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들의 여제(6)
신입생 원동인은, 제1대학교 입학을 ‘해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고등학생 때와는 다른, 대학생다운 뭔가를 해보고 싶었다. 그러려고 지금까지 이를 악물고 입시 경쟁을 견딘 것 아닌가.
더 좋은 대학에서, 더 좋은 환경을 누리고 더 나은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뭔가 ‘세련된’ 일을 해보고 싶었다.
왜 그런 일 있잖은가. 여자애들한테서 ‘멋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일들. 다른 애들과는 다른 ‘나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
학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지성인’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일들.
그래서 원동인은, ‘대중문화연구회’라는 적당한 동아리를 골라 들어갔다.
실상은 그냥 틈나는 대로 영화를 관람하고 노는 동아리에 그럴싸한 이름을 붙인 것 같지만, ‘산악회’나 ‘정치연구회’같은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런 곳은 ‘세련된’ 일과는 거리가 멀거나, 지루한 사람들만 잔뜩 모여 있을 테니까.
적당히 교우 관계를 넓히고, 학교와 도서관과 집만 오가는 생활보다는 나은 뭔가를 하기엔 적합한 곳인 것 같았다.
동아리의 회장 선배는 ‘이익서’라는 사람이었다. 군대도 다녀온 모양이다. 그렇다면…… 지난 내전에도 참전했던 걸까.
저 쾌활한 얼굴을 보면, 전쟁터에 있었던 사람이라곤 느껴지지 않지만…….
물론 동인에게 내전은 동명시에서 시가전이 벌어지던 초반이 전부였다. 그는 전쟁에 참여한다는 게 어떤 건지 모른다.
동인은 판단을 미루기로 한다.
“자, 여러분 환영합니다. 우리 동아리는 ‘대중문화연구회’라는 다소 딱딱한 이름이지만, 영화나 소설 등 각자 좋아하는 대중문화를 즐기고 그 감상을 공유하는 모임이에요. 학교에서 제적당할 일만 아니면 뭐든 괜찮습니다. 앞으로 즐거운 활동, 계속 이어나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역시 실상은 그랬나. 불만은 없다. 동인이 원하는 동아리에 딱 알맞는 활동 방침이었으니까.
회장인 이익서, 그리고 그와 함께 동아리를 이끌고 있던 다른 선배들이 선배의 환영 인사를 한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동아리라니까, 저 선배들도 새내기 때부터 여기 있진 않았을 것이다. 이익서 선배가 데려왔겠지.
“우리 모두 이제 친하게 지내야 하니까, 자기소개 시간을 갖도록 할까요?”
조금 어색하긴 해도, 이익서 선배는 사회자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
동아리에 들어온 신입생들은 차례로 일어나서 자기 이름을 말하고, 잘 부탁한다는 식으로 형식적인 인삿말을 한 뒤 자리에 앉는다. 쑥스러운 웃음과 함께.
그 절차를, 원동인도 그대로 했다.
그렇게까지 주목받지는 못한다는 깨달음이 찾아온다. 일어나서 말을 하니까 다들 쳐다보긴 했지만, 다음 사람이 일어나자 금방 흥미들을 잃어버린다.
-차근차근 친해지면 되겠지.
하지만 초조감이 밀려온다. 이대로 그냥 조용히 구석에 앉아있는 사람…… 으로 있다가, 동아리에 안 나와도 아무도 모르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진 않다.
“……주견하입니다.”
아, 쟤가 걘가.
이번 신입생들은 ‘황제 폐하’와 동기라는 이유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특히 저 주견하라는 남학생은 황제 폐하의 친구라고 들었다. 4학년 선배이기도 한 태사 미리안의 연인이라는 소문도 있고.
황제 폐하는 동아리 활동은 안 하는 건가.
하긴 바쁘신 분이겠지. 동아리 활동까지 하기엔 주변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할 테고.
동인도 황제와 친목을 다진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린 건 아니다. 그래도 조금 아쉽다. 황제는 꽤 귀여운 여자애라고 들어서, 가까이에서 실물로 꼭 보고 싶었는데.
자기소개가 끝나고선, 빌린 강의실을 정리하고 자리를 옮기기로 한다.
-또 술자리인가.
진짜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지겹도록 갖는 것 같다. 술과 밥, 고기가 쉽게 분위기를 띄운다는 건 인정하지만.
동아리 선후배들이 함께 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조명이 적당히 어둑한 음식점이었다. 술, 그리고 탕을 비롯한 안주를 파는 곳.
나무 의자는 딱딱해서 불편하기 짝이 없다. 식당 벽은 분위기를 위해서였는지 통나무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서, 마치 오두막 같다.
그 벽에 음식을 조리할 때 나온 연기와 기름이 스며들어 끈적해 보인다.
그런저런 불평들이 머릿속으로 떠올랐지만, 원동인은 싱글벙글 웃음 지으며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시시한 대화들 속으로 녹아든다.
여기서 그냥 이 모든 게 즐겁다, 그런 얼굴을 하지 않으면 눈치 없는 인간이 되니까.
지겹다 혹은 시시하다,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즐겁기는 하다. 모순된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다. 왜 또 이렇게 놀지 싶으면서도, 노는 건 즐겁다.
통제와 제한이 없는 인간관계. 고등학생 때와는 다르다. 책임이 온전히 자기 것이 된 만큼, 어떻게 놀지, 누구와 친해질지도 자신의 재량에 달렸다.
그렇게 왁자한 분위기 속, 어느새 깔깔대며 서로를 놀려대는 ‘친구’들 틈으로, 구석에 앉은 한 남학생을 본다.
아까 그 녀석이다. 유명한 사람, 주견하.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앉아있다. 대화를 주도하지는 않고, 적극적으로 끼어드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으며 끄덕인다. 때때로 웃음을 터트리기도 한다.
황제나 태사와 친한 엘리트 계층이라서 무척 오만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소탈하다.
견하에 대해서 미리 들은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동인은 그를 그냥 좀 잘생긴 남학생이라고만 생각했겠지.
다소간의 부러움과 질투심을 느끼며.
지금 느끼는 이 위화감도 편견일지 모른다.
저 사람이 태사의 최측근이자 연인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동인 혼자서 견하의 저 모습 너머에 있는 뭔가를 탐색하려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웃음이 의미심장해 보이는 것도, 동인이 가진 편견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익서 선배 쪽을 돌아본다. 선배는 너덧 명쯤 되는 신입생들 틈으로 들어가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다.
주견하가 동아리에 가입한다는 사실을 듣고, 회장 선배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냥 동아리를 유명하게 만들고, 잘생긴 데다 권력까지 있는 남학생을 통해 여학생들 여럿을 끌어들이려는 계산뿐이었을까?
혹은…… 이건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회장 선배는 사실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배후에는 저 주견하라는 남자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러고 보면, 주견하가 이익서 선배를 보는 눈길은, 마치 그 선배가 동아리를 잘 운영하고 있는지 ‘감독’하는 것 같지 않은…… 가?
주견하와 눈이 마주친다.
이런. 너무 뚫어져라 보고 있었나 보다. 동인은 흠칫 놀란 시선을 돌렸다.
주견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 오늘은 그만 돌아갈 생각일까?
아니, 술잔을 들었다. 이건…… 자리만 옮길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주견하는 동인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원동인? 날 계속 보고 있던 것 같은데. 무슨 과야?”
이름까지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동인은 견하 쪽으로 고개를 조금 돌렸다.
견하가 먼저 술을 따른다. 동인도 병을 받아 견하의 잔을 채운다.
“고려어문학과인데……”
“오, 문학? 소설? 시? 영화 쪽에도 관심이 있어서 여기 들어온 거야?”
“뭐, 그렇지. 굳이 따지자면 소설 쪽이고.”
주견하는 소설 제목 몇 가지를 이야기한다. 들어본 작품도 있고 아닌 작품도 있다. 생각보다 책을 많이 읽는 것 같다.
“황제 폐하의 친구라는 사람이 책도 많이 읽는구나, 하고 생각했어?”
“어? 아니, 그…… 책 많이 읽는다는 생각은 했는데.”
“황궁은 교양이 많이 필요한 공간이니까.”
견하는 쓴웃음을 짓는다. 지금 한 말은 2년 전에 견하가 양수영 앞에서도 했던 변명과 비슷했으니까. 견하는 자신이 참 창의성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 황제 폐하의 친구라는 소문은 사실이야?”
“사실이야. 태사와 사귀고 있는 것도, 감찰국장이라는 감투를 얻어 쓴 것도…… 사람을 죽여본 것도?”
말을 뱉고는 킥킥 웃는다.
그러나 동인은 견하의 말이 끝나고 웃음이 나오기 직전, 그 잠깐 스쳐 지나간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이 녀석, 나를 살피고 있다.
“대단한 건 아니야. 내전 중이었으니까. 누군가는 겪었을 일이지. 저기 있는 ‘이익서 선배’도 사람 쏴 본 적은 있을 거야. 평양 전투에도 참여했으니까.”
주견하는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는 걸까. 동인은 주견하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한다.
위험한 인간이다. 이 인간 속에 들어 있는 건 내 또래의 친구가 아니다. 원동인은 직감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감찰국장’이라는 사람은 나를…… 끊임없이 평가하고, 그 평가에 선을 긋고 수정하고 재작성하기를 반복한다.
객관적으로는 짧은 시간이지만, 동인에겐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몇 초가 지났다. 등줄기가 촉촉해졌다.
견하는 뭔가 결심했는지 술을 쭉 들이켠다.
“이 자리 끝나고, 같이 동아리방으로 돌아가자. 이익서 선배도 올 거야. 할 이야기가 있어.”
아니, 그냥 집에 가 볼게,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인은 자기도 모르게 끄덕이고 말았다. 그건 주견하의 압박감에 그런 걸까, 아니면…… 이것을 어떤 ‘기회’라고 포착한 자신의 직감이 그렇게 한 걸까.
모르겠다.
술자리가 끝나고 동인과 견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뒤쪽에서 자연스레 이익서 선배가 합류한다. 선배는 아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말없이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동아리방의 불을 켜자, 또 다른 남학생이 앉아있었다. ‘쟤는 누구지’라는 물음 이전에, 그 외모에 대한 감탄이 먼저 나오는 사람이었다.
“새 식구 데려온다더니, 쟤야?”
“음, 새내기치고는 적당해. 너무 철없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냥 소심하지도 않고.”
“얼마나 잘할지는 지켜봐야겠습니다만. 동인이 쪽에서 거절할 수도 있고요.”
이익서 선배가 존댓말을 쓴다. 동인은 그게 낯선 남학생을 향해 쓰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이익서는 주견하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다.
두 사람의 상하관계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당황스럽겠지만, 이해해주길 바라. 우린 좀 ‘위장’을 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
“무슨…… 그냥 동아리가 아니었던 거야?”
“동아리인 건 사실이야. 영화도 보고, 감상회도 열고, 아까처럼 술도 마시고 연애도 하고 노는 거지. 다만, 이 동아리의 활동 목적을 모든 동아리 회원들이 알고 있는 건 아닐 뿐이야.”
몇 명만 아는, 활동 목적.
“너도 나랑 동갑이니까 들어는 봤겠지. ‘고려민국 임시정부’라고.”
기억난다. 테러단체라고 했었는데, 내전이 시작되고, 어느샌가 미리안 태사의 새 정부에 합류한 단체.
“그쪽에서 전국의 대학교를 중심으로 열심히 학생 조직을 확대해왔거든. 그 힘으로 정치적인 영향력도 행사하는 거고.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까…… 우리 여당인 제국입헌당에서도 그런 조직망이 부러워진 거야.”
동인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견하 네 말은, 아니, 감찰국장님 말씀은…… 제국입헌당 아래 대학생 조직에 참여하라, 는 건가요?”
“존댓말은 상관없지만 다른 학생들 앞에선 아까처럼 편하게 대해줘. 그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맞다’야. 어떻게 할래.”
동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