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들의 여제(2)
견하 이후로도 신입생 몇이 자기소개를 한다. 그러다 이윽고, 재연이 나왔다.
“……귀엽다, 쟤.”
이견이 있을 리 없다. 소녀 같은 곱상한 저 얼굴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남성미가 뿜어져 나오는 사내도 여심을 흔들지만, 저런 외모도 ‘소녀’같은 기분으로 돌아가게끔 하는 것이다.
그야, 한재연은 누구나 품고 있을 법한 ‘어린 왕자님’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재연에게도 사람들이 몰려든다. 다만 재연의 과거와 신분은 철저히 세탁했기 때문에, 견하처럼 소문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일은 없다.
학과 별로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친목을 다지는 시간이 이어진다. 이때는 아직 술을 마시진 않는다. 중간중간 교수들이 끼어들어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 떠난다.
거기서 더 시간이 지나 저녁을 먹고 나면, 커다란 모닥불이 타오르는 넓은 운동장으로 나온다.
이때는 학과를 가리지 않고 모든 신입생이 한자리에 모인다.
행사를 진행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선배들은 자기들끼리 놀러 들어가고, 신입생들만 남았다.
진행자들은 간단한 춤 동작을 신입생들에게 알려준다.
빙글빙글 돌며, 다리를 교차하고 손뼉을 마주치는 간단한 춤.
요란하진 않지만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봄밤, 모닥불의 따스함과 불똥이 튀는 소리에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남학생들의 원과 여학생들의 원이, 모닥불을 중심으로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돈다.
쑥스러운 웃음이 교차한다.
그중에는 벌써 커플로서 호감을 품은 남녀도 있다.
견하도 그런 원 안에 섞여 들어가, 마주하는 여학생마다 간단한 눈인사를 나누고, 살짝 뛰며 다리를 교차하다가, 간혹 어설픈 실수에 서로 키득거렸다. 손뼉을 마주칠 때마다 부드럽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루우와 마주쳤다.
여학생들의 원이 바깥쪽에 있었기에, 그녀의 눈동자는 모닥불 빛을 그대로 받아 빛났다.
견하의 얼굴보다 조금 아래쪽에 있는, 루우의 얼굴.
신입생 황제 폐하는 이 환영회를 충분히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미소가 얼굴에 가득하다.
미소 속, 그녀의 눈동자는 어째서인지 금빛이다.
-예쁘다.
그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동시에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신비감이 견하의 생각을 사로잡았다.
-새삼스럽군.
세상에 사람의 눈동자 색이 금빛일 수도 있다니, 마음속으로 작게 탄성을 지른다.
2년 동안 왜 전혀 깨닫지 못했을까. 저 금빛 눈동자가 이렇게 매혹적으로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아, 그러고 보니 그녀의 눈동자는 보통은 능력을 발휘할 때 금빛으로 반짝이지 않던가?
그렇다면 아름다움보다는 위협을 먼저 느껴서 그런가 보다. 눈앞에 있는 맹수가 금빛 눈동자를 지녔다면, 무섭다는 느낌이 먼저 들 테니까.
그러면 지금도 루우는 뭔가 이단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걸까?
아직은 쌀쌀한 봄밤의 바람.
그사이에 살며시 따스한 바람 한 줄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은, 견하가 모르는 그녀의 또 다른 능력일까?
황제가 춤을 춘다.
소녀 황제가 춤을 춘다.
루우는 황제일 뿐만 아니라 빼어난 미소녀다. 그러다 보니 가장 주목받는 신입생이었다.
누가 감히 황제의 남자친구가 되겠다고 나설 용기를 품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선배들이든 신입생들이든 그녀에게 호감을 품은 건 확실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루우의 장난스런 미소에 담긴 눈동자는, 똑바로 견하를 향하고 있었다.
그 순간이 오래가진 않았다.
원이 돌면서 댄스 파트너가 바뀌고 루우는 빙글 돌아 멀어진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한번 돌아보며 살짝 보여준 금빛 미소는, 여전히 견하의 눈가에 남아 있었다.
***
아버지가 주는 술을 한 잔씩 먹어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연거푸 마셔보는 건 처음이다. 성인이 된 지는 고작 며칠 밖에 안 되었는 데 말이다.
두통과 어지러움의 경계를 오가면서, 약간 들뜬 기분으로 동기나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 라기보다는 놀이에 더 가깝겠지.
그때, 견하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있었다.
견하는 모두의 말이 멈추고 시선이 모이는 것을 보며, 누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의 상사이자 연인이라는 이름 뒤에, 이제는 같은 과 선배라는 이름까지 덧붙은 사람.
“나가자.”
리안이 그렇게 말하자, 견하는 일어섰다.
그리고 앞장서 걸어가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술기운이 상당히 올라온 상태지만 그래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보고 있다는 걸 알지만, 뭐, 알아서들 떠들라고 하지.
리안은 살짝 놀라는 것 같았지만, 걸음을 조금 늦춘다.
밖으로 나오자, 얼굴 주변의 텁텁한 공기를 신선한 바람이 몰아내 주었다.
“저쪽에 개울이 있어. 같이 좀 걸을까?”
“여기 주변에 경호원들이 배치되어 있다곤 하지만, 행사 방해하지 말라고 멀찍이 떨어뜨려 놨잖아요. 괜찮겠어요?”
“경호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어. 내 사람 중 가장 강한 이단이잖아?”
그렇게 말하고 리안은 견하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술기운 탓이다. 이렇게 얼굴이 뜨거운 건.
그래서 견하는 살짝 놀림을 담아 대답한다.
“그렇게 말하면 효윤이가 섭섭해할 텐데.”
“효윤이 앞에서는 효윤이가 가장 강하다고 하지.”
“그럼 저한테 한 말은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에요, 선배?”
리안은 손을 뻗어 견하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선배라는 호칭은 좀 신선하네. 듣기도 좋고. 하지만 너무 장난기가 많아. 술은 적당히 자제시켜야겠어.”
개울을 따라 두 사람은 걸었다.
견하가 느끼기엔 한참 걸은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어둠 속이었고, 시계도 없었다. 감각은 제멋대로 오르내렸다.
“대학생이 되어보니까 어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그런 물음이 올 거라는 생각은 했기에 답이 막히진 않았다.
“어떻다고 하긴 좀 애매해요. 공부가 고등학교 때랑 다른 거? 학교 선생님과 교수님이 확실히 다른 느낌인 거는 낯설긴 하지만…… 이게 대학에서 배우는 건가 싶으면 즐겁기도 하고. 동기들이나 선배들도 좋은 사람들이죠.”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잘 즐기고 있네.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두는 게 좋아. 나도 틈이 나서 학교에 나올 때는 최대한 즐겁게 보내려고 하거든. 자주 그러진 못하지만.”
견하는 그 말에 담긴 뜻을 안다. 그 역시 리안처럼 학교에 오래 붙어있진 못할 것이다.
리안은 태사라는 본업이 있고, 대학교는 어디까지나 그에 걸맞은 ‘학위’를 위한 형식적 절차에 불과하다.
고등학교도 형식적으로 다녔던 것처럼, 견하는 대학을 그렇게 다니게 될 것이다. 그 또한 제3제국 권력핵심에 있는 인간이니까.
쉴 새 없이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일이 폭풍처럼 몰아닥칠 테지.
대학에서의 낭만은, 잠깐의 여가 같은 것.
머리가 점점 또렷해진다.
리안은 단순히 연인 사이의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 불러낸 게 아니다. 물론 지금 충분히 연인의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어딘가에 ‘태사’가 해야 할 말을 끼워 넣겠지.
“저기 앉자.”
리안은 바위 하나를 가리켰다. 딱 무릎 높이까지 온다. 견하는 개울을 바라보며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깐만…….”
리안은 그런 견하에게 등을 기대듯, 앞에 앉았다. 그녀는 견하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앞에 모았다. 그러자 리안은 견하의 품에 쏙 들어갔다.
약간, 졸음이 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견하는 고개를 살짝 숙여 리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향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이렇게 등을 기대고 품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인지, 술 기운인지.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린다.
리안도 그런 견하의 옆얼굴에 머리를 기댄다. 그녀에게서도 살짝, 술 냄새가 난다. 하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그녀도 취기를 빌려 이러고 있다는 사실에, 견하의 목덜미가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이대로…… 이제 성인이니까, 그런 핑계를 대면서, 좀 더, ‘나아갈까’하는 유혹이 견하를 흔들었다.
그 생각은 리안의 말로 끊겼다.
“……이번에도 좀 멀리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
일 이야기다. 견하는 정신을 바로잡는다.
“전에 이야기했던 외교 문제죠?”
“그래.”
“그렇다면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에 다녀와야겠네요.”
“조유관 장관을 수행해줘. 이런 세계적인 회의에는 잡음이 끼기 마련이야. 여준설 장관이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잊어선 안 돼.”
“차무룡 장관도 자칫하다가 테러로 죽을뻔했으니까요.”
리안의 끄덕임이 견하의 옆머리를 살짝 흐트러트린다.
“유럽 여행은 처음이지?”
“애초에 아즈텍에 다녀온 게 태어나서 처음 해본 해외여행이었어요.”
“아즈텍과는 많이 다를 거야. 아즈텍은 자기네 전통을 다 없애고 새롭게 전통을 만들어냈지. 게다가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 북쪽의 다른 문화권에 속한 원주민들과 섞이면서 완전히 다른 문화로 재탄생했어. 하지만…… 네가 가게 될 로마는 달라.”
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오래 머무른 건 아니고 어렸을 때 관광 며칠 해본 거지만…… 그때 내가 콘스탄티누폴리에서 뭘 느꼈을 것 같아?”
“글쎄요.”
사진으로 봤을 땐 거대한 돔을 얹은 성당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은데.
“오래됐어. 그 도시는.”
오래됨. 모든 것이 오래됐다.
그것은 기묘한 벽으로, 완고함으로 외국인의 마음에 부딪친다.
“직접 가 봐야 와닿겠지만…… 확실히 느낄 거야. 만약, 어디까지나 만약의 일인데, 로마의 고위 인사를 마주하게 되면 상당히 어려울지도 몰라. 너무 무리하진 말고, 알아낼 수 있는 만큼만 정보를 가져오면 그걸로 충분해.”
“걱정돼요?”
“그래.”
“그렇게 못 미더운가? 아직도 애 같아요?”
리안은 일어섰다. 아, 방금 그 질문에는 조금 토라졌을까?
빙글 돌아선 그녀는……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견하를 바라본다.
리안은 카리스마를 지닌 주군과, 예쁘고 귀여운 여자친구 사이에 있었다.
처음 그녀에게 반했던 순간부터 계속 느껴왔던, 빨려 들어가는 듯, 압도당하는 듯한 눈빛이 그를 향한다.
“못 믿어서도 아니야. 애 같아서도 아니고. 남자친구니까 걱정하는 거지.”
그리고 아까 어깨를 두드렸던 것처럼 갑자기, 입술이 견하의 볼에 와 닿았다.
밀어붙이는 듯한 기세로, 힘껏.
차갑고도 부드럽다.
살짝 스치듯 다가왔다 떨어지던 것과는 다르다. 한참을, 그녀는 그렇게 볼에 입 맞추고 있었다.
키스와는 다른 두근거림이,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