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들의 여제(10)
이번에는 견하가 표정을 감추진 못했는지, 벨리사리오스는 당황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 이거 미안하군. 오해를 살 행동을 했어. 그렇지만 정말 그뿐이네. 옛날 일이야. 나는 누가 그녀와 사귀는지 보러 와서 거들먹거리는 그런 저열한 짓을 하러 온 게 아니네. 고려와 나의 인연을 강조하고 싶었을 뿐이야.”
열심히 해명하는 것을 보고 견하도 표정을 조금 푼다.
벨리사리오스의 말이 이어진다.
“오히려 질투한다면 내 쪽이 해야 하겠지. 그녀에게 청혼한 그 자리에서 거절당했거든. 뭐 어쨌든…… 그날 나는 태사의 ‘권력을 향한 열망’을 봤네.”
황자가 본 것은 견하도 익히 아는 것이다. 견하가 가장 좋아하는 리안의 눈빛은 그 열망에서 비롯되니까.
“나는 솔직히 부럽네. 그녀가 내 청혼은 거절하고, 그대를 연인으로 삼은 건, 나는 그녀의 권력 투쟁 파트너로서 부적합하고 그대는 적합하기 때문이겠지. 그래서일까. 조금 듣고 싶군. 그녀가 어떻게 권력을 잡았는지.”
견하는 간략하게 내전에 이르기까지 리안의 결단과 생각, 그리고 내전에 임하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그러면서 벨리사리오스의 보랏빛 눈을 살폈다.
비슷한 종류의 열망이, 이 남자의 눈에도 있다.
“……그렇군.”
벨리사리오스는 미소 짓는다. 그 미소는 뿌듯함과 아쉬움을 함께 담고 있었다.
“그날 이야기했던 것들, 태사께선 실제로 이뤄내셨군. 이것도 부러운 일인 걸.”
견하의 마음속에서 이 황자를 향한 경계보다, 호기심이 좀 더 커졌다.
“두 분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전하.”
“별 이야기는 아닐세. 그저, 어떤 나라 황자는 머릿속으로 몽상만 하던 것들을 잘난 듯이 떠들어댔고, 어떤 나라 재상의 영애는 그 열정과 아이디어를 듣고 수년에 걸쳐서 실행에 옮겼다는 것뿐. 그뿐인 이야기일세. 4년…… 4년 만에 이런 격차인가.”
견하는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갈피를 못 잡다가, 위로한답시고 이런 말을 건넸다.
“아직 전하께선 젊으십니다. 충분히 훗날을 기약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벨리사리오스는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자넨, 자넨 실로 고려인이군. 고려인의 사고방식이라 할만해.”
“무슨…… 말씀이신지?”
“아, 인종차별 같은 게 아니야. 그저 사회의 상부에 사는 사람들끼리도, 살아가는 세상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걸 느꼈을 뿐이지.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래, 주 국장은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나?”
‘자유세계.’ 벨리사리오스는 유럽 대부분의 국가와 아즈텍을 가리키는 말을 입에 담았다.
“뭐 그건 자네의 조국인 고려나 몽골, 혹은 바라트 같은 나라들에 비해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를 더욱 발전시켰다는 우월의식이 드러나는 표현이지. 그런데 일정 부분 사실을 드러내기도 해.”
로마의 황실이 고려나 몽골의 황실과 같을 순 없다.
“브리튼이든 신성 제국이든 로마든, 지속적으로 황실의 권한은 축소되어 왔네. 20세기에 이르러 우리 황실은, 정치적 영향력 자체를 완전히 상실한 건 아니야. 그렇지만 고려의 황제 폐하가 그렇듯이 외교의 전면에 나선다든가, 국가 정책의 큰 줄기를 정한다든가 할 수는 없지.”
벨리사리오스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도 의전적인 의미는 있네. 하지만 내 어떤 발언이나 행동도…… 결례를 범한다면 물의를 빚겠지만, 어쨌든 로마 정부의 정치적인 의향을 담은 것으로 취급되진 않네. 어디까지나 황자의 개인적 의견, 개인적 일탈이지. 그것도 황위 계승권에서 멀리 있는.”
견하는 방금 벨리사리오스의 입에서 나온 ‘황위 계승권’이라는 말을 곱씹어본다.
허투루 꺼낸 말이 아닐 것이다.
견하는 그 말을 자주 하던 다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녀와 눈앞의 황자를 겹쳐본다.
마치 견하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벨리사리오스는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의 황제는 당신의 황위를 위해 직접 투쟁에 뛰어들 수 있었지. 여기서 로마에도 형제간 견제는 있네. 하지만 그렇게 황위를 향한 투쟁이라든가 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지.
로마의 황실은 그저 로마의 장식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의 관광 상품이라 할 수 있을 지경에 이르렀다네.”
“허나 전하, 그것은 로마를 비롯한 ‘자유세계’가 나름의 경험을 통해 도달한 결론 아니겠습니까? 무굴의 황실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민중의 요구 앞에 쓸데없이 ‘장엄한 전통’을 고수하다 무너졌다.
“자유세계의 입헌군주정은 혁명이 황실과 사회를 완전히 붕괴시켜, 대혼란에 이르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국가적 타협이 아니겠습니까?”
브리튼도 신성 제국도 마찬가지다. 신성 제국의 현 황실인 보나파르트는 혁명으로 선 자들이니 더 잘 알겠지.
언제든지 자신이 혁명이 부르짖는 타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래, 자네의 말은 옳아. 공부를 많이 했군. 학자들도 그렇게 떠드니까.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멀리 떨어져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말이지. 당사자는, 그렇지 않단 말일세.”
자유세계, 라고 했다.
그 말이 이상하지 않냐고 벨리사리오스는 묻는다.
“전체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누군가의 자유는 희생해야 한다면, 그것을 자유세계라 할 수 있을까?”
마음껏 권력 투쟁을 하지 못하는 것도 자유의 희생인가, 견하는 그렇게 반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견하 자신이 권력 투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사람인데, 그런 식의 반론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벨리사리오스가 먼저 손을 들어 보인다. 그는 논쟁의 격화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나는 황실이 소수의 피해자라는 식으로 말하려는 게 아니네. 그건 어린애 투정이지. 자네의 황제나 태사처럼 권력을 향한 게임에 참전하지 못한다고 징징거리는 투정.
나도 로마의 그 어떤 인민보다 더 많은 부와 자유를 누린다는 건 알아.”
그저,
조금 답답함을 느꼈을 뿐이야, 라고 벨리사리오스는 덧붙였다.
“로마인인 또래 젊은이에게 이런 말을 할 순 없잖은가. 형님들도 마찬가지고. 역시 속을 터놓기에 외국인만 한 친구는 없어. 뒤탈도 없고.”
견하는 다시금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전하께 무척 큰 포부가 있음을, 잘 알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하지만 벨리사리오스와의 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목소리를 더욱 낮추고, 상체를 가까이하며 이런 말을 던진다.
“자네도 이단이지?”
“……예.”
부정하지 않는다. 견하와 리안의 사이, 루우의 야망에 대해 알고 있을 정도라면 견하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이 파악하고 있을 테니까.
그게 여기 모여계신 교양 있는 분들의 기본 소양인지, 벨리사리오스 개인의 정보력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느낀 답답함은 말일세, 내가 ‘이단’이라는 점에서 비롯된 것 같네.”
아까 ‘이단’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로마인의 입에서 나온 ‘이단’이라는 말에는 위화감이 감돈다.
로마는 종교적으로 완고한 나라고 들었다. ‘초능력자인 이단’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치기로 했다고 해도, 이런 자리에서 나눠도 되는 이야기일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벨리사리오스는 괜찮은 사람일까?
“아픈 상처를 헤집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칸발리크 테러’이야기는 들었네.”
견하의 뇌리에 작년의 광경이 빠르게 스친다.
밤이 계속되는 도시.
거대한 붉은 존재.
인간을 잡아 늘이고 뒤틀어버린 듯한 끔찍한 괴물들.
광기에 휩싸인 사람들.
“그 테러의 근본적인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나? 아니, 테러 자체를 예방하긴 어렵네.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겠군. 테러의 피해가 커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수많은 시민들이 죽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동아시아의 정치적 혼란상은…… 이 테러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몽골의 구심점이 되어 주어야 할 시레문도 테러로 목숨을 잃었으니까.
하지만 거기 얽혀있는 복잡한 사연은 외국의 황자에게 떠들만한 게 아니다. 그래서 견하는 침묵했다.
벨리사리오스의 이야기만 계속 듣기로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네. 만약 이단이었다면, 이단이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통치가 이루어졌다면 테러의 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하진 못해도……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세상은 이단이 아닌 자들의 상식으로 돌아가고 있네. 이단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일반인들이 통치하지. 그 통치의 원리도 일반인 기준이고. 하지만 생각해보게, 주 국장.”
일반인의 상식이 아니라 이단의 상식으로 통치가 이루어졌다면, 그런 기괴한 현상에 더욱 잘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떤가. 그럴싸한 이론 아닌가?”
“그 어떤 이단도 테러를 예측하진 못했습니다. 상황이 날로 악화되어 간 것도 이단의 상식마저 뛰어넘는 현상들이 연이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떤가. 이단들도 일반인들의 통치 방식에 익숙해진 거지. 일반인들의 상식에 물들었단 말일세. 자네의 폐하를 생각해보게. 얼마나 독실하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신자이시지. 나도 우리 정교회의 신자고.”
하지만, 이라며 벨리사리오스는 단호히 끊어내듯 말한다.
“그건 일반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습관적으로 익힌 신앙 아니던가. 그대도 알 텐데. 있지도 않은 신을 섬긴다는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아니, 설령 있다고 해도 여러 짐승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을.”
견하의 몸이, 로마에 온 이래 그 어느 때보다 굳었다.
벨리사리오스라는 이 남자는 인격적으로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마어마하게 위험한 남자다.
위험하지 않다면 이런 이야기를 애초에 꺼내지 않는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루우도 자유 분방하다곤 하지만 충분히 조심하지 않는가.
“영혼 없는 존재들이 영혼의 구원을 바라며 주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꼴이란. 그리고 그런 헛된 믿음 속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황제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전하.”
견하는 벨리사리오스의 말이 더 이어지는 걸 막으려 해 본다.
그러나 벨리사리오스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오랫동안 쌓아왔던 의문을 터트리듯, 그러나 비밀스럽게,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제국의 황자가 묻는다.
“나는 이단인 외국인 친구에게 좀 물어보겠네. 어떻게 생각하나? 왜 이단이 일반인들 위에서 통치하지 않는 것일까? 왜 세상의 거짓을 걷어내지 않는 것일까?”
벨리사리오스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하나의 질문을 더 던진다.
“이단에 의한 통치는, 상상 이상으로 멋질 거라 생각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