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들의 여제(5)
견하는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정리하며, 술잔을 살짝 기울였다.
“공산권 확대 문제도 로마의 동쪽 국경을 괴롭히는 문제이니만큼, 우리가 바라트와의 무역 협정을 회의에 올리면 아주 민감하게 반응할 거야.”
“조유관 장관은 ‘버마까지는 양보한다’고 했었죠.”
“그래. 그런데 비슷한 조건을 로마도 내걸겠지. 페르시아의 공산 정권은 인정하지만 아라비아에서 공산혁명을 시도하지는 말라든가, 사라이나 아르메니아, 사카르토벨로는 확실히 로마의 세력권이니 침범하지 말라든가 하는 식으로.”
그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로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라트와 고려의 협상을 방해하려 들 것이다.
“고려가 공산권과 타협하면서 바라트의 숨통을 틔워주는 바람에, 공산권이 여유롭게 서쪽으로 전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단 말이지.”
루우가 한마디로 정리해준다. 견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묻는다.
“하지만 로마가 그렇게 종교 문제에 민감하다면…… 아라비아 칼리프국에서의 공산권 확대는 묵인해도 되지 않나요? 공산주의자면 무신론자잖아요. 잘 활용하면 이교도를 확실하게 뿌리 뽑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무신론이 뭐 종교권 가려가면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닌 데다, 이슬람과 공산주의의 기묘한 배합물이 나올 우려도 있으니까. 그게 더 위험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아라비아 공산화가 이루어지면 로마 제국 내 공산주의자들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할 거야.”
그런가. 로마인들은 이슬람만큼이나 공산주의도 경계하고 있는 거군.
하긴 이슬람도 무너뜨렸다면 동방 정교회라고 못 무너뜨릴 게 무엇인가.
루우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아, 하며 견하를 본다.
“종교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만약에…… 누가 네가 이단인 걸 알고 접근해온다든가, 혹은 로마의 이단과 접촉하게 되면, 주의해야 할 게 있어.”
“이단 문제가 로마의 종교랑 관련이 있다는 거야?”
그런 견하의 물음 속에는 ‘로마의 군사 기술이 아니라?’라는 질문이 함축되어 있었다.
루우는 진지한 얼굴로 손가락을 세운다.
“내가 재작년에 학교에서 너 훈련시키면서 했던 말 기억해?”
잊지 않았다. 서슴없이 견하 앞에서 속옷을 보이고 샤워실로 들어가던 그녀를 어떻게 잊겠는가.
그때 받은 강렬한 인상만큼이나, 그녀가 했던 말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퇴계 이황…… 성리학을 통해서 이단에 대해 설명해줬지.”
“그래. 그런 설명 방식은 직간접적으로 성리학의 영향을 받는 모든 나라에서 통용되는 상식이야. 하지만…… 로마는 달라.”
루우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퇴계 이황이든 율곡 이이든 동아시아에서만 성현일 뿐…… 자기네 종교적 전통이 강한 로마에선 어디까지나 ‘이교도’일 뿐이다.
“크리스트교에서 이단의 초능력을 설명할 방법을 찾으려다 안 되니까 고대 종교까지 들춰본다고 했던가.”
크리스트교의 논리대로라면 초능력은 ‘주께서 내리신 은총’이라고만 하면 끝이다. 그러나 그걸 군사 분야에서 활용하고 싶은 로마 제국 정부가 원하는 건 그런 간편한 설명이 아니다.
“그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말이야. 그리고 이 방향에서의 연구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고 알고 있어.”
효윤이 ‘잠깐’이라며 루우의 말을 끊었다.
“말이 이상한데. 로마인들은 종교 문제에 민감하다면서.”
“그러니까 그 사람들도 초능력자를 ‘이단’이라고 부르지.”
엄밀히 따지자면 동아시아에서 말하는 이단과 크리스트교권에서 부르는 이단은 의미가 조금 다르다. 그렇지만 실로 적절한 번역이 아닐 수 없다.
“뭐, 그리스-로마 지역의 전통문화 취급하는 정도로 타협을 본 것 같긴 해. 이게 지금도 종교로 기능하고 있어서 교회에 위협이 된다면 모를까, 그런 건 아니니까. 그리고 ‘군사 분야’의 일은 다소 원칙에 어긋나더라도 불문에 부치기로 한 것도 같고.”
“‘같다’라는 건 정확한 정보는 파악이 안 되고 있다는 건가?”
“이단 관련 연구는 기밀인데 어쩌겠어.”
견하는 가벼운 쓴웃음을 흘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좀 알겠어. 콘스탄티누폴리에 다녀오는 김에, 현지에서 그쪽 이단 연구에 상황에 대해 좀 알아봐 달라?”
루우는 입꼬리만 살짝 올려 미소를 만든다.
“잠깐 방문한 사람이 기밀까지 들춰보진 못하겠지. 하지만 거기서 이단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정도는 알아 올 수 있을 거야. 내가 부탁하고 싶은 그거야.”
“알겠어. 그런데 그게 중요한 정보일까? 방법은 달라도 도달하는 곳이 같다면, 우리가 굳이 그것까지 참고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아?”
루우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둔다. 견하의 말에 반발하는 게 아니라, 조금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어디까지나 주워들은 이야기만 종합해서 내린 결론이라서 정확성은 떨어질 거야. 하지만, 나는 그쪽의 이단에 대한 접근 방식이 위험하다고 봐.”
“위험?”
“우리는 ‘괴력난신은 논하지 않고’ 철저히 인간의 능력이라는 범주에서 추적해 ‘신종’에 대해 밝혀냈어. 그렇지만 로마나 크리스트교권은 사정이 달라.”
효윤이 뭔가 알겠다는 듯 아, 하는 소리를 낸다. 술잔을 내려놓는다.
“그쪽은 ‘괴력난신을 논하는’ 쪽으로 발전했다는 이야기구나.”
“그것도 필사적으로. 신조차 하나의 ‘종’이라는 개념인 ‘신종’이라는 말을, 저들은 최대한 피하려고 해. 저들에게 신은 유일신이야. 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초능력을 논하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게다가……”
“……우리는 영혼도 내세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잖아.”
“영혼의 구원과 신에게의 접근을 최종목표로 삼는 크리스트교권은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야.”
효윤과 루우가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견하는 생각에 빠져든다.
기시감.
카라코룸 총대주교 레오에게 자결을 권유할 때, 견하는 영혼의 존재를 굳게 믿는 사람에게 ‘인간의 영혼은 없다’는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잠깐 고민했었다.
그리고 칸발리크에서는…… 그런 ‘영혼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리와 싸웠었다.
필사적으로 영혼과 구원을 얻으려 했던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신흥종교에까지 의존했고, 그 결과…….
“혁세주교.”
효윤 역시 견하와 동시에,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리안의 눈이 번뜩인다.
“로마나 크리스트교권의 이단 연구가 그런 방향으로 발전할 우려가 있다는 건가?”
“칸발리크에서 일어났던 일이 콘스탄티누폴리 상공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어.”
“그리고 혁세주교 이전에, 그 ‘파멸인’들은 자기네 세상을 같은 방식으로 멸망시켰지.”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환상 같은 괴담.
그러나 이제 이들에겐 대응책을 세워야 하는 현실이다.
“우리만 잘 해냈다고 안심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야. 세상은 넓어서, 파멸은 우리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시작할 수도 있어.”
“적어도 저쪽에서 파멸이 시작될 때, 우리는 도망칠 방법이라도 생각해둬야 한다는 거군.”
견문과 인맥을 넓히고, 두 요인을 경호하는 정도의 일이 아니다.
루우의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건 칸발리크 사태 이상의 대참사가 된다.
고려와 몽골의 내전이 대공황으로 타격을 입은 세계 경제에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를 생각해보자.
이건 그 이상의 혼란을 몰고 올 것이다.
이미 세계대전을 저지른 전적이 있는 이슬람 세력, 그리고 사방으로 세력을 확대한 바라트의 공산권 앞에서 ‘로마’라는 거대한 권력이 무너져 공백이 생긴다면?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제국 붕괴의 혼란이냐, 악의 제국이 잡은 질서냐. 그 사이에서, 타국의 정치가는 ‘악의 제국을 존속시킨다’는 선택지를 골라야 한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붕괴시킨다면 확실하게 책임지고 그 땅과 인구를 정복, 관리해야 한다. 태평천국 멸망 이후가 그러했듯.
그러나 애석하게도, 로마의 주변 그 어느 나라도 로마 멸망 이후의 혼란을 감당할 것 같진 않다.
아라비아 칼리프국이나 바라트 사회주의연방이 그 권좌를 대체하는 건, 당사자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일이고.
살짝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젓는 견하를 보며, 루우는 다시 술잔을 내밀었다.
“복잡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일단 오늘은 좀 더 마실까.”
***
아침…… 아니 이미 한낮에 가깝다.
무겁고 텁텁한 공기 속에서 눈을 뜬 견하는, 팔다리며 배며 자신을 짓누르는 ‘무언가’들 사이로 손을 뻗어, 물병을 잡았다.
벌컥 물을 들이켠다. 머리는 여전히 몽롱하지만, 갈증은 가셨다.
그제야 대체 뭐가 자신을 이렇게 눌러대는 건지 돌아볼 여유가 생겨, 시선을 내린다.
견하의 눈이 당황으로 커졌다가, 잔잔한 미소를 담는다.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소녀들 사이, 거울에 비친 부스스한 자신은 그저 게으른 대학생일 뿐이었다.
그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 없는 웃음을, 큭큭 터트린다. 다른 세 사람을 깨우고 싶진 않았으니까.
제국의 황제와 태사가, 이렇게 엉망인 모습으로 바닥에 널브러져서 자고 있다.
이 광경을 말한다면 과연 누가 믿을까.
무겁고 텁텁하게 느껴졌던 공기는 세 사람의 향기와, 조금은 달콤한 땀 냄새.
밤새 난방이 잘 된 건지, 다들 외투는 벗고 잔다. 드러난 맨 팔다리에 눈길이 가면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동시에 뭔가 애틋하고 정겨운 광경이다.
이런 평화와 여유는 자주 있진 않을 테니까.
어제 리안의 말마따나, 이렇게 네 사람이 한자리에 다 모인 게 얼마 만인지.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이 평화로운 소리는…… 견하가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평화의 상징이다.
덕분에 어젯밤에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어렴풋이, 리안을 자기 방 침대 위에서 재운 채 효윤과 대화를 나누던 그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자신이 이렇게 되기 직전, 소년다웠던 마지막 몇 시간.
견하는 리안의 하얀 목덜미를 내려다본다. 상아를 깎아 만든 것 같다.
그대로 매끄러운 선을 따라 어깨로, 상박으로, 팔꿈치로 시선을 옮겼다. 리안은 핏줄이 파르라니 비치는 손을 아기처럼 쥐고, 견하의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나를 베개로 쓰다니 너무한데.”
리안 뿐만이 아니다. 루우도 효윤도 머리, 팔, 다리…… 편하게 올려둘 수 있다면 다 견하에게 올려둔 것 같다.
“조금 저리긴 하지만……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볼까.”
그렇게 말하고 나니 이 따스한 분위기와 방바닥의 온기에 다시 졸음이 찾아왔다.
결국 네 사람은 오후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