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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79화 (279/541)

도시들의 여제(15)

콘스탄티누폴리에서 ‘칸빌리크 테러 사태’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동안, 동명에서도 ‘알려져선 안 되는 비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투글룩이 루우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카라코룸에서 반란이 일어날 무렵에 탈출을 시작했다면, 여기까지 오는 게 꽤 늦었군.”

추궁하듯이, 황제는 투글룩 장군에게 말한다.

투글룩은 송구스럽다는 듯, 하지만 각오했다는 듯 답했다.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몽골의 장교. ‘원칙’만 따진다면야 당연히 칸발리크로 들어가 카간을 뵈었겠죠.”

“허나 짐을 찾아온 것은 ‘원칙’과는 다른 생각을 품었기 때문이렷다?”

황제는 오만함을 가장하고 있다고, 투글룩은 판단했다.

투글룩 자신의 말마따나 그는 몽골군 소속이다. 외국 군주인 루우에게 와 있을 이유가 없다.

일단 속내를 캐보기 전까지는, 우위에 있어야 한다.

괜한 겸손은 상대가 자신을 얕보게 한다. 얕보이면 이용당한다. 루우 테무르 입장에서는 투글룩이 자신을 말로 농락할지 모른다고 경계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투글룩은 솔직히 대답했다. 황제를 능멸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므로.

“저는 선대 카간의 유산을 짊어진 자입니다.”

그 말에, 루우의 표정이 변했다.

흥미.

동요.

투글룩도 종종 시레문 카간과 볼로드 타이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기에, 부녀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대충 안다.

그러나 자식은 자식이다. 그렇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는 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순 없다.

“그 ‘유산’이 무엇인가?”

“이 유산은 향후 나라의, 아니 세계의 정세를…… 더 나아가 인류를 뒤흔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비록 군인이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판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게레센제 카간에게 가는 게 옳은 길인가.

루우 테무르, 왕서라 황제에게 가는 게 옳은 길인가.

“물론 선대 카간께서, 폐하께로 뜻을 기울이셨다는 판단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어디까지나 투글룩의 생각이다. 그러나 루우는 이런 식으로 아버지의 생전 뜻을, 그 조각을 맞춰 나간다.

“그리고 저 역시, 언젠가는 폐하께서 카간 자리에 오르시리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현 카간과 대립하게 될 테고, 두 분 중 승산이 있는 분은…… 지금 제 눈앞에 계신 분이겠지요.”

“출세를 원하는 자로서 상당히 좋은 안목을 갖추었구나, 투글룩.”

“저 역시 군인인 만큼 진급을 원합니다. 그러나 여기엔 출세욕보다도…… 제가 짊어진 ‘의무’ 그 자체가 이런 판단을 하게끔 했습니다.”

“짐이 언젠가 고려의 황제와 몽골의 카간을 겸하고 다이온을 하나로 아울러 다스리는 것과, 그것이 그대가 가져온 유산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가?”

“게레센제 카간이 세계정세, 최소한 동아시아 정세를 안정적으로 주도할 수 없다면, 그는 이 유산을 가져선 안 됩니다. 아니, 존재조차도 알아선 안 됩니다.”

그것이 제가 늦게 나타난 이유입니다, 라고 투글룩은 덧붙였다.

“반란군이나 게레센제 카간의 눈을 피해 다니느라 늦었다는 건가?”

“그러합니다. 게다가…… 몽골에는 제가 관리한 것과 같은 연구시설이 상당수 있습니다. 이 연구시설의 폐쇄, 자료의 정리와 추출…… 각지를 돌아다니며 이러한 작업을 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숙부께서 존재조차 알아선 안 된다고 했지.”

“예.”

황제는 옆을 돌아봤다.

고려의 정부 수반, 태사 미리안은 지금까지 아무런 말 없이 황제의 곁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빙빙 돌리는 이야기는 그만하게 해야지. 구체적으로 그 유산이라는 게 뭔지 알아내야 해. 그전에는 뭐라 판단할 수 없어.”

맞는 말이다. 투글룩은 대단히 거창한 무언가를 말하는 듯하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물론, 어떤 정보든 우리가 독점하는 게 좋지.”

루우는 끄덕였다. 시선을 다시 투글룩 쪽으로 돌린다.

“그 유산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냐. 더는 말을 돌리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곧게 펴서 말하라.”

“‘신종의 씨앗’입니다.”

루우도, 리안도, 그리고 두 사람 뒤에 서 있던 효윤도 모두 의아한 얼굴이 된다. 투글룩이 뱉은 말의 의미가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어를 하나씩 조합해서야, 간신히 이해하기 시작한다.

신종.

씨앗?

“무슨 의미인가.”

“이단에 관한 연구는 괴력난신의 근본을 파헤치기에 이르렀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이라는 짐승’의 표본을 얻기에 이르렀지요.”

“보여줄 수 있는가.”

루우의 물음에 투글룩은 눈을 굴린다.

“……폐하를 놀라게 하는 무례를 허락하신다면.”

루우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효윤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여차하면 투글룩을 벨 심산이다.

뭔지는 몰라도, 투글룩이 꺼내 보이려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런 느낌이 효윤의 등줄기를 타고 오른다.

투글룩은 품에서 자그마한 빨간 공을 꺼냈다.

공…… 같은 둥근 물체였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그것 위로 눈알과 이빨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효윤이 금방이라도 벽력같은 일격을 내리칠 걸 느꼈는지, 투글룩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안심하시길. 이것은, ‘정제된’ 물건입니다. 폐하와 각하께서 보셨던 것처럼 ‘파멸인’을 만들어내거나, ‘저쪽 세상’과 연결되거나 하는 기능은 없거나 미약합니다.”

“환각을 일으키거나 하지도 않는 건가?”

“이런 구체들이 일으키는 환각은 인간이 ‘파멸’하기 전 밟는 수순이지요.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것은 ‘파멸인’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것을…… ‘신종의 씨앗’이라 부르는가?”

“예.”

“원래의 붉은 구체들도 ‘신종의 씨앗’이라 부를 수 있는가?”

“그러합니다. 지금까지는 붉은 구체들 역시 ‘파멸인’과 같은 것이라 여겨졌으나…… 거듭된 연구는 둘 사이의 차이를 해명했습니다. 그것들은 신종의 씨앗이자 동시에, ‘문’의 열쇠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라면서 투글룩은 고개를 저었다.

“신종이 곧 문입니다.”

루우는 머릿속으로 투글룩의 말을 바삐 맞춰본다.

동명특별시 지하에서 파멸인과 붉은 구체…… ‘신종의 씨앗’이 목격된 이래,

칸발리크에 그 지옥도가 펼쳐진 이래, 규명되지 않은 의문들.

다른 세상이란 무엇인가.

각각의 파멸인 개체와 ‘신종의 씨앗’과…… 혁세주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들은 어떻게 다른 세상으로부터 오는가.

신종은 무엇인가.

이단은 어떻게 신종으로부터 힘을 부여받았는가.

“저 또한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에, 어설픈 비유를 사용함을 용서해주십시오.”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대는 내 신하가 아니다. 외국 군주에 대한 예의로는 충분하다.”

투글룩은 왼손바닥 위에 올려둔 ‘신종의 씨앗’ 위로, 오른손바닥을 쓰다듬을 듯이 움직였다.

“비유하자면, 신종…… 신이라는 이름의 그 짐승들은 ‘창틀에 걸터앉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틀에 걸터앉은 사람은 창의 안쪽과 바깥쪽, 모두 느낄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그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마치 우리 인간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게 당연하듯. 공기를 마시고 살아가는 게 당연하듯 말입니다.”

“……세상과 세상의 경계 위에 살아가는 존재란 말인가.”

“그러합니다. 그게 신종의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렇기에 각종 신화와 종교의 경전에서 말하는 신은 인간을 초월했다.

또한 놀라울 정도로 현세의 삶에, 인간의 미래에 무관심하다.

“세상과 세상의 경계에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우리는 감조차 잡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종도 ‘하나의 세상’에 발 디디고 살아가는 느낌을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신종의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듯, 신종 역시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중얼거리던 루우는, 퍼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알아냈지?”

“폐하께서도 익히 아시듯 본래는 단편적인 ‘쿠빌라이 문서’나, 여러 성리학자들의 기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리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선대 카간의 명에 따라 다소 ‘비윤리적’인 실험도 감행했고, 마침내 이러한 기능도 손에 넣었습니다.”

투글룩의 왼손에 올려둔 ‘신종의 씨앗’을, 감싸듯 쥔다.

어전의 풍경이 변한다.

옥좌도 웅장한 기둥도 화려한 장식도 사라지고,

‘붉은 세계’만이 펼쳐진다.

“네놈……!”

효윤이 박도를 소환한다. 그러나 루우는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이건 전에 본 것과 달라. 그 작은 물건으로는 ‘모조품’ 밖에 만들어낼 수 없나 보군?”

어딘가에서 금방이라도 파멸인이 튀어나올 것 같은 풍경이지만, 금세 간파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파멸한 생명’의 흔적조차 없다. 모양만을 보여줄 뿐, 완전히 죽은 세계다.

“그러합니다. 좀 더 큰 것들은 정말로 저 너머의 세상에 우리가 ‘걸터앉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만…….”

“마치 ‘창틀’에 걸터앉듯 말이지.”

리안이 투글룩의 비유를 그대로 받아 중얼거린다. 투글룩은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려 끄덕인다.

“각하의 말씀대로입니다.”

리안은 효윤과 루우를 바라본다.

“견하가 이야기했던 그 수법과 같아. 토칸이라는 자가 견하의 의식을 불러내 대화한 것도 이런 식이었을까?”

“그렇다면 ‘의식을 불러냈다’기 보단, 강제로 세상의 경계에 걸터앉게 만들었다고 보는 게 맞겠군.”

“그래. 그것도 그렇지만…… 더 큰 문제가 있지.”

“장군은 지금 이걸 우리한테 처음 보여준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할 줄 아는 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남자는 ‘적’이라는 것도요.”

세 여자의 속삭임이 끝나자, 투글룩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저희는 이런 방식으로 세상의 경계에서 ‘저쪽 세상’을 탐사했습니다. 파멸한 저들의 세상은…… 말 그대로 제대로 된 언어 체계를 거의 상실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단편적인 지식을 축적해나갈 수는 있었습니다.”

무수한 희생이 따랐다.

그 희생을 디디고 올라서며, 조금씩 더 높은 곳으로 다가갔다.

“저쪽 세상의 인류는 ‘신종’에게서 영혼을 발견했습니다. 영혼을 지닌 존재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파멸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사고였을지도 모른다.

“영혼 없는 존재는, 당연히 그 상태가 기본적인 육신의 구성 ‘원리’입니다. 억지로 영혼을 지니려 하면 당연히 ‘이’가 뒤틀립니다. 인간의 원리가 뒤틀리면 인간이 디디고 사는 세상의 원리도 뒤틀립니다. 연쇄적인 파멸이 시작되는 게지요.”

그래도 어찌어찌, 영혼을 인간의 몸에 쑤셔 넣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물이 이것입니다.”

투글룩은 아이들에게 신기한 걸 보여주는 마술사처럼 손을 움직였다.

작고 붉은 구체에서 하얀 무언가가 스며 나온다.

견하가 이단이 되게 만들었던 그것과 아주 비슷한,

견하가 간혹 소환하는, 보다 작은 그 괴물들과 아주 비슷한,

무언가…… 다.

“이것이 억지로 쑤셔 넣은 영혼입니다. 살도 혼도 아니게 되어버린, 경계에 걸터앉아 이가 뒤틀린 불쌍한 영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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