한 교양을 갖춘 남자인 것 같다.

목소리의 울림이 보통이 아니다. 여기 한족 교민 사회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일 것 같다.

혹시 본토, 그러니까 옛 태평천국령에서 왔다면……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일 가능성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 남자가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쳐도, 열정만 전해질 뿐 뜻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견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시위대와 남자를 구경할 뿐이었다.

그런 견하의 의문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풀렸다.

“왜 들여 보내주지 않느냐고 하는군.”

한눈에 보기에도 고위 관료인 것 같은 로마인이 곁에 서 있었다. 그도 벨리사리오스처럼 고려어로 말한다. 견하는 그와 살짝 거리를 벌린 후 일단 예의를 갖췄다.

“고려의 정치경찰, 감찰국장을 맡은 주견하라고 합니다.”

“알고 있네. 그러니 고려어로 말을 걸지 않았나.”

사내가 천천히 견하 쪽으로 몸을 돌린다.

견하는 놀란 표정을 짓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얼굴 근육을 억눌렀다.

사내의 얼굴에는 칼로 여러 번 그은 것 같은 흉터가 있었다. 왼쪽 눈은 멀었는지 눈동자가 허옇다. 자세히 보니 왼손도 의수다.

“자네를 보고 있자니 돌아가신 고려의 여준설 장관이 떠오르기에 무심코 말을 걸었네. 놀랐다면 사과하지. 나는 알렉시오스라고 하네.”

견하는 이번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알렉시오스…… 들은 적이 있다. 로마 제국의 중앙은행장. 얼굴의 흉터와 눈, 손의 상해는 쿠아우테목 테러의 흔적인가.

“나는 이런 몸이 되었지만 어쨌든 살아남았네. 허나 여준설 장관은…… 안타깝게 됐지. 자네도 공직에 있다면 그를 기억할 것 같은데.”

“잠깐이지만…… 고려와 세계가 처한 경제 문제에 대해 그분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자 같은 거창한 건 아니다. 그저 단편적인 즉석 강의를 들었을 뿐.

하지만 여준설은 그 잠깐만으로 견하의 안목을 크게 넓혀주었었다.

“애국자였지. 그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네.”

“제가 감히 고려 전체를 대신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고려의 공직자로서, 감사드립니다.”

알렉시오스는 망가진 얼굴 근육을 움직여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헌데, 중앙은행장께서 어째서……?”

견하의 말을 들은 알렉시오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중앙은행장도 뭣도 아닐세. 몸이 이렇게 되고 나선 도저히 일에 전념할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얼마 전에 은퇴했네.”

“그건…… 유감입니다.”

“여기엔 그래도 경제 관련 자문을 해줄 겸, 초대받아서 온 건데…… 도저히 볼만한 꼬락서니가 아닌 것 같아 회의장을 나온 거라네.”

볼만한 꼬락서니가 아니라…….

“상황이 좋지 않은 겁니까?”

“상황은 늘 좋지 않았지. 중요한 건 좋지 않은 상황을 대하는 태도라네. 물론 모두가 머리로는 공조가 중요함을 알고 있어. 그런데 남들 공조할 때 나 하나쯤 실속 좀 챙겨도 괜찮겠지, 그런 태도가 문제야.”

세계 경제 문제를 논하겠다는 자들이 시정잡배와 다를 게 없어서야, 라고 중얼거리며 알렉시오스는 혀를 찼다.

“세계대전은 너무나도 많은 걸 망가뜨렸네. 종전 이후 21년이나 지난 이야기지만, 그 악영향은 지금도 우리 모두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지.”

“어떤 학자분들은 세계대전의 상처가 모두 회복되려면 100년이 넘게 걸리리라고 내다보셨던 듯합니다만…….”

“하! 선배들은 후배들이 이 모양 이 꼴이 되리라는 걸 내다보신 거겠지. 불신, 방임…… 그런 악덕들이 세상을 뒤덮고 있어.”

알렉시오스는 시위대를 향해 턱짓했다.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저 광경 또한 세계대전의 결과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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