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들의 여제(12)
물론, 로마 제국이라는 나라 자체는 ‘도시국가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성공적으로 성장한 대부분의 나라가 그러하듯, ‘로마’는 수도의 이름에서 그치지 않고 국가가 지배하는 모든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행정 효율을 높이고 여러 이득을 취하기 위해, 대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동쪽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겨 ‘신(新)로마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 라는 뜻으로 ‘콘스탄티누폴리’라 불리는 이 도시가 바로 그곳이다.
그 후 제국은 이민족의 침략으로 영토를 잃었고, 거기엔 발상지였던 옛 로마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말씀 드리긴 조금 민망합니다만, 시대착오적 발상 아닙니까? 지금 로마시는……”
“신성 제국 남쪽 변경의 도시지. 맞는 말이네. 시대착오적이라 해도 할 말이 없지.”
이탈리아 반도를 남북으로 나누는 신성 제국과 로마 제국 사이의 국경선. 로마시는 그 북쪽에 있다. 나폴레옹 1세 시대의 유럽 각국이 벌였던 격렬한 전쟁의 결과다.
“그리고 신성 제국과 로마 제국은 전통적으로 우호 관계 아닙니까. 두 나라 사이에 쓸데없는 적대 의식은 희미할 텐데……”
“그 말도 맞네. 전통적인 우호 국가지.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로마성’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들이 차차 늘어나고, 그래서 여유가 생겨서 돌아보니, 이상하지 않은가. 로마성의 회복을 바라면서 로마시의 수복은 바라지 않는다?”
실현 가능성이나 선악 여부를 떠나서, 사고의 흐름만 살펴보면 자연스러운 발상이다.
“보나파르트 황실과 로마 사이의 관계가 늘 원만했던 건 아닐세. 세계대전 이후 바그다드 정복이나 카르타고 수복전 당시엔 대치 상태에 놓이기도 했지.”
“하지만 매번 ‘원만한 해결’을 봤다고 들었습니다. 로마시 문제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 예를 들어 로마시를 비롯한 중부 이탈리아를 옛날처럼 ‘로마 교종령’으로 따로 떼어내서 중립 완충 지대를 두는 방안 같은 게 논의될 걸세. 이번 6차 평화회의에서 말이야.”
중요한 이야기다.
단숨에 긴장의 밀도가 높아진다.
견하의 내부에서도, 견하와 벨리사리오스 사이의 공기 중에서도 높아진다.
“그런 운동을 탄압한다는 방향은 어렵습니까?”
“신의 은총에 더욱 매달리는 자들, 신이 아니라 ‘로마인’에 주목하는 자들, 이 둘은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네. 이해타산에서 일치를 보면, 뜻하지 않은 동맹 관계가 생기기 마련이지.”
벨리사리오스는 상당히 돌려 말하고 있다. 대화를 따라가기가 어렵다.
견하는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혹사하며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추리한다.
“‘로마시 수복’이라는 목표는 ‘고대 로마’를 꿈꾸는 이들만의 것이 아니다? 종교를 중시하는 자들도 함께 목표로 삼는다는 뜻입니까?”
“유스티니아누스 대황제의 야망도 천 수백 년 전의 이야기가 되었거늘, 우스운 이야기지. 자네 ‘5대 총대주교구’라는 이야기는 아는가?”
“대충은요. 로마, 콘스탄티누폴리,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이 다섯 도시를…… 아.”
“로마 교종을 존중하기보다, 이렇게 이슬람에게서 세 개나 되는 총대주교구를 수복한 것처럼 마지막 하나도 무력으로……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네.”
승리가 가져온 굴레.
아즈텍에서와 같다.
틀락스칼라 혁명과 연방의 성립, 대서양 전쟁,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이 모든 것들이 그 체제에 대한 드높은 긍지로 돌아왔다.
그 지나친 긍지는, 독이 된다.
체제가 변해야 할 때 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로마 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의 은총으로 거둔 승리.’ 신의 뜻이 로마 제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아래, 다섯 총대주교구의 수복에 있다면…… 로마시를 수복하는 것도 연장선상에 있다?”
“로마인의 로마성 회복이든, 교회의 통일성 회복이든, 로마시를 수복한다는 과제에서만큼은 의견 일치를 보이지. 이렇게 되면 건들기 무척 힘드네.”
오래되었다.
리안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파시즘’은 20세기의 산물인 것도 같지만,
여기 로마 제국에선, 참으로 중세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상하다.
견하는 벨리사리오스의 말에서 제대로 맞물리지 않은 아귀를 찾아낸다.
“아까 전하께선 ‘신이 없는 차가운 진실을 마주하는 학자들’을 보호하신다고 하셨죠.”
벨리사리오스의 얼굴에 흥미 가득한 웃음이 번지는 걸 보며, 견하는 말을 이었다.
“로마의 파시스트들 역시, 전하께서 비호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무례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벨리사리오스가 굳이 ‘견하에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의도를 읽을 수 없다.
“우리 류리크-팔레올로고스 황실은 참으로 애매한 입장에 놓였다네.”
이윽고 입을 연 벨리사리오스의 말에는, 자신이 아니라 ‘황실’이 들어 있었다.
“황제는 12사도와 동격, 이라는 전통적인 고집도 있고, 정교회의 수장 국가를 이끄는 만큼 동유럽 여러 나라의 종주국 지위를 포기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네. 그러나 세계대전 이후 감당할 수 있는 한계 이상의 영토를 집어삼킨 제국은…… 그런 고집으로는 제대로 된 작동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네.”
정말 그렇게 제국의 상태가 엉망인가는 따로 살펴봐야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벨리사리오스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다.
견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다물고 벨리사리오스의 말을 듣는다.
“이대로라면 제국은 루스를 손아귀에서 놓치고, 기껏 얻은 고대 영토들도 산산조각 나겠지. 그런 혼란 속에 우리 황실이 티무르의 후예들과 같은 결말을 맞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그러다 벨리사리오스는 다시 한번 피식 웃는다.
“물론 나는 황실은 별로 걱정하지 않아. 망명이라도 하면 그만이니까. 내가 흥미를 느끼는 건, ‘새로운 시스템을 향한 움직임’이지.”
아, 그런가.
다시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새로운 체제, 이제껏 인류사에 없었던 것에 대한 태동이 느껴진다네. 이 운동 속에서 말일세. 내가 그들을 비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네.”
“……그리고 전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제3자인 고려인, 그것도 옛 ‘동지’의 측근과 의견을 나누고 싶었거든. 어쩌면 외부에서 든든한 ‘동맹’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황족께서 인민의 움직임에 흥미를 느끼실 줄은 몰랐습니다.”
“황족이기에 흥미를 품는 게 아닐세. 저들이 원하는 ‘우월한 인간’에 의한 새로운 통치체제에 흥미를 느낀 거지. 황족이 아니라 ‘이단’으로서 통치하는 것, 그리고 이단에게서 이단으로, ‘우월한 통치’를 계승하는 것. 어찌 보면 참으로…… 민주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나?”
견하의 머릿속에는 그 우월한 인간들끼리 벌이는 내전이 먼저 떠올랐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놓진 않는다.
“바라트도 스스로 공산주의라는 장대한 실험을 한다고 여긴다지. 나도, 우리도 마찬가지일세. 방향이 다를 뿐, 장대한 실험을 하는 거지.”
“하지만 위험한 실험입니다.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자면, 전하께서 과연 그것을 통제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단들’의 힘이 필요한 걸세. 이단들이 정점에 서는 체제에 동의하는 모두의 힘이.”
그리고, 라며 벨리사리오스는 덧붙인다.
“자네도 알지 않는가. 아즈텍의 완고함이, 시스템 개혁을 게을리한 자들이 지금 어떤 지경인지. 나는 이번 평화회의에서 대체 어떤 변명들을 늘어놓는지 지켜볼 셈이네만.”
그 점은 견하도 동의한다. 아즈텍은 파멸할 것인가, 아니면 이번에도 극복할 것인가.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중이다.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의 로마는 다르네. 좋든 싫든 우리는 루비콘을 건넜고, 자네의 고려가 그러하듯 우리도 변화해야 하네.”
여기까지 들었을 때, 견하는 확신했다.
벨리사리오스는 위험한 천재다.
견하도 주변에서 총명하다, 천재적이다, 추켜세워준다. 그러나 ‘진짜 천재’를 눈앞에 두면 압도될 수밖에 없다.
고려어의 고급 어휘까지 술술 구사하는 이 남자는, 위험하면서도 흥미롭고, 예측할 수 없으면서도 체계적인 생각을 품었다.
견하로서는 감히 이러쿵저러쿵 논할 수 없다.
그저 시대와 세상의 이러한 변화가, 고려에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하길 바랄 뿐.
할 이야기를 다 마쳤는지 벨리사리오스는 일어선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주길 바라네. 자네의 태사 각하께도 잘 말씀드리고. 방금 이야기했지만 나는 ‘동맹’을 절실히 바라고 있으니 말일세.”
***
고려 측 대표단을 맞이하는 연회가 끝나고, 벨리사리오스는 마치 이차회를 즐기려는 듯 자리를 옮겼다.
그가 도착한 곳은 황자에게 주어진 ‘비교적 작은’ 규모의 별장.
황자를 맞이하는 여러 사람을 지나, 그는 별장 한구석에 있는 어떤 방으로 향했다.
구석진 자리에 있어서 다른 방에 비해 다소 작긴 했지만, 황족의 별장인 만큼 꽤 호화로운 방이었다.
안에 있는 사람의 의향을 묻지도 않고, 두 팔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다.
그런 벨리사리오스의 행동을 유쾌한 웃음으로 맞이해주는 사람이 안에 있었다.
얼마 전에 몽골에서 와서 친구가 된 청년이.
토칸이 거기에 있었다.
“만나보니 어떠셨는지?”
“그대의 말대로다. 상당한 친구더군. 괜한 허세는 부리지 않아. 허세가 없으니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벨리사리오스는 뭐가 생각났는지, 씩 웃었다.
“그대가 나를 보고 흥미로워했던 것처럼, 그도 나 같은 황족이 ‘새로운 체제로의 변화’에 관심 두는 걸 흥미로워하는 눈치더군.”
“전하의 말과 행동은 과격하다 싶을 만큼 체제 전복적이니까요. 저도 군주정 안에서 이런 별종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보통은 황위를 향한 야심을 품든지, 깔끔하게 접고 황족의 호화로운 생활과 허영을 즐기겠지. 나처럼 황실에 대한 애착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진 않을 걸세.”
재미있군, 재미있어…… 연신 되뇌며 벨리사리오스는 소파에 앉았다.
“그대를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된 남자가 같은 도시에 있다. 소감은 어떤가? 놀리는 맛이 있는가?”
“그와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해보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솔직히, 두려움이 큽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토칸의 얼굴은, 말과는 달리 덤덤했다.
벨리사리오스는 그런 토칸의 얼굴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웃음을 거두고 묻는다.
“두려움은 변명이고, 다른 뭔가가 있군?”
“……예. 주견하 그자는 동쪽 끝에서 착실하게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고 있습니다만, 동시에 이상할 정도로 안정적인 현상 유지를 원하는 자입니다.”
“나도 이번에 대화해보면서 느꼈네. 서민에 불과했던 자신을 그 정도로 출세시켜 준 체제에 대한 충성인가, 싶었지만 그런 조잡한 인간이 아니야. 단순히 고려 태사에 대한 애정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기엔…… 그 속에 전혀 다른 야심을 품고 있어.”
벨리사리오스는 술잔을 채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황자와 토칸은 술을 들이켰다.
“평화회의가 열리는 동안은, 그대도 활동을 자제해야겠군. 몽골인이 황궁 주변에서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주견하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곤란하니까.”
“네. 전하의 계획에 차질이 가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쉬는 동안엔 말이지…… 그 신수덕이라는 남자와 협의하던 걸 마저 계속해주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