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22)
“칸께서는 카간과의 공조나 고려에의 지원 요청 등에 대해서는 어떤 방침을 내리시려는지…….”
조심스레 말꼬리를 흐린다. 단순히 얼마만큼의 전력을 확보할 것인가를 묻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은 정치가 구사하는 여러 가지 수단 중 하나고, 따라서 이 전쟁 중에 혹은 이 전쟁이 끝나고 나서 변화할 정치 상황에 민감해져야 한다.
게레센제 카간의 힘을 빌리든지, 고려 황제 루우 테무르의 힘을 빌리든지, 그 방침은 정치적으로 큰 울림을 퍼트릴 것이다.
장단점은 모두 명확하다.
고려나 몽골 본토와 협력하면 더욱 압도적인 전력으로, 빠르고 확실하게 이 반란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다.
그러나 그 두 나라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것은 단점이다.
크든 작든, 전쟁에서의 승리는 그 사실 자체로 외교적 위상을 높인다. 국력의 종합적 결과가 전쟁을 통해 드러나니까.
높은 외교력에서 오는 외교적 위상. 이는 해당 국가가 다른 외교적 목표를 달성하고자 할 때, 좀 더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상대 국가가 외교력을 높이 평가해준다는 것은, 전쟁보다는 대화를 고를 확률이 높아진다는 뜻이며, 동시에 그 대화에서 양보를 선택할 확률도 높아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교력은 군인이 몇 명인가, 전차가 몇 대이며 함선은 몇 대인가를 따지기 이전에, 직관적으로 볼 수 있는 국력이다.
고려의, 특히 현 미리안 정권과 황제 루우는 자국 내전의 승리, 몽골 내전의 개입과 승리를 통해 그런 위상을 한껏 끌어올렸다.
여기에 키타이와 낭키아스에서 한족 반란 진압에도 큰 활약을 펼친다면, 세계 각국은 동아시아 외교의 중심이 고려라고 판단할 것이다.
카간과의 협력도 마찬가지다.
게레센제는 키타이 안정화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키타이가 ‘제국의 일부’임을 세계에 드러내 보일 것이다. 곧 재탄생할 ‘다이온’의 수장, 그 통합된 제국의 위상도 드높이면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울제이의 영향력은 축소되고, 키타이는 서서히 ‘다이온’으로 이름을 바꾼 몽골 본토로 통합되어 가겠지.
따라서, 울제이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다.
“카간께도, 고려 황제께도 도움은 요청하지 않는다.”
참모들의 물음은 단순한 확인 절차였을 뿐이다. 그들은 다시 한번 주군의 확고한 의지를 보고, 주군이 꿈꾸는 이상에 자신들의 이상을 덧대고자 한다.
“공조는 탕구트와만 한다. 티베트까지 이 공조체제에 끌어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은 없다.”
방침이 정해졌다면 이제 움직여야 한다.
참모들은 곧바로 탕구트 정부, 군부와 접촉하고 협력할 방안을 토의했다.
이따금, 장안을 중심으로 한 관중 분지 공략의 방안도 그 안에서 흘러나왔다.
***
“울제이 칸은 별다른 지원 요청을 해 오지 않았습니다.”
조유관의 보고에 리안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키타이 단독으로 한족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건가. 이러면 발해도에 주둔한 장해진 대장과 키타이 파견군은 그냥 놀게 되겠군.”
전쟁장관 강태훈이 태사의 한숨을 달래려는 듯 의견을 덧붙인다.
“일단 발해도 일대의 안정 임무를 수행토록 하겠습니다. 그곳 한족들이 동포들의 봉기에 자극받지 않았을 리는 없으니까요.”
특별히 심각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발해도의 한족 자치기구더러 ‘알아서들 하세요’할 수는 없었다.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음모가 진척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별 불만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언제 봉기의 횃불이 타오를지 알 수 없다. 신수덕이 저지른 일은 잔혹한 만행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한족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
“아니,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키타이가 계속해서 독립적인 위상을 지켜준다면, 향후 게레센제를 견제할 때 도움이 되겠죠.”
그뿐만이 아니다. 다이온 연방을 ‘느슨한 연방’인 채로 둘 수 있다. ‘통합된 제국’은 리안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한편으로는 ‘비용 절감’이라는 이점도 있다. 키타이 파견군이든 낭키아스 파견군이든 돈을 잡아먹는다.
특히 전투 중인 낭키아스 파견군이 소모하는 비용이 크고, 종종 사상자도 나온다.
키타이 파견군이 키타이에는 못 들어가고 발해도에서 놀게만 된다면, 물론 기본적으로 소모되는 비용은 있겠지만 낭키아스 파견군의 비용보다는 적게 소모할 것이다.
“나쁘게만 생각할 일은 아닌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며 리안은 자신의 집무실에 마주 앉은 두 장관을 바라봤다. 내무장관 안세규는 부르지 않았다. 이것도 의도한 건 아니지만, 안세규를 외무장관에서 내무장관으로 옮겨가도록 한 조치는 상당히 도움이 됐다.
외교와 군사라는 분야에서 안세규를 빼버리면, 리안은 좀 더 자유로운 외교 및 군사 정책을 펼칠 수 있으니까.
리안은 그런 생각은 얼굴 아래로 감추면서, 조유관에게 물었다.
“일본이 진행 중인 교섭들…… 그 조사는 어떻게 됐죠?”
“태사께서 예상하신 대로, 일본공화국은 가칭 ‘해상방위동맹’의 결성을 물밑에서 추진 중인 듯합니다.”
기본적으로 일본은 류큐, 아이누와는 오랜 동맹 관계다. 류큐는 본래 일본과 명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해왔지만, 태평천국의 노골적인 확장 야욕 앞에서 일본에 의존하는 동맹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누는 몽골이 일본 원정과는 별개로, 북쪽 해협을 건너 진행했던 개척 사업의 결과 탄생한 나라다.
부족 단위로 나뉘어 있던 아이누인들은 이때 몽골계 왕족의 통치하에 통일 국가를 형성했다. 이후 몽골 제국이 붕괴하고 고려 제2제국이 성립하는 등의 격변기에는 독립 왕국으로 성장한다.
아이누는 고려가 극북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할 때 침략 위협을 받다가, 일본공화국과 동맹을 맺는 방향으로 독립을 유지했다.
류큐와 아이누 모두 일본의 국력에 기대어 독립을 유지하듯이, 일본은 대륙의 공격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할 완충지대로 류큐와 아이누의 자립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본래 동맹이었던 이 3국이 그 협력 체계를 더욱 강화할 듯합니다. 이를테면 연합사령부를 창설한다든가…….”
“연합사령부는 우리도 세계대전이나 내전 때 창설했었죠. 하지만 지금 장관님이 하시는 말씀은…… ‘상설기구’로서의 연합사령부를 말씀하시는 거겠죠?”
“예. 일본공화국군을 중심으로, 사실상 국방 체계를 일원화한다고 봐야 할 겁니다. 일본 외교의 성향상 고려나 몽골, 낭키아스를 향한 공세적 입장을 취하진 않겠지만…… 다른 분야에서 상당한 압박을 해올 우려는 있습니다.”
“해상 무역 쪽으로 압력을 가한다든가 하는 거죠.”
“예. 일본공화국은 지금 말씀드린 3국 외에도, 동맹에 다리다를 포함하려고 물밑 접촉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낭키아스의 동쪽 바다에 있는 섬나라. 면적은 삼한반도의 3분의 1 정도다. 단독 국력으로는 주목할만한 면이 없지만, 그 지정학적 위치가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명나라가 정화의 함대를 대양으로 보낼 때, 다리다는 파견된 명나라 관리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순나라가 들어서며, 그 후 순과 주가 천하를 다툴 무렵엔 네덜란드가 이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네덜란드령 다리다는 고려, 일본, 주나라와의 무역기지 역할을 하다가, 네덜란드가 신성 제국에 합병되면서 갑작스레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보나파르트 황실이 해외 식민지보다는 유럽 대륙 영토의 방어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다리다는 유럽에서 더욱 멀어졌다.
결국 네덜란드 상인들, 한족 이주민들, 그리고 원래 다리다에 살던 원주민과 옛 왕국의 왕족들이 연합, 주변국들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건국에 합의했다.
그 후 유럽 세력의 아시아 재정복 전쟁, 태평천국의 침략 등 수난을 겪어 오다, 세계대전 후 다시 독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으니만큼, 일본 측에서 제시한 ‘해상방위동맹’에는 꽤 흥미를 보이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동맹의 결성은……”
“……우리에겐 절대로 좋다고 말할 수 없죠.”
동명, 칸발리크, 평양 등 바다와 가까운 입지에 주요 도시를 둔 고려와 몽골 입장에선, 영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될 대로 되지 않고서야 그들이 해상 봉쇄에 나서진 않겠지만, 그런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려와 몽골은 일본의 눈치를 볼 수밖에.
“다리다만이 아닙니다. 아직 예비 단계의 접촉으로 보입니다만…… 정황상 수상쩍은 움직임이 마닐라, 에스파냐, 보우슈엥, 베트남 쪽에도 있었습니다.”
군의 첩보 기관으로부터 보고를 받는 강태훈의 말이었다.
“수상쩍은 움직임이라면?”
“말씀드린 나라들의 첩보 요원들과 일본 측 요원들의 만남이 포착됐습니다.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일본이 아이누, 류큐, 다리다와 진행 중인 협상을 생각해보면 뭘 추진 중인지는 대략 추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외교가 아니라 군 첩보 쪽에서 보고가 올라왔다면, ‘일본은 고려에 들키지 않게 일을 추진하고 싶어한다’는 뜻.
“어지간히도 우리 심기를 불편케 할 일인가 보군요. 보우슈엥, 마닐라, 베트남이 그 ‘해상방위동맹’에 가담하면 단순한 약소국과 중견국들의 상호 방위 조약 이상이 됩니다.”
“보우슈엥과 베트남은 섬나라가 아니라 대륙에 한 발 걸친 나라들이지요. 요컨대, ‘해상방위동맹’은 바다에서의 방어를 넘어서서, 두 나라를 교두보 삼아 대륙에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세력이 됩니다.”
“특히 보우슈엥과 베트남은 서쪽으로는 바라트, 동쪽으로는 ‘다이온’ 세력 사이에 놓일 테니, 더더욱 이 동맹에 가담해 생존 방법을 모색할 이유가 크지요.”
조유관도 강태훈의 말에 동의한다. 두 군사전문가의 의견이 일치한다면, 이 사태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아요. ‘에스파냐’와도 접촉했다는 게 저는 마음에 걸리는군요.”
리안의 지적에 두 장관도 끄덕였다.
잉카 대륙 동쪽의 브라질, 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를 비롯한 각 지역에 식민 대국을 건설한 나라.
옛 포르투갈 왕국이 에스파냐의 동군연합으로서 합병된 뒤, 그 위세는 거의 세계를 정복할 듯했다.
아즈텍 연방과의 대서양 전쟁에서 패배하고, 신성 제국과의 전쟁이나 세계대전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그래도 간신히 식민 제국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에스파냐에게, 동아시아에 남은 몇 안 되는 거점인 마카오는 실로 소중한 보물일 터.
“일본이 에스파냐와도 접촉한 건, 유사시에 에스파냐 해군이나 기타 경제적 지원을 받으려는 거겠죠. 그렇게 해서 ‘해상방위동맹’은 든든한 뒷배를 확보하는 셈이고.”
“에스파냐가 일본과 그 동맹국을 지원하면, 정말로 보통 일이 아니게 됩니다. 에스파냐의 국력도 국력이지만, 에스파냐는 유럽에서 신성 제국을 견제하는 동맹의 일원이라는 점에도 주목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