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들의 여제(3)
효윤은 루우와 함께 잠깐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그녀도 반쯤은 술에, 또 반쯤은 대학이라는 분위기에 취해 머리가 무거웠다.
서늘한 바람을 쐬자 몽롱한 기분을 걷어내는 것 같았다.
루우는 옆에서 술기운 가득한 숨을 뱉어내고 있다. 얼굴을 보아하니 술기운을 누를 생각이 없는 듯하다. 술기운이 정수리 꼭대기까지 휘저으라고 내버려 둘 모양이었다.
루우는 효윤에게 어깨동무를 하더니, 검지로 효윤의 코끝을 톡톡 건드린다.
“요요요, 입학하자마자 남자들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미소녀가 여기 있네?”
“……혀 꼬부라졌어. ‘동기들과 대등한 대학 새내기로 지내고 싶은’ 자리라고 해도, 황제의 체통을 지키는 게 어떨까?”
“황제 체통 핑계 대면서 말 돌리지 마셔요, 최효윤 씨. 대놓고들 말 않았을 뿐이지, 너도 느꼈을 거 아냐. 들이대는 거.”
핑계긴 했다. 루우의 고려어 발음은 정확했으니까.
효윤은 바닥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휘휘 저어버렸다. 동기나 선배들 중에, 늘씬한 몸매와 멋진 포니테일을 뽐내는 효윤에게 시선 한 번 던져보지 않는 남자는 없었다.
남녀 사이의 연애를 시작해 보자, 뭐 그런 의사 표현을 넌지시 던지는 사람도 없는 건 아니다. 그런 사람은 고등학생 때도 있었으니 당황스러워할 일도 아니고.
대부분은 일단 잘 지내보자는 정도의 가벼운 말을 던진다. 효윤 정도의 미인이라면 친구로 지내는 것만으로도 좋은 점이 많다. 그저 친구여도 즐겁고, 덤으로 인간관계도 넓어진다.
정말로 연애가 이루어질 거라고, 한눈에 반해서 덤벼드는 인간은 별로 없다. 그리고 그게 정상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괜히 혼자 짝사랑, 망상이라도 해버리면 이쪽이 피곤해지니까.
그녀는 견하에 비해서는 덜 유명하다. 그녀 자신이 그러고 싶어하기도 했고.
그래서 그녀는 태사 리안의 경호원이라는 것 외에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효윤이 이미 사람 여럿을 동강 내 본 경험이 있다는 걸 안다면…… 아니, 어쩌면 그런 위험한 여자한테서 매력을 느끼는 부류도 있을지 모르겠다. 효윤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지만.
“루우 너도 황제만 아니었으면 다가올 남자애들 많았을걸? 리안 언니한테도 마찬가지야. 처음엔 멋모르고 접근하던 촌놈들이 태사 조카딸이라는 거 알자마자 줄행랑쳤다더라.”
그러니 리안과 루우는 귀찮을 일은 없었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다가올 패기들이 없다는 사실이 좀 실망스럽기도 하다.
루우는 효윤의 말에 헤실헤실 웃었다.
그 경박한 웃음으로도 루우가 미소녀라는 사실은 감출 수 없었다.
전쟁터를 돌아다니느라 건강한 구릿빛으로 물들던 피부는 겨울을 거치며 다시 하얗게 돌아온다. 티무르 황실에서 비롯된 이란계 혈통의 흔적은 금색과 갈색 사이에 걸터앉은 머리카락에 남아 있다.
때때로 금빛으로 변하는 신비한 눈동자는 말할 것도 없고, 목덜미에서 등줄기로 이어지는 예쁜 곡선은 솔직히 감탄 밖에 안 나온다.
효윤의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우는 경박한 웃음에 어울리는 경박한 어조로 대꾸했다.
“나는 오는 사람 굳이 막진 않아. 그렇지만 너, 딱 선을 긋던데. 매몰찬 건 아니지만. 남자애들도 ‘앗 아닌 건가’ 싶었는지 당황하더라.”
“뭐야, 폐하가 이렇게 신하를 비꼬아도 되는 거야?”
“비꼬는 게 아니야. 감탄하는 거지.”
루우는 술기운에 웃음을 슬쩍 올려서 흘렸다.
“주견하 때문이지?”
효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리안 언니도 그렇고, 루우도 그렇고. 뭐 모르는 사람이 없네.
“그렇게 티나?”
“효윤이 네가 견하만 보면 헤벌쭉해서 다닌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그런데 은근히 아끼는 건 느껴지지.”
리안이나 루우가 알 정도라면…… 거기까지 생각하자, 효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표정은 침착하게 유지하고 있지만.
“잠깐 관심 좀 있던 거지 열렬히 좋아한 건 아니야.”
“알아. 너 스스로가 감정을 그렇게 두지 않을 거라는 거. 근데 견하가 아닌 남자랑 사귈 것도 아니잖아?”
루우가 핵심을 찌른다. 그녀의 말대로 효윤은 지금 이 관계를 부술 생각은 없다.
그러니 견하가 조금 멋있다는 생각을 연정으로 진전시키지 않는다.
‘자신을 억누르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다.
그러나 견하가 아닌 다른 남자를 이성으로 의식하지도 않는다.
아까 생각했던 대로 그녀의 신분이며 과거며 다 감당할 ‘패기’가 있는 남자라면 모를까, 효윤의 눈에는 다들 어려 보였다. 먹을 것 입을 것 부족한 것 없이 양친이 ‘삶의 무게’를 다 감당해준 사람들이기에 더 그렇다.
하지만 효윤은 이미 자기 삶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남자를 안다.
“연애 좀 안 한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어.”
효윤은 ‘차선책’을 고르는 여자가 아니다.
“그래, 이상할 건 없지. 나도 ‘다른 남자를 만나면 견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을까’하는 식으로 연애를 권하는 건 아니야. 그런데 주위를 봐.”
효윤과 루우, 두 사람 말고도 꽤 많은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나와 바깥 공기를 쐬고 있다.
그중에는 처음 마셔본 술에 잔뜩 취해 주사를 부리는 이도 있고, 시끌벅적 떠들어대는 무리도 있다.
그리고, 어느새 마음이 통했는지 수줍게 손을 잡고 산책하는 남녀도.
그 모습을 보던 효윤은, 솔직한 걱정을 입에 담았다.
“견하가 눈치채진 않았겠지?”
“내가 남자애 속을 어떻게 알겠어. 모를 수도 있고, 알아도 티를 낼 수 없는 입장이니까 가만히 있는 걸 수도 있고.”
하지만 분명한 건, 이라며 루우는 말을 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거야. 지금이야 너든 태사든 주견하든 연인과 자매와 남매를 뒤섞어 놓은 것 같은 유사 가족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세 사람 말고는 의지할 구석이라곤 없던 시절에는 그런 절박한 관계로도 문제없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시간이 지났다. 상황은 변했다.
효윤은 루우의 말에 반박한다.
“억지로 그러지 않아도, 대충은 정리하고 있어. 언젠간 그냥 그랬던 적도 있었다고 웃으며 넘길 거야.”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결말이지. 그런데 말이야 최효윤.”
루우가 입을 귓가에 바싹 가져다 댄다. 얼굴에서도 말투에서도 장난기는 싹 가셨다.
“그런 날이 가능하면 빨리 와야 해. 너도 나도 견하도 이제 성인이야. 무슨 뜻인지 알지?”
리안과 견하의 연애는 이제까지와는 다를 것이다. 견하는 이제 소년을 벗어나고 있으니까.
루우가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 효윤이 삶에 대처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두 사람 다 소녀를 벗어나고 있으니까.
“아차 하는 순간, 우리들 사이는 엉망진창이 돼.”
효윤은 눈을 돌려 루우의 얼굴을 봤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눈은, 지금은 황금빛이 아니다.
살며시 슬픈 빛을 띠고 있는.
아니, 이 어렴풋한 슬픔은 효윤 자신이 느끼는 걸까?
루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살짝 짜증이 치밀었다.
알아들었다는 듯 한숨을 뱉으며 루우의 어깨를 슬쩍 밀어내는 그때.
효윤의 시야에, 멀리서 돌아오는 견하와 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수줍게들 손잡은 캠퍼스 커플 중 하나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손잡고 걸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효윤은 진심으로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서 뿌듯한 행복을 느꼈지만,
루우는 그런 효윤의 표정 속 미묘한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흘끔거리면서 봤지만, 헛것을 본 것은 아니다.
그 표정은…… 말로 설명하긴 힘들다. 마냥 좋다고 할 수도 없고, 하지만 또 마냥 쓰리다고도 할 수 없는. 어떤 ‘작은 흔들림’에 불과한 감정.
루우 역시 그런 효휸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지금 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루우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니까.
“효윤이도 루우도 환영회가 그렇게까지 재미있진 않나 봐? 둘 다 나와 있는 걸 보니.”
가까이 다가온 리안은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너무 술만 마시니까 별로더라고요. 학생이든 교수든. 이야기도 재미없고.”
“뭐, 나나 효윤이한테는 조금 유치한 이야기들이었으니까.”
아무리 나이가 많은 선배라도, 여기 네 사람과는 경험의 밀도에서 뒤질 수밖에.
게다가 동기들의 경우, 내전 중에 입시 공부를 하고 제1대학교에 진학할 정도면 어느 정도는 유복한 가정에 사는 사람들이다. 선배들도 유복하긴 마찬가지일 테고.
그런 가정환경을 누리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애매하다.
진짜 흙바닥의 쓴맛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아예 높은 곳에 사는 자들의 방식을 터득한 것도 아니다.
여기 네 사람처럼 피맛을 본 것도 아니고.
네 사람 모두 적당히 어울려주기는 했다. 처음엔 재미있다고도 느꼈지만, 아무래도 계속 이야기를 나누기엔 부족했다.
관심사도 다르고, 사는 세상도 다르다. 그러다 보니 대화가 쉽게 끊긴다.
결국, 권력 핵심 네 사람은 이렇게 결정했다.
“우리끼리 마시자. 술이야 넘칠 거고, 집행부 애들한테 말하면 남은 안주도 내어주겠지.”
***
수영은 건물 뒤쪽, 계단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재연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숨을 쉬었다.
다가가 보니, 딱 봐도 술에 취해 정신 못 차린 얼굴이다.
이 애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놓아버렸던 적이 있던가. 아니면, 역시 그도 이제 막 성인이 되었을 뿐인 소년일까.
“누나들 예쁨은 잔뜩 받더니 이런 데 있었어?”
한재연은 눈을 떴다. 그러곤 씩 웃었다.
“질투해?”
수영은 술 취한 사람 특유의 코맹맹이 헛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재연의 말은 명료했다.
“좋은 기분은 아니야.”
투닥거리거나 시치미를 뗄 생각은 없었기에, 수영도 그렇게 명료하게 대답했다.
“미안. 이렇게…… 흐트러질 기회는 흔치 않잖아.”
“기회는 이때다, 하고 누나들 틈으로 파고든 거 아니야?”
소녀처럼 섬세한 얼굴. 그 때문에 여자 선배들 사이에서 재연은 이미 화젯거리였다.
중학생이나 고등학교…… 1학년일 때 그는 어땠을까. 오늘과 같았을까? 그건 모르겠다. 수영이 모르는 과거니까.
하지만 그 이후에 대해서는, 수영은 확실히 알고 있다.
재연은 지난 2년을 전혀 고등학생답게 보내지 못했다.
불안한 처지여도 학교를 마칠 수 있었던 수영과는 달리, 그는 주견하의 그늘 밑에서 숨죽인 채 목숨줄을 붙들어야 했다.
그가 놓쳐버린 시간을 보상받고자 ‘대학 생활’을 누리려는 거라면,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래도…….
“과거를 철저히 세탁했다 해도, 사소한 실수 하나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어. 정신 차려, 한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