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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68화 (268/541)

도시들의 여제(4)

단호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내전은 끝났고, 공식적인 서류 위에서는 지워졌다고 해도, 그들이 ‘천손민족협회 출신’이라는 낙인은…… 그 흉터는 사라지지 않으니까.

아무리 대학생이 자유를 누린다 해도, 여전히 고려의 현 정권은 ‘제3제국’이다.

태사 미리안은 대원수라는 ‘군 계급’을 달고 있고, 국가의 모든 정책은 군사 분야를 위주로 돌아간다.

대공황의 돌파구로 몽골 내전과 한족 반란 진압에 개입한다는 이야기마저 돌 정도니까.

게다가 다소 완화되었을 뿐……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제1대학교를 한 발자국만 벗어나도 대학생의 자유는 꿈처럼 사라져버린다.

이곳이 자유로울 수 있는 건, 그저 태사 미리안이 모교에 대한 애정과, 이전보다는 너그러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품었기 때문이다.

만약 술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허동주를 옹호하는 발언이라도 한다면, 천손민족협회 출신이라고 허세라도 부린다면……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주견하도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쓸모는 여기까지였나, 라고 한숨 한 번 내쉬고 숙청 서류에 서명하겠지.

그렇다. 이 나라에서는 아직도 ‘숙청’이라는 개념이 낯설지 않다.

수영은 재연을 숙소로 데려가 어서 재워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의 팔을 들었다. 부축해서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 수영의 손끝을, 재연의 손이 강하게 잡는다.

“하지만 이렇게 ‘한껏 기분이 들뜬 새내기 대학생’을 연기하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살아남기 힘들어.”

씁쓸하고도 얌전한 말투.

하지만 고개를 들어 수영의 얼굴을 바라보는 재연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가득하다.

그렇다. 수영이 정말로 좋아하는, 절대 굴하지 않는 지성의 힘.

“나는 이 대학생이라는 신분에, 그 사회에, 주어진 기회에 완벽하게 녹아들 거야.”

안쓰럽다. 그는 강요된 상황 속에서 최대한의 발버둥을 치고 있다.

수영은 그를 따뜻하게 품어보려고 하지만, 그녀가 보듬어줄 수 있는 건 소년의 선이 가는 육신뿐.

그의 정신은, 홀로 세상에 맞선다.

“아버지는, 그냥 평범하게 살 수는 없냐고 물으시더군. 아들이 뭔가 사내다운 일을 하길 바라셨지만, 막상 사내들의 세계로 가니까 겁이 나셨던 모양이야.”

재연의 아버지. 수영도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엄하고 무뚝뚝한 아버지라고 했다. 별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고.

그런 그의 입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건 드문 일이다.

“수영아, 나는……”

재연의 말은 끊겼고, 수영은 한참 입술을 달싹이다 대답했다.

“……말해.”

“허동주의 방식도, 신수덕의 방식도 틀렸다고 생각해.”

수영은 살짝 숨을 삼켰다. 재연은 이제 많은 것들을 부정하려 한다. 그런 사람이 선택할 길은 둘 중 하나다. 그대로 텅 빈 인간이 되어 주저앉거나, 다른 무언가를 긍정해서 일어서거나.

“하지만 나는 주견하의 길도, 미리안의 길도, 황제의 길도 따라 걷지 않을 거야. 그 길에 기댈 수는 있지만, 나는 나만의 길을 걸어가겠어.”

수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재연의 목소리는 간신히 수영의 귀에 닿을 만큼 낮았지만, 누군가 다른 이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는 말이었으니까.

그런 위험한 이야기를 수영에게 들려준다는 건, 수영에게 목숨을 맡길 만큼 믿는다는 뜻.

조금은 기뻤다.

다행히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다.

“견하는 이익서의 그 ‘동아리 놀이’를 중심으로 대학생 조직을 확대할 생각이야. 내가 시작할 지점은 바로 여기가 되겠지.”

미소가 떠오른다.

그는 더 이상 상심한 이론가, 방향을 잃어버렸던 소년이 아니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자기만의 야망과 사상적 토대를 다져나가는 사상가다.

“나는 이 대학생 조직에 나만의 천손민족협회를 뿌리내릴 거야.”

***

술 몇 병 챙겨 들고, 육포 몇 장과 과자를 가지고 네 사람은 빈방을 찾았다. 모두들 밤새 퍼마실 생각인지 온 건물이 떠들썩하다.

문을 닫고, 둘러앉아 술을 따른다.

방에 난방이 들어오려면 아직 시간이 걸리는지, 바닥이 차다. 여자애들은 다들 무릎을 세워서 끌어안은 자세로 앉았다.

세 사람 중 둘은 고려 제3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이단이고, 리안도 일반인 치고는 무예가 상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의, 이렇게 작은 발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걸 보자 견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 얘들도 딱 내 또래 여자애들이구나, 하는 실감이 들어서.

견하 자신의 발에 비하면 확실히 작은 발들이니까 귀엽기도 했고.

“이렇게 넷이 다 모인 것도 오랜만이다, 그렇지?”

리안의 말대로였다. 일이 아니라 순전히 놀기 위해서 모인 건 정말 오랜만이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안정적인 1931년이 시작됐어. 건배부터 할까?”

제국의 황제와 태사와 그 최측근 둘이, 난방이 겨우 들어오는 방에 앉아 싸구려 잔에 싸구려 술을 붓고 건배를 한다.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어른 없이 어른이 된 대학생 넷이, 어설프게 어른 흉내를 내서 술을 마셔대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지.

하지만 역시 술자리의 격이 다르다. 술을 홀짝이며 나오는 대화는 그 또래 대학생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주견하를 콘스탄티누폴리에 보낸다고?”

황제 루우는 리안과 견하가 해 준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에 대공황 문제는 확실히 다루겠지. 그러니 재무성의 차무룡 장관이 가는 건 알겠어. 외교 일이니까 외무장관이 가는 것도 당연하고. 그런데 견하는 왜?”

“여준설 장관 일도 있고, 차무룡 장관을 아즈텍에 보냈을 때도 상황은 썩 좋지 않았어. 로마 제국은 아즈텍보다는 훨씬 안정적이지만, 비슷한 테러 시도가 없을 거라는 보장은 못 해.”

그렇긴 하다. 이번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 화두는 대공황이다. 각자 어떻게든 살아나갈 방도를 찾고는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볼 때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해결책이 콘스탄티누폴리에 온 모든 인사들 사이에서 논의되겠지. 고려가 들고 갈 동아시아 4개국 관세동맹이나 바라트가 국제무대로 복귀하는 문제도 이 ‘대공황’이라는 거대한 화제의 일부에 불과하다.

당연히, 크고 작은 불만을 품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 중에는 극단적 해결책을 추구하는 자들도 있을 테고.

“그럼, 견하는 경호원으로 보낼 생각이야? 뭐 이단으로서의 능력 자체는 훌륭하고, 전투 경험도 그 정도면 됐지만…… 견하는 다른 일들도 많잖아?”

감찰국장으로서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지난 2년간 전국 중고등학교에서 감찰국 소년과로 들어온 학생의 수는 상당히 늘어났다. 반대로 소년과에서 각 지역의 중고등학교로 학생을 보내는 수도 꽤 늘어났고.

“그 ‘청년과’도 이번에 대학 올라온 김에 확장할 생각인 것 같던데, 아니야?”

루우의 질문은 리안을 향했지만, 눈길은 견하를 향한다. 견하는 끄덕였다.

“콘스탄티누폴리로 가기 전에 지나나 이익서, 한재연한테 방침 정해주면 알아서들 할 거야. 지금까지도 다른 일이 있을 땐 그래왔고. 뭐…… 사람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그 문제도 몽골에서 들어오는 사회주의자들을 끌어들인다든가, ‘청년과’의 확장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깡패 동무, 이제는 ‘데렘칭’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는 그 사람도 일을 잘해주고 있고, 이익서도 생각보다 꽤 재미있는 활동 기반을 마련해 뒀으니까.

“견하가 하고 있는 일이 중요하다는 건, 나도 인식하고 있어. 나이가 어리긴 해도 감찰국과 정치경찰실은 제국입헌당의 중요한 자산이야.”

리안의 이 말은 감찰국 직원들은 전부 제국입헌당 당원이기에 나온 것이었다.

그녀는 과자 한 조각을 씹으며 말을 잇는다.

“물론, 내가 견하에게 더 많은 경험을 시켜주려는 의도도 있어. 세계적으로 영향력 좀 있다 싶은 사람들은 다 모이는 자리지. 여기서 조유관과 차무룡의 일처리도 보고 배우면서, 한편으로는 인맥도 넓힐 수 있을 만큼 넓혀두라는 거야.”

로마 황제를 만난다든가, 황위 계승권자 중 누구와 친해진다든가, 그런 건 어렵겠지만.

리안이 그렇게 덧붙이자 루우가 입술에 손을 올리며 툭 내뱉듯 말한다.

“이미 황제랑 친구인데 가능하지 않을까?”

“뭐, 고려 황제와 친구라는 정보를 로마 측에서 포착했을 경우엔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 정도까지 신경 쓰고 있진 않을 것 같은데. 우리는 로마와 우호 관계긴 하지만, 딱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파트너는 아니야.”

“로마 제국의 주된 관심사에서 거리가 멀기 때문인가요?”

효윤의 물음이었다. 리안은 핵심을 잘 짚어줬다는 듯이 무겁게 끄덕인다.

“로마의 관심사는 세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어. 아프리카 문제, 제국 내외의 종교 문제, 공산권의 확산 저지 문제.”

아프리카를 둘러싼 브리튼, 에스파냐, 로마의 갈등. 이건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다 고려는 당사자도 아니니까 넘어가기로 한다.

“종교 문제는…… 그냥 알고만 있어. 건드리지 않는 게 제일이야. 로마인들은 서쪽으로는 카톨릭 십자군에, 동쪽으로는 이슬람 때문에 멸망할 위기를 몇 번이나 겪은 탓인지, 자기네 종교의 순수성을 지키는 데 병적으로 민감하니까.”

견하는 아까 리안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오래됐다’고 했지.

그건, 로마의 ‘종교적 완고함’을 표현한 걸까.

“세계대전 이후 ‘고토 회복’이니 ‘총대주교구 수복’이니 하는 명분으로 식민지를 대폭 확대했지만, 동시에 이 나라는 ‘다수의 이교도 인구’를 끌어안아야 했어. 문제는 이 이교도 주민들을…… 중세에도 안 그랬을 수준으로 가혹하게 다룬다는 거지.”

강제 개종은 기본이고, 가장 가벼운 형벌이 추방일 정도다. 그 외에도 아라비아 칼리프국 국경에서 별다른 이유도 없이 군사행동을 감행해 큰 피해를 입힌다. 국제사회의 눈이 없었다면 아라비아는 벌써 잿더미가 됐겠지.

“확인은 안 됐지만 자국 내 이교도 지역에 대한 학살도 종종 자행한다고 들었어. 이교도가 경범죄라도 저지르면 얼씨구나 좋다 하고 사형부터 집행하고 보는 나라라고도 하지. 경찰들이 매일 하는 일이 ‘오늘은 또 어떻게 이교도를 괴롭힐까’라는 이야기도 있고.”

루우의 보충 설명에, 리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곤 견하에게 충고한다.

“이런 소문들은 당연히 입 밖에 내선 안 되고…… 아예 이런 화제 근처에도 접근하지 마.”

“한때는 위대한 ‘로마법 대전’의 나라니 뭐니 칭송받았다지만, 우리 시대엔 아닌 모양이야.”

“‘로마인’들에게 만큼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나라니까. 참 이중적이지. 이른바 ‘자유세계’라 자처하는 나라들 중 하나인데 말이야.”

어떤 나라든 모순이나 약점 같은, 불안정성을 안고 있다. 아즈텍의 경우엔 경제와 민족 문제로, 몽골의 경우엔 정치체제와 사회제도 문제로 그 불안정성이 튀어나왔다.

로마는…… 종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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