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들의 여제(7)
동인이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견하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마치 동인이 듣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로.
“대학생 조직은 제국입헌당이나 고려국민당에서만 관심을 두는 게 아니야. 사회민주당, 공산당…… 그 외 기타 잡다한 군소 정당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어떻게든 대학에 자기네 학생운동 조직을 심으려고 하지.”
고려의 정당 정치는 이제 막 3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정당 자체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있었다.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못다 핀 정당 정치까지 따지면 그 역사는 세계대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승휴의 대대적인 탄압 이후, 민국정부의 각 정당은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또 한편으로는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대학에 접촉했다.
당, 그리고 민국정부의 생명력을 이어나가려면 ‘젊은 동지’들이 계속해서 들어와야 했으니까.
그리고 사회의 주축으로 성장할 대학생들을 영향권 안에 두어야, 탄압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고 훗날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각 정당의 정치인들은 자기네 후배들과 연을 잇는 방식으로 자기네 운동에 끌어들였어. 내전 이전에도 그렇지만, 세대가 젊어진 지금은 더 그렇지. 당장 안세규 내무장관만 해도 그렇잖아?”
동인은 내무장관의 이름까지는 잘 모른다. 사실 지금 눈앞에서 견하가 하는 말도 잘 이해하진 못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항상 주의하라고 했던 게 있다.
테러단체인 고려민국 임시정부인지 뭔지에는 절대 얼씬도 하지 말라고.
그것은 2년 전 ‘그날’까지 견하도 종종 듣고 살았던 말이다.
동인은 안세규라는 이름까지는 몰라도, 고려국민당이니 공산당이니 하는 단체들이 이제 불법이 아니라는 건 안다.
시대가 변했다. 테러단체는 이제 제국 정부의 한 축이 되었다.
부모님이 당부했던 철칙들은 이제 낡은 것이 되었다.
그런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동인은 대학생이, 성인이 됐다.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에서도 대학생 조직을 지원하지만, 가장 세력이 큰 대학생 조직은 역시 고려국민당이 지원하는 ‘대학생 총연합’이었지. 학생일 때는 미승휴 정권에 반대하는 단체행동을 하며 경험을 쌓고, 졸업하고 나서는 고려민국 임시정부로 향하는 계단이었다고 해.”
지금 그 총연합이라는 조직은 합법화되고 나서,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느슨해졌다고 한다.
각 대학에 있던 지부들은 정치토론 동아리로 변했다. 그렇지만 옛 연합의 조직망은 여전히 그 동아리들을 하나로 묶고 있다.
“그 동아리들에선 민주주의와 공화정에 대한 연구,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
고려 제3제국 체제는 어쨌든 군주권의 제한,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른 참정권 등을 표방한다. 그런 활동 자체를 막을 구실은 이제 없다.
“그것도 하나의 양성 과정이라고 봐야겠지. 고려국민당은 뛰어난 이론가나 행동가, 혹은 둘 다 겸비한 인재를 얻게 될 거야. 그런 사람들이 당으로 들어와도 이득이고, 정치에 뛰어들지 않아도 향후 당을 지지하는 여론이 되지.”
이전 시대의 대학생 조직이 민국 정부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정권 장악을 위한 수단이다.
“이대로 향후 수십 년, 아니 10년만 흘러도 대학생들 사이에선 민주주의와 공화정은 상식이 될 거야. 그들이 기성세대가 되고, 또 후배들을 양성하는 이 순환 구조가 제대로 자리 잡는다면…… 고려국민당의 집권도 꿈은 아니겠지.”
그때는 태사의 독재 체제도 해체된다.
황실 폐지 논의도 심심찮게 나올 것이다.
“누군가에겐 이상적인 나라의 모습일지도 몰라. 어쩌면 그게 이 나라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일 수도 있지. 태사께서도 민주주의에 별다른 반감은 없으시니까.”
그 말은 동인에겐 의외였다. 미리안 태사는 물려받은 체제와 권력을 영구히 지키고 싶어하는 줄 알았는데?
동인의 얼굴에 드러난 의아함을 읽었는지, 견하는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뭐, 그거야 태사께선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계속 집권할 자신이 있으시니까 하는 말씀이겠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주견하가 태사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소문은 사실인 것 같다.
신입생 환영회 때는 단둘이 데이트를 나갔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나도 딱히 이 입헌군주정 체제에 애착이 있는 건 아니야. 그러나.”
견하의 어조가 바뀐다.
오싹한 느낌에 동인은 어깨를 움츠렸다.
곁눈질로 이익서 선배의 얼굴을 본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이익서도 긴장한 것 같다.
“그들이 바라는 세상은,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아.”
딱 잘라 말한다.
견하의 눈에서는 독선 혹은 신념……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자신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이 느껴진다.
마치, 동인이 성인이 되기 한참 전에 견하는 먼저 어른이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견하는 자신과 같은 나이이면서, 어떻게 저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을까?
“내게는 제국입헌당이 계속 집권하는 쪽이 이상적이야. 그리고 그 집권을 위해선 입헌군주제, 황실과 전통도 영속해야 하지.”
그런데 그걸 지지하는 대학생 모임은?
고려국민당이 주도하는 조직에 비해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제국입헌당 의원 대다수는 그런 게 필요하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이 당은 그저 미승휴 정권에 붙어 있던 유력인사들이, 새로운 체제에 맞춰 일단 ‘당’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본 것이니까.
당의 미래, 당의 조직을 위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현실감이 없는 사람이 태반이다.
그들은 내전에서 미리안을 지지한다는 선택 하나를 잘했을 뿐이다.
미리안이 지도하는 대로 출마하고 당의 이름 덕분에 당선된 인간들.
“선거가 내년으로 다가오니까 발등에 불 떨어진 것처럼 난리지. 그런데 막상 흉내 내서 만들어보려니까 이건 뭐…… 학생운동이 건방지다고 밟을 줄은 알았지 조직화할 줄은 전혀 모른단 말이야. 하긴 자기가 속한 당의 시스템도 파악 못 한 사람들이 그런 걸 어떻게 하겠어.”
때문에 태사부 정치경찰실, 특히 주견하의 감찰국이 주도해서 만들어둔 학생운동 조직에 기댈 수밖에 없다.
“물론 역사가 20년이 넘은 민국 정부 계열의 학생조직을,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는 없다고 봐. 하지만 우리에겐 다른 든든한 배경이 있어.”
“……고려국민당이 옛 ‘대학생 총연합’의 조직망을 활용하는 것처럼, 우리도 태사부의 지원을 받는다는 말이지.”
말없이 앉아있던 남학생, 한재연이 설명을 덧붙였다.
이 자리, 동인을 제외한 세 사람은 모두 동인과는 다른 세계에 산다.
동인은 홀로 낯선 세계에 떨어진 듯한 고립감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느낀다.
술기운도 조금 돌고 해서인지, 고양감이 몸을 감싸는 듯도 하다.
견하는 다시 한번 동인 쪽으로 손을 내민다.
“어떻게 할래? 정부 지원받아가면서 동아리 활동해 보겠어?”
내가 이런 거창한 일에 참여해도 좋을까. 동인은 망설인다.
나는 그저 다른 사람들과 친목을 다지고 싶었을 뿐인데.
저 제안을 수락하고 나면, 분명 ‘평범한 대학 생활’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삶의 방식도 지금까지와는 달라질 테고.
그러나, 모험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재미있을 것 같다.
‘아니오’라고 말하면 어색한 분위기가 될 거라는 두려움보다, ‘예’라고 말했을 때 기다릴 일들이 마음 한구석을 간질인다.
“하죠. 까짓거.”
동인은 견하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견하의 미소가 ‘도발’에서 ‘만족’을 표현하는 쪽으로 바뀐다.
***
원동인은 동아리 방을 나갔다.
남겨진 세 사람 중 둘은, 리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달리 새로운 임무랄 건 없어. 오늘처럼 새로운 사람을 끌어들이고, 세력을 확대하고, 각 대학 조직의 결속력을 강화해나가면 돼.”
무슨 무력으로 동원하려는 건 아니니까, 라고 견하는 덧붙였다.
이것은 철저히 사회적인 힘이다.
“중요한 건 논리야. 당장 고려국민당과 대립 구도를 세울 필요는 없지만, 그들의 공화정에 대항할 이론을 탄탄히 구축하는 게 중요해.”
이론. 이상. 이데올로기.
같은 것을 공유하는 학생들의 유대.
견하의 말대로 고려국민당과 당장 대립할 필요는 없다. 고려국민당은 제국입헌당과 함께 연합 정부를 구성하고 있으니까.
고려국민당을 친다면…… ‘쳐도 무방한’ 순간이 왔을 때다.
그때까지는 힘을 기른다.
“조직화에 대해서 거창하게 떠들긴 했지만, 구 민국 정부 계열 정당들에 비하면 아직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정당이란 사회의 변혁, 개혁, 혹은 혁명을 추구하는 자들에 의해서 체계화되어 왔으니까.”
재연의 말마따나, 구 제국 정부는 정치적인 변혁보다는 미승휴 정권의 안정을 추구해왔다. 때문에 정당 조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일단은 배울 필요가 있다.
“민국 정부 초기에 바라트 공산당의 조직화 모델을 참고했던 것처럼 말이지.”
“허동주도 천손민족협회를 정당 조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바라트 공산당 모델을 공부했던 것 같아.”
아이러니하지만, 바라트 공산혁명의 성공과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의 성립은 그 적들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바라트 공산당은 기존 무굴 제국 황실의 감시와 탄압을 무력화하고, 미약한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끝내 혁명을 성공시켰다.
이 과정에서 바라트 공산당은 당 조직화의 극한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받는다.
그 과정은 폭력의 피비린내, 비열한 음모의 악취로 뒤덮여 있지만…… 기존 체제를 변혁하려는 자들의 교과서이기도 하다.
그 교훈은 이념의 방향성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AN연구소에서는 당의 조직화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고 있겠지?”
“당연히. 나도 천손민족협회에서 배웠던 걸 활용하고 있어.”
견하는 재연의 말에 이익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이익서는 천손민족협회와의 내전에 참전했던 남자다.
요컨대, 내전 시절 한재연과 이익서는 적이었던 사이.
둘 사이의 우애와 화합은 바라지 않는다. 다만 그게 조직 내의 다툼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있겠지.
혹은, 저 갈등을 활용해 두 사람의 충성 경쟁을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주 적절한 고삐로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익서는, 아까도 말했지만 조직의 확대에 집중하고, 한재연 너는…… 조직화에 힘써 줘.”
“장기적으로는, ‘우리가 제국입헌당의 주축’이 되는 겁니까?”
익서의 질문에 견하는 씩 웃었다.
“그렇지. 선대 태사와 같은 세대의 의원들도 나름 당 조직화에 관심을 두고는 있어. 하지만 그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의원 나으리’라는 직함을 유지하는 것뿐.
이데올로기도 당의 정신도 고민하지 않는 인간들은 여기에 불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