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78화 (278/541)

도시들의 여제(14)

일본 측은 바라트 대표단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했다.

“의제가 완전히 옮겨간 것 같군.”

물론 이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고려가 이런 식으로 방해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지나치게 간접적인 방법이었으니까.

다만,

“바라트를 여기까지 데려온 게 고려라면, 그 ‘다이온 연방’의 대략적인 세력범위는 정해졌다고 봐야겠어.”

“두 거대한 세력이 저런 식으로 제휴하려면, 세력권에 대한 합의 없이는 어려우니까.”

“어쨌든 우리 측 의제를 꺼내긴 어렵겠군. 한동안은 신중하게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다른 대표단과 개별 접촉해서 미리 작업을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지금 해상 방위 동맹 계획이니, 한족 반란과 그 진압 현황이니 하는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냥 묻힌다.

어느 정도 관심은 끌겠지만, 각국 대표들은 보다 절실한 문제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릴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 국가가 존재하는 것, 그런 나라와 세계 각국이 무굴 시대처럼 다시금 수교하는 것. 부정적으로 생각하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

내부적으로는 자국의 공산주의자들을 자극할 수도 있다. 외부적으로는 대공황 문제에 있어 하나의 실마리가 되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래도 기껏 ‘평화’라는 명분으로 불러낸 자리인데 대놓고 면박을 주긴 힘들지. 정중한 태도는 갖춰야 할 거야.”

예상대로, 로마 측에서 먼저 바라트에 질문을 던진다.

질문 내용은 둘째치고 일단 말투는 정중하다.

“우호, 선린, 그런 것들을 통한 평화의 확보와 확산.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것입니다. 바라트의 동맹국과 국경을 접한 이웃 나라로서 우리 역시 바라트와의 평화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라며 로마 측은 우려를 덧붙인다.

“이러한 평화는 서로의 체제에 대한 존중에 기대고 있습니다. 서로의 체제를 혐오하는 것으로는 결코 평화가 수립될 수 없습니다.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에서 혁명으로 수립한 체제를 소중히 여기듯, 우리도 지난 2천 년간 성숙시킨 로마의 체제가 소중합니다. 따라서 먼저, 바라트 측에서는 이러한 존중을 할 의사가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바라트 대표단은 딱히 당황한 것 같진 않았다. 그들은 이 정도의 질문은 예상했다는 듯, 간결하고 정중한 대답을 내놓는다.

“이데올로기에 있어 차이를 보일 뿐, 국제 사회의 모범적인 일원으로 교류하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 역시 여러분과 다르지 않습니다. 당연히 로마의 역사와 체제를 존중합니다.”

답변이 끝나기가 무섭게 브리튼 측에서 질문이 날아온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한가지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각국의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들이 자국의 체제를 전복할 수 있도록, 배후에서 바라트가 지원하거나 조종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지?”

“그것은 오해입니다. 바라트가 혁명을 통해 무굴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을 때, 배후에서 누군가가 조종을 했습니까? 아대륙의 여러 왕공들과 내전을 벌일 때 외국의 지원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홀로 싸워 이겼습니다.

여기서 굳이 우리의 사회주의가 얼마나 훌륭한지 말씀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우리의 승리에는, 그 왕공들의 부정과 부패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우리들의 체제가 그들만큼 부패했다는 겁니까?”

“아니요, 아니요. 그렇게 된다면 굳이 바라트가 손을 쓸 필요도 없이 혁명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겁니다. 보나파르트 황실을 탄생시킨 프랑스 대혁명…… 이 혁명은 우리 바라트 혁명의 모범이기도 합니다만, 적절한 개혁을 거친 체제는 더는 혁명이 자라지 않는 안정성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으음…….”

이 낮은 신음은 신성 제국 측에서 나온 것이다.

기존 프랑스 왕실의 목을 날려버린 대혁명은, 보나파르트 황조가 등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다.

나폴레옹 1세를 비롯한 역대 황제들은 그 혁명 정신의 계승을 주장해 왔다. 그렇기에 그들이 서유럽을 지배할 수 있었고.

정면에서 ‘프랑스 대혁명을 본받는다’고 선언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박했다간, 자국 황실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꼴이 된다.

그러니 신성 제국 측은 불편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일본 대표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능란하구만. 준비가 잘 됐어.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외교관이라면 존경해야 할 화법이야.”

바라트 대표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여러분이 여러분 체제의 정당성과 지도층의 청렴함, 사회의 굳건한 단결을 믿고 있다면, 내부적으로 어떤 준동이 있어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도 내부에 무굴 시대로의 복고를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전면적인 자유 시장 경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자들도 있죠.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여러분의 사주를 받아 움직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체제에 자신이 있으니까요.”

일본 대표들은 감탄에 찬 한숨을 흘린다.

흘낏 보니 고려나 몽골 측도 그런 것 같다.

바라트 대표의 저 말이 사실인지 여부는 보장할 수 없다. 누군가는 바라트에서 탄압을 받고 망명한 사례를 들먹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우 회의 전체의 분위기를 망친다.

사람들은 내심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겉으로는 ‘착한 가면’을 쓰는 쪽을 더 선호한다. 회의에 누군가 ‘평화’라는 의제를 끌고 나왔다면 굳이 나서서 거기에 먹칠하고 싶어 하진 않는 것이다.

게다가…… 이 정도라면 바라트 측에서도 세계 각국의 노동운동 탄압 실태 등을 철저히 조사해왔으리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바라트의 말꼬리를 잡으려다 자국의 치부만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아까부터 말이 없는 아즈텍 대표단의 모습이 이를 입증한다.

검은 피부와 금빛으로 수놓인 예복의 조화가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 에티오피아 대표단이 입을 연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안심할 수 없습니다. 바라트 측의 주장이 옳다면, 카불, 후라산, 페르시아 등으로 확산한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그들 역시 자발적인 혁명으로 정권이 바뀐 것일 뿐이라고 하실 겁니까? 가장 강력한 사회주의 이웃이 있는데도요?”

“그 역시 오해입니다. 말씀하신 우리 바라트의 우방국들은……”

“계속해서 오해라고 하시는군요.”

“오해인 건 사실이니까요. 그것이 오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사실이 마음에 안 든다고 바뀌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계속하시죠.”

“우리 바라트가 이미 내전에 돌입할 당시부터, 말씀하신 지역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내전이 끝날 무렵엔 이슬람 제국은 무너지고, 작지만 열정적인 지역 혁명 정부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었죠.”

“하지만 ‘군사 원조’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이슬람 제국이 무너지고 단 뒤의 정치적 공백을, 그저 방치만 해야 했을까요? 명백히 그 지역 혁명가들과 주민들의 요청에 따른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집트와 레반트에서 성립되었던 수많은 소규모 사회주의 공동체들은, 이후 로마군의 진군으로 무너졌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세력 확산이 무섭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우리는 여러분의 확장이 더 무섭습니다.”

로마 측 대표가 에티오피아 대표를 향해 ‘어쩔 수 없다’는 애매한 표정을 보낸다.

여기서 더 추궁하면 그건 그것대로, 로마 제국의 일방적 확장, 그리고 그로 인해 다른 나라들과 빚었던 갈등을 다시 수면 위로 떠 오르게 할 것이다.

로마로서는 유쾌한 상황 전개라고 할 수 없다.

에티오피아 제국의 대표가 입을 다물자, 로마 쪽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간 우리가 서로를 향해 품었던 오해와 의심이 어느 정도는 해소된 것 같습니다.”

정말로 해소되었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소되었다고 ‘동의하는 상황’이 필요할 뿐이다.

“서로가 서로의 체제를 존중한다는 전제로, 우리는 여기서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해야만 합니다. 대공황이 세계를 강타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만,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습니다. 자국을 대표하는 우리들은 여기서 반드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로마 측 대표는 좋은 의견 없습니까, 라는 듯한 시선을 각국 대표에게 보낸다.

그리고 마침내, 몽골 측에서 손을 들었다.

일본 대표단은 신경을 곤두세운다.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기회를 포착할 수 있을까.

“우리 몽골은, 키타이와 낭키아스, 그리고 고려라는 서로 같은 황실을 공유하는 국가들과 제휴하여 관세동맹을 맺었습니다. 이 협약 역시 일 년이 조금 넘은 데다, 그간 몽골에서는 카간의 붕어와 내전이라는 비극을 겪어왔던 고로, 성과를 말씀드리기엔 이른 감이 있습니다만……”

몽골 쪽에서 관세동맹의 성과를 발표하는 동안 고려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고려는 지난 2년간 국제 사회의 이목을 너무 끌었다.

그러니 몽골을 앞세워서, 마치 주도권이 자기네들에겐 없는 듯 의뭉을 떤다.

“……바라트의 등장도, 고려의 의도였을지 모르겠군.”

그제야 일본 측 대표단 중 하나는 뭔가를 느낀 듯하다.

“고려의 의도?”

“지금도 보게. 분명 고려가 시작한 일인데 몽골을 앞세우고 있지 않나.”

“몽골에 대한 존중 아닐까?”

지나친 확대 해석에 대한 우려다. 그러나 대표는 고개를 젓는다.

“어떻게든 주목받지 않으려 하고 있어. 고려는 평화를 위한 ‘바라트의 노력’을 ‘지원’한다. 고려는 경제 회복을 위한 ‘몽골의 노력’을 ‘지원’한다. 이런 희미한 인상만 주려는 속셈이지.”

“……몽골 쪽에서 마냥 고려의 의도대로 행동해줄까? 그건 고려 입장에서는 도박 아닌가?”

“고려는 몽골 내전에 굉장히 깊숙이 개입했어. 지금은 한족 반란 진압에까지 개입하고 있지. 정확한 건 자문을 구해봐야겠지만 군사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개입도 상당할 거야. 내전 후 재건이라든가 하는 명목으로 말이지.”

어쨌든 정치적인 빚이 막대한 만큼, 몽골은 어느 정도는 고려의 의도에 따라 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편이 낫다. 내전을 겪는 불쌍한 세 나라,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가 힘을 좀 합치기로 했다고 하면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긴 쉽지 않으니까.

“어떻게 하겠나? 여기서 던져볼까? 고려는 이대로 침묵할 것 같은데 만약 그냥 넘긴다면……”

국제 사회는 다이온 연방의 수립에 대해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넘어가는 꼴이 된다. 이후 누군가 이의를 제기해도 ‘그럼 그때 평화회의에서 말하지 그랬나’라는 핀잔만 듣기 마련이다.

“……자네 말마따나 계속 침묵하는군. 여기서 우리가 다이온 연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봤자 황당하다는 반응밖에 못 얻어.”

일본 측 대표단이 초조해하며 머리를 굴리는 그 순간, 몽골 측 발표가 끝났다.

“……이상과 같이 동아시아의 4국은 관세동맹을 통해 대공황의 충격을 완화하고,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따라서 이 평화회의에 모인 여러분들께도 이러한 관세정책의 확대를 제안하는 바입니다.

쓸모없는 소모전으로만 번지게 되는 관세 전쟁이 아니라, 잠시라도 욕심을 내려놓고 자유로운 무역을 통해 이 상처를 치유해나가고자 합니다.”

각국 대표단이 동의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박수가 쏟아진다. 분위기는 고려 측에 유리하게 돌아간다.

일본 대표단이 입술을 씹으며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의를 제기할지 엉덩이를 들썩일 때,

로마 측에서 손을 들었다.

“한 가지, 말씀하신 의제와는 조금 빗나간 이야기입니다만, 질문이 있습니다.”

로마의 질문을 경청하겠다는 태도로 몽골 대표는 고개를 끄덕인다.

“칸발리크에서 일어났던 테러, 국제 사회의 안전을 위해서 그 자세한 경과를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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