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들의 여제(9)
비서의 얼굴에 의아함이 감돌았다. 주석의 말이 담은 의도를 알기 어렵다는 눈치였다.
“우리가 확보한 ‘공산주의권’, 그 범위를 인정받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바라트를 뛰어넘는 연방을 창설할 수 있게 되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일대의 혁명 국가들을 모두 포괄하는 연방 말이야.”
지금 그 나라들은 바라트의 ‘위성국’ 신세다.
그러나 이번 평화회의에서 고려의 ‘다이온’ 창설 시도에 협력해 주면, 바라트도 위성국을 모두 포괄하는 새 체제의 설립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다.
“새로운 연방의 국호로는 ‘세계 혁명 연합’ 정도를 생각하고 있네.”
“세계 혁명을 향한 열정이 느껴지는 국호입니다, 동지.”
과장된 열기를 띠고 있는 말이었지만, 아슬란은 가볍게 웃어넘기기로 했다.
“고려처럼 당장 인민투표를 하긴 어렵겠지. 하지만 혁명 국가들의 지도부 동지들을 모두 델리로 불러 모을 수는 있을 거야. 다양한 의견이 오갈 수 있는 자리를 델리에 마련하겠네. 이젠 변화할 때가 됐어. 새로운 세계 혁명을 향한 쇄신의 때가 됐단 말이네.”
물론 고려 내부의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이 자신의 노선에 반기를 들었을 때는 격노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배후 조종을 받은 몽골의 좌익이 고려 쪽으로 붙었을 때도…….
하지만 고려 쪽에서 의외의 접근을 해 왔다.
“우리의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지배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동쪽 세력권을 버마까지 확장하는 것도 용인하겠다더군.”
국경의 안정은 곧 체제의 안정이다.
안정된 체제가 국제무대에 복귀하면, 경제적 교류도 재개된다.
바라트 연방이 앓고 있던 경제적 불균형을, 해외 경제 교류로 완화한다는 구상이다.
“자본가들과의 결탁은 많은 논란과 비판을 부르겠지만, 동시에 세계 노동자들과의 접촉할 기회도 넓혀주겠지.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인 셈이네.”
아슬란이 들고 있는 연설 초고 또한 이러한 계획을 중앙위원들 앞에서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치 낭만적인 혁명가 시절로 돌아간 것 같구먼.”
말하다 보니 신이 난다. 그렇다. 그때는 그랬었다. 초대 주석이나 총서기와 밤새도록 격하게 토론하며 혁명의 미래를 그렸었다.
그러나 아슬란은 곧 미소를 지웠다.
국가원수로서 현실적인 판단을, 그는 결코 잊지 않았다.
“버마까지, 라는 말은 그 근처까지 고려도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말이지.”
완충지대를 얼마나 둘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다이온’에는 분명 거대한 야심이 얽혀있다는 것을, 아슬란은 그 지성을 바탕으로 직감했다.
***
비행기는 고려를 출발해 몽골, 카자흐, 사라이를 지났다.
고된 여정이었다. 만약 이 여행이 기차로 이루어졌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견하는 확신했다.
아무리 열심히 운동하며 체력을 단련한다 해도, 피곤한 건 피곤한 거니까.
아래로 흑해가 내려다보일 무렵에, 견하는 잠에서 깼다.
“보게.”
조유관이 웃으며 창밖을 가리켰다.
“로마인들은 자기네 수도를 ‘도시들의 여제’라 부른다지. 정말 그런지 한 번 봐두게나.”
멀리 육지가 보였고, 바닷가에 바싹 맞닿은 도시는 다른 나라의 대도시들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높은 빌딩이 밀집한 구역이 있고, 낮은 건물들도 빽빽이 들어찼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견하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바로 위를 날아갈 수는 없었지만, 도시에서도 바다와 가까운 저 넓은 부지는 그 ‘대황궁’임이 분명했다.
첫인상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화려함에서 오는 감탄도 아니고, 이국 문물에 대한 동경도 아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서야 그 기묘한 느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왜 리안이 이 도시를 ‘오래됐다’고 표현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낡아빠졌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마치 영화 세트장 같네요.”
“고대나 중세를 무대로 한 역사극 말이지.”
조유관이 맞장구쳤다.
건물의 양식, 벽면의 질감, 도시 전체의 배치가 현대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있었다.
분명히 도로는 차량이 다닐 수 있는 포장도로고, 곳곳에 허공을 지나는 전선이 놓여 있었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현대인이었지만…… 어쩐지 시간을 뛰어넘어 옛 도시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다.
“‘여제’라는 별명은 화려함이나 번영만 가리키는 게 아니었어요.”
고고함.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우리는 세계를 지배한 제국의 수도라는 고고함이 도시 전체에 깃들어 있었다.
카라코룸 역시 오래된 도시이긴 했지만 콘스탄티누폴리보다는 역사가 짧았다. 게다가 선대 카간인 시레문의 정책으로 공업도시라는 인상이 더욱 짙다.
“흠.”
조유관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멈칫한다.
“이런 대접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황족일세. ……황자군. 계승 순위는 낮지만.”
견하도 미리 주요 인사들에 대해서는 살펴뒀기 때문에, 마중 나온 사람이 누군지는 알아차렸다.
원래 나오기로 했던 로마 외무성 장관과 함께, 여덟 번째 황자, 벨리사리오스가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여덟 번째라고는 해도 포르피로옌니토스라 불리는 아주 ‘존귀한 분’이다.
황후가 특별한 보랏빛 산실에서 낳은 적자를 가리키는 그 말.
현 황제도 포르피로옌니토스이기 때문에, 지금 로마에는 모두 9명의 ‘존귀한 분’이 있는 셈이다.
그런 분 중 하나가 몸소 나와 맞아주다니, 일단은 몸가짐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만 견하는 벨리사리오스의 인상을 재빨리 훑는다.
견하보다 조금 더 큰 키.
보랏빛 눈동자.
직감적으로 느낀다.
이 남자, 이단이다.
“……융숭한 대접이라고 기뻐해야 할까.”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래야겠죠. 무슨 의도인지는 슬슬 캐보고요.”
조유관과 견하는 그런 말을 속삭이며 걸어 나갔다.
벨리사리오스도 몇 걸음 마주 걸어 나오며, 환하게 웃었다.
마중 인사로는 아주 적절한 태도다.
“로마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머나먼 동방에서 오신 귀한 손님 여러분. 원래는 여기 외교관이 따로 여러분을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고려에서 오신 손님들만큼은 제가 대접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황께 졸랐습니다.”
마치 자신이 철없는 요청을 했다는 듯한 겸손한 표현이지만, 오히려 이쪽이야말로 격을 높인 융숭한 대접에 감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남자…… 상당히 유창하게 고려어를 말하고 있다.
“무슨 말씀을. 전하께서 친히 마중을 나와주시니, 그저 장관급에 불과한 저에겐 무한한 영광입니다.”
예의를 가득 담은 인사가 오가고, 벨리사리오스 황자는 부드러운 몸짓으로 그들을 차로 안내한다.
“그런데 특별히 우리 고려 쪽 대표단을 이렇게 대접해주시는 이유를 여쭈어도 될는지요?”
조유관은 조심스레 묻는다. 벨리사리오스는 별다른 이유는 아니라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고려는 제 옛 친구의 나라니까요.”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견하를 바라본다.
“자네가 주견하 국장이군. 그녀는…… 아니 태사 각하께서는 내전에서 승리하고 마침내 권력을 잡았다지. 고려로 돌아간다면 축하드린다고 전해주겠나?”
견하는 벨리사리오스가 갑자기 리안을 화제로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조금 당황했다.
“아, 예.”
벨리사리오스는 다시 조유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덧붙였다.
“아, 지금 발언은 로마의 공식적인 입장이라기보다는, 제 개인적인 축하입니다. 그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해합니다. 고려 내전과 그 결과에 대해서는, 평화회의에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야겠죠.”
“그래도 귀띔을 좀 해드리자면…… 로마 측에선 일단은 우호적인 분위기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자유세계’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좋아하니까요.”
황자의 가벼운 농담에 조유관도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오랜 전통이 있는 황실도 회복했지요. 마찬가지로 역사가 깊은 황실을 둔 로마에서도 긍정적으로 보리라 생각합니다만.”
“아, 그 점도 축하드려야죠. 당장 평화회의에서는 급한 외교 현안들만으로도 바쁘겠습니다만…… 황실 또는 왕실 간 교류도 세계 평화에는 중요하니까요.”
유럽에서는 특히 그렇다고 들었다. 유럽의 군주들이 서로 인척이 되면 전쟁을 예방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나라 간 갈등이 고조되어도 군주끼리 친근감을 담은 서신,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촌 브리튼의 왕에게, 칼마르의 왕이……” 하는 편지를 교환하기만 해도 평화가 유지되리라 믿는 사람들이 있다.
가장 역사가 짧은 보나파르트 황실도 각국과 인척 관계를 맺은 이후, 아직까지는 잘 잘 작동하는 체제 같지만…… 과연 얼마나 오래 갈까.
견하는 다소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차는 다리를 건너, 갈라타 지구에 있는 호텔로 향했다. 고려 측 대표단은 여기에 머물 예정이었다. 평화회의는 옛 도시 성벽 근처 블라헤르나이 황궁에서 열린다.
“만찬을 준비해뒀습니다. 쉬고 계시면…… 저녁에 따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나름 황자가 준비한 만찬인 만큼 꼭 참석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당연히 초대를 거절하는 결례를 범할 수는 없었다. 조유관은 흔쾌히 응했다.
그러나 초대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벨리사리오스는 다시 견하 쪽으로도 고개를 돌렸다.
“그대도 와주겠는가, 국장?”
***
로마 제국의 경호가 나름 철저하다고 판단했기에, 견하는 조유관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만찬도 한창 무르익어, 고려 측 대표단과 로마 측 인사들이 곳곳에서 환담을 하고 있다.
견하가 나설만한 자리는 아니다.
살벌한 냄새를 풍기며 위협적으로 이빨을 드러낼 자리는 따로 있다.
견하는 그저…… 눈에 띄지 않는 젊은 친구 중 하나로 시간을 떼우면 충분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기만을 기다렸네.”
옆에 다가와 앉는 남자는, 벨리사리오스 황자였다.
“또래 남자가 드무니까 말이지. 있어도 다들 황자 대접해주느라 원하는 이야기를 나누긴 어려워.”
씩 웃는 그에게, 견하도 예의 바른 미소를 보냈다.
의도가 수상쩍긴 해도, 여기는 최대한 ‘우호’를 다지러 온 자리다. 어떤 식으로든 착한 아이로 있어야 한다.
“‘원하는 이야기’라고 하신다면, 어떤 이야기인지 몹시 궁금합니다, 전하.”
“미리안 태사에 관한 이야기지.”
견하는 굳어버리려는 표정을 간신히 의아한 얼굴로 바꿨다.
이 남자의 관심은 뭔가 이상하다.
리안에 대한 이 남자의 관심은…… 그저 우호국의 정부 수반을 향한 것만은 아니다.
“저희 태사께 관심이 많으신 듯하군요.”
“옛 친구기도 하고, 전에 그녀에게 청혼한 적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