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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77화 (277/541)

도시들의 여제(13)

“생각 이상으로 경계를 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견하는 벨리사리오스와 나눈 대화 중 ‘고려 내전에 관한 각국의 반응’을 조유관에게 전했다.

“우리 태사 각하가 허동주와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는가…… 허동주에 대한 이야기는 태사 각하가 그를 몰아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뿐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군.”

“승자의 말이 옳다, 는 식으로 생각해주진 않는다는 거죠. 고려의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는 있으니 상대는 해주겠지만, 우리는 당신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겠다…… 그런 태도입니다.”

“약점을 쥐려고 할지도 모르겠군. 우리 정권의 의심스러운 부분을 더 추궁하지 않는 대신, 이것저것 양보를 요구해올지도 모르겠어. 혹은 그저…… 우리가 하는 행동을 방해하려 들지도 모르지.”

방해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때도 있는 법이다. 고려의 성장이나 정책 성과가 정체되면, 어떤 나라에서는 자신들의 정책을 추진할 여유를 얻을 테니까.

“일본이 개입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완전히 부정할 순 없겠지만, 이렇게나 빨리 손을 썼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네. 열강이 일본의 관심사를 공유하게 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 게다가 아즈텍 연방의 눈치도 있고.”

태평양의 이권을 두고 갈등을 빚는 일본과 아즈텍.

아무리 아즈텍의 정세가 혼란스럽다 해도, 세계대전 이후 제1의 강국이 된 나라를 우습게 볼 수는 없다. 어떤 나라도 일본을 편들어주느라 아즈텍의 눈 밖에 나고 싶진 않을 테니까.

“그나저나,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의심이구만 그래.”

우리가 내전으로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이루어냈는데, 라고 조유관은 넋두리한다.

그 말을 들으며 견하는 다른 의견을 덧붙였다.

“오해를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합니다. 우리야 태사 각하가 어떤 분인지 잘 알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알기 어렵죠.”

외국인들에게, 특히 자유세계 사람들에게 고려는 ‘미승휴의 나라’다.

공화와 민주를 요구하던 고려민국 임시정부를 무참히 짓밟은 군사독재자.

게다가 그 방법도 마치 타협이라도 할 듯 속임수를 쓴 것이 아니었던가.

객관적으로 보자면,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인간일 뿐이다.

전쟁영웅이라는 가면 뒤에, 그런 타락한 모습을 감춘.

“허동주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까지 관심이 미치진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는 패배자고, 죽은 사람이니까. 그가 선대 태사와 협력해 옛 민국 정부를 짓밟는 데 앞장섰다는 것까진…… 굳이 알려고 할 생각은 없겠죠.”

“선대 태사께서 민국 정부를 탄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 태사께서 허동주를 탄압했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리안은 허동주를 평화 협상장에서 죽였다. 이 사실만 들은 사람들은 백부나 조카가 하는 짓거리는 똑같다고 느낄 것이다.

허동주가 먼저 다리를 폭파하긴 했지만, 리안도 허동주를 죽일 준비를 하고 간 것 역시 사실이니까.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죠.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이득이 되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요.”

조유관은 코웃음을 친다. 견하의 말을 비웃은 게 아니라, 어떻게든 고려와 대립각을 세우려는 외국인들을 향한 비웃음이었다.

“그래, 그걸로 뭔가 뜯어내 보려는 이리들도 있겠지.”

고려를 향한 편견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고작 스무 살에 불과했던 여자가 제국 태사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독재자에게서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런 승계 방식에 반기를 든 불쌍한 허동주가 제거된 거라고 여기겠지.

“폐하의 나이도 문제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를 옛 황족의 후예라 내세웠다고 여기겠죠. 날조 아닌가 생각하는 작자들도 있을 테고.”

“그 무슨 불경한 말을! 만 번 양보해서 고려의 황통임을 의심할 수 있다 쳐도 몽골의 황통을 부정할 수는…… 아, 그런가.”

조유관은 씩 웃는다.

“우리가 전면에 나서면 안 되겠군.”

“몽골을 내세우는 거죠. 그쪽 대표단하고 접촉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리는 ‘관세동맹’만을 주도했고, ‘다이온 연방’의 수장 국가는 어디까지나 몽골이다, 이런 식으로 항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고려는 참관국 자격만을 얻는다. 다이온 연방이 국제 평화라는 대의와 어긋나진 않는지 감시하는 역할이다…… 는 식이죠.”

“황제 폐하의 추대, 몽골과의 우호, 이 모든 것이 태사의 업적임을 ‘객관적’으로 증언해주겠군.”

“뭐 그래도 의심할 나라는 계속 의심하겠지만, 분위기는 좀 풀리겠죠.”

“그러면 우리는 그 사이에 일본의 ‘해상 방위 동맹’ 문제나 바라트 문제에서도 진전을 볼 수 있을 거고.”

***

블라헤르나이 궁.

콘스탄티누폴리는 원래 육중한 삼중 성벽과 바다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하지만 지금 그 지역은 ‘구시가’라 불리고, 도시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만 건너편, 동쪽으로는 해협 건너편까지 확장되었다.

황제가 머무는 대황궁은 해협에 면해 있다. 당연히 평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이 여기까지 가볼 일은 거의 없다. 평화회의가 끝나고 그 기념으로 황제의 초청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평화회의는 구시가 서북쪽, 옛 성벽 근처에 자리한 블라헤르나이 궁에서 열리기 때문에, 각국 대표단은 이곳을 바삐 오갔다.

물론 블라헤르나이 궁 역시 황제가 머무는 때가 있기에, 화려함에 있어서는 대황궁에 뒤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늘 처음으로 이 궁전을 방문한 외교관들은 감탄을 연발한다. 그들의 나라에도 화려한 건축물은 얼마든지 있지만, 여기 로마 제국의 황궁에는 독특한 미학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통역관들은 궁전의 화려함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외교관들보다 더욱 정신없이 통역을 준비했다.

말 한마디 잘못 통역한다고 해서 전쟁을 불러온다거나 하는 일은 드물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일은 중요하다.

같은 문화권에서도 사소한 성장 배경의 차이가 두 사람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거리를 만든다.

문화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끼리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여기는 가장 민감한 문제를 두고 다퉈야 하는 자리.

작은 실수가 외교적 입지를 뒤흔들고, 흔들린 외교적 입지는 국운까지 좌우할 수 있다.

모두 그런 사명감으로 임한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그런 사람들’만을 엄격히 선발해 보낸다.

그리고 조유관과 차무룡 역시, 새삼 통역들의 성실함과 실력에 감탄했다.

세계적 금융 강국이었던 브리튼의 언어나, 나폴레옹의 패권 확립 이래 신성 제국의 공용어 지위를 차지한 프랑스어가 쏟아져 나온다.

최강국인 아즈텍의 나우아틀어는 아직은 이런 자리에서 쓰이지 않는다. 관습이라는 이유이지만, 언젠가는 나우아틀어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런 낯선 언어들을, 대표단이 듣기 편하라고 재빨리 고려어로 통역하는 것이다.

조유관도 조금은 브리튼어를 할 줄 알고, 차무룡은 브리튼어와 프랑스어 둘 다 할 줄 안다. 그러나 통역관들처럼 재빨리 고려어로 바꾸진 못한다. 어느 정도는 되새겨보고서야 뜻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도 되새겨보니, 상당히 정확하고 적절한 통역이라 두 장관 모두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만족감과는 별개로, 그들은 지금 흘러나오는 말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대공황.

재작년부터 전 세계를 괴롭히고 있는 그, 형체가 불분명한 괴물.

아니나 다를까 시작부터 화두는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극심한 피해를 입은 각국에 위로를, 그리고 이런 위기 속에서도 의지가 꺾이지 않은 모두에게 찬사를……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세계적 지성들의 지혜를 모아, 위기를 타파해 나가자, 고.”

“상투적인 이야기군요.”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주죠. ‘획기적인 해결책은 없다.’”

망할 정부나 망할 기업은 망한다. 어디까지 망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남들 망하는 동안 버티면 된다. 이런 삐딱한 자세를 유지하는 자들도 있다.

“열강이 다른 나라들의 버팀목이 되자, 기금을 모으자. 단기적으로는 손해를 볼지라도, 장기적으로 사태의 극복을 위해 경제 정책을 조율해보자. 좋은 이야기는 많이 나왔습니다만, 지금까지 무엇하나 제대로 결과를 내놓은 게 없습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죠.”

“네. 여준설 전 장관 살아생전에도 나오던 이야기죠.”

열강이 열강의 역할을 포기한다. 패권을 추구하던 놈들이 이런 때에는 발을 빼려는 게 얄밉기 짝이 없다.

물론 열강 쪽에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실컷 열강의 횡포네 뭐네 비난해왔으면서, 필요하니까 열강의 국력에 기대려는 것인가.

감정과 이권이 뒤얽히니 될 일도 안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국제정치적 해법에 좀 기대보려고 온 겁니다만, 어떨지…….”

차무룡이 씁쓸하게 중얼거리자, 조유관도 씁쓸하게 답했다.

“여기나 거기나 별반 다를 건 없을 것 같습니다.”

당장 바라트 측 대표단을 맞이하는 각국의 반응부터 영 떨떠름하다.

겉으로는 그들의 복귀를 환영해 열렬히 박수를 쳐 준다. 공산주의자들도 생각 이상으로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여기까진 좋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계획경제가, 과연 대공황의 극복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 그것부터 미심쩍게 바라보고들 있다.

바라트의 손을 잡아끈 고려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대체 너희 의도가 뭐냐는 식의 시선이 따갑다.

바라트가 여기까지 나온 게 자본주의 국가들의 허실을 파악하고, 각국에 ‘혁명’을 획책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보장은 어디 있는가.

대놓고 이야기하진 않아도 그런 의심들이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신뢰관계를 처음부터 구축할 수는 없는 법이죠. 뭐 그건 그러려니 합니다. 다만……”

조유관의 눈이 아즈텍 대표단을 향한다.

“허세가 심하군요, 아즈텍 측은.”

“뭐, 그쪽도 그럴 수밖에요. 세계 경제의 기둥들을 잃었던 테러가 아즈텍의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

“안정을 찾아간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테러가 남긴 아즈텍의 ‘혼란상’에 대한 이미지는 쉽게 지워지지 않겠죠.”

“위신 추락도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느낄 겁니다. 그러니 허세를 부려서라도 건재함을 주장해야죠.”

두 장관의 눈길은 이번엔 일본 쪽으로 향했다.

조유관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상할 정도로 얌전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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