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21)
폭격기가 급강하한다.
전장이 마치 거대한 농경지라도 되는 양, 기관포는 쟁기처럼 파헤친 자국을 남긴다.
참호가 만든 가로줄과, 방금 폭격기가 남긴 세로줄. 바둑판 같은 그 전장 곳곳에, 한때는 사람이었던 고기 파편이 점점이 흩어졌다.
전장 한켠에 황하를 두고 벌어지는 대회전.
그 거대한 넓이만큼 긴 참호가 이어지고, 그 참호를 따라 검붉은 흔적이 남아 어디가 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인지 보여주고 있다.
격렬한 싸움은, 곧 잔혹한 싸움을 의미한다.
한 인간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되는 혈액을 상실해야 하며 얼마나 많은 기관을 파손당해야 하는가.
시체 주변, 삶을 움켜쥐고자 한 자국들이 그 답을 보여준다.
인간은 어이없이 죽기도 하지만, 반대로 상당히 질기기도 하다. 그 질긴 목숨이 끊어지기까지의 과정이 거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전장의 뒤처리를 하는 군인들은 그 흔적, 흔적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과정, 그 과정에 있었을 고통을 상상하며 진저리쳤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신들은 그렇게 되지 않아서 안도한다. 그렇다. 전장을 치울 여유가 있는 건, 언제나 승자 쪽이다.
고작 안도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쁘다.
이겨서 기쁘다. 이긴다는 것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살아남아서 기쁘다.
어떤 이는 집으로 돌아가면 폐인이 될지도 모른다. 전장의 풍경을 잊지 못하고 범죄자가 될지도 모른다. 끝내 자신의 몸을 전장 삼고 목숨을 적 삼아서 최후의 전쟁을 마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상처만 안고 살아갈지라도,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기쁨이다.
소박한 인간적 소망이, 타인의 죽음을 기뻐하는 비인간적 욕망으로 화하는 곳.
전장은 그런 곳이다.
***
물론, 그건 전선에 나가 매 순간 목숨을 걸어야 하는 군인들의 시선이고, 뒤에서 전체 작전을 통괄하는 높으신 장교들의 시선은 달랐다.
그런 장성들도 전선을 직접 시찰하다가 전사하는 경우도 많다.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아군 전선 뒤쪽에서 머뭇거리던 적과 조우하는 바람에 전사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보통 ‘이기고 있다면’ 그런 운 나쁜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군대의 ‘두뇌’가 되는 인재들은 최우선 보호 대상이니까.
그래서 전선 군인 개개인의 감상은 사령부에서는 잘 논해지지 않는다. 대략적인 분위기 정도는 전해지겠지만, 어디까지나 다음 작전을 펼치기 전 판단의 근거일 뿐이다.
“그럴 일은 애초에 없었겠지만, 반란군 수중에 항공기는 없는 듯하다. 이로써 제공권은 확실히 확보됐다고 봐야겠군. 우리가 이런 식의 근접항공지원이 계속 가능하다면, 키타이 내에서 반란군을 몰아내는 건 시간문제다.”
울제이와 참모들 시점에서는, 폭격기는 각종 무기로 육상 전력을 박살내는 무기이기 이전에 제공권의 장악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다.
지상에 바싹 접근해서 기관포로 지면을 긁어대는 공격이 얼마나 잘 수행되고 있는가, 그래서 육군의 작전 수행 효율이 얼마나 올랐는가.
“하지만…… 생각보다 반군의 수가 많다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참모 하나가 표정에도 말투에도 염려를 가득 담아 의견을 말한다.
작년 몽골 전역을 전쟁터로 만들었던 반란은,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오랫동안 몽골의 뿌리를 좀먹고 있었기에 그렇게 대규모로 일어났다. 그들은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는 동시에, 정계와 군에도 파고들었으니까.
하지만, 한족 반군은 사정이 다르다.
“이들의 정치세력이라고 해봤자, 우리 몽골인들에게 충성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충성의 대가로 인정받은 약간의 자치권이 정치의 전부죠. 군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 충성하는 자들이 반군과 내통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나?”
다른 참모가 이의를 제기한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겉으로는 친몽파인 척,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여러 가지 지원을 하는 무리가 있기는 할 것이다.
철저히 몽골인이 되어 군인으로서 출세하고자 하지만, 속으로는 언젠가 한족 독립을 위해 군사적 재능을 갈고 닦는 자도 있을 테고.
“그런 자가 다수라고는 할 수 없지. 이 정도 규모의 반란은 그들만으로는 설명이 안 돼.”
“분명 한족 자본가들이 있고, 그들 중 성향이 의심스러운 자들도 있긴 하지. 하지만 아무리 자본이 많아도 이 정도 규모의 무기 밀매가 가능하리라고 보긴 어려워.”
밀매도 꼬리가 길면 밟히기 마련이다. 특히 무기류의 반입은 국가에서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고, 한족 독립 운동 세력도 권총 등 소화기 위주로 한정된 수량만 들일 수밖에 없을 텐데…….
“저들은 이번처럼 대규모 회전을 가능케 하는 소화기, 중화기 물량을 확보했다. 제공권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상당히 어려운 전쟁이 됐을 거다. 다른 출처를 생각해봐야 해.”
“낭키아스에서의 반란과 다르게 흘러가는 건, 단순히 환경의 차이 탓도 있지 않나?”
또 다른 참모가 의견을 제시한다. 대륙 서남부의 산맥과 숲을 전장으로 하면, 반란군은 소규모로 게릴라 전을 펼치며 저항하는 전투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화북의 넓은 평원을 무대로 하는 키타이 쪽 반군은 그런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한 번의 결전을 통해 키타이 정부군을 정면에서 격파, 그 기세를 꺾어볼 심산이었던 듯하다.
“인구 면에서든 지형 면에서든, 아니면 다른 측면에서든 반란군에 동조하는 자들을 얻기도 쉬웠겠지. 동조하지 않는다면 점령지에서 그냥 징발해도 상관없고.”
“저들이 예상보다 많은 무기를 확보한 건 사실이지만, 적병 상당수가 화기를 갖추지 못하고 냉병기만 들고 돌진해왔다는 보고도 있네. 적의 무장 상태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한족의 머릿수를 믿는 건가. 큰 희생을 치르더라도 어쨌든 전장에서 우리를 물리치는 데 성공하면, 우리는 일단 수도 개봉을 방어하는 쪽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터. 그 틈을 노려서 재정비할 속셈이었나.”
반란군이 재정비를 한다면 어디서 할까. 가만히 앉아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낭키아스 쪽 반란군이 국경을 넘나들며 전력을 보충하듯이, 탕구트령 관중분지, 심하면 티베트령 파촉분지로 넘어가 신병을 긁어모으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해당 국가들의 한족들을 선동하는 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그렇기에 이번에 적을 크게 격파한 건 실로 다행한 일이다.
“어쨌든 민중 봉기는 민중 봉기다. 병사들의 무장도 그렇지만, 개개인의 숙련도도 우리 키타이군에 비하면 형편없이 낮아. 이번 전투로 큰 타격을 입고 사기까지 꺾였을 적을 과대평가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적의 무기가 어디에서 흘러들어왔는지는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지. 이건 전후 처리와도 관련된 문제다.”
그때까지 참모들의 의견을 듣고만 있던 울제이가, ‘으음’하며 목을 울렸다. 참모들의 시선이 그들의 칸을 향한다.
“과대평가하다가 적을 섬멸할 적절한 기회를 놓치는 일도 있어선 안 되지만, 적이 무장을 어디서 공급받았는지도 어물쩍 넘어가면 곤란할 것이다. 죄를 지은 자가 벌을 받지 않고 넘어가게 되니까. 그건 곧 훗날의 위협을 방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게다가……”
울제이 칸은 여러 작전도와 서류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는 탁자 앞으로, 몸을 조금 숙였다.
“소수지만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잔당이 한족 반란군에 가담한 정황이 포착됐다.”
“……그들이 무기를 공급했을까요?”
“무기를 공급했을 수도 있고, 다른 기반을 제공했을 수도 있지. 이를테면 병사들을 훈련하고 통솔하는 방법이라든가.”
생각해보면 반란군은 그냥 숫자만 믿고 달려든 것은 아니었다. 조잡하긴 했지만 참호를 팔 줄 알았다. 둔하고 겁이 많지만 어쨌든 명령에 반응할 줄은 알았다.
“장교들의 지휘를 받는다는 뜻이지.”
울제이는 여기까지만 말한다. 그 뒤는 다시 참모들의 토론이 이어진다.
“참호를 판다든가 하는 단순한 명령은 내릴 수 있어도, 기민한 작전을 펼치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하지 않나? 제대로 된 장교단을 양성하지도 못할 텐데.”
“하지만 이제 더는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는 게 명백해졌지. 시간이 흐르고 살아남은 자들은 점점 ‘실전 경험’을 쌓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신중하게 나가면 적들은 ‘훈련의 기회’도 얻게 되고.”
“그나저나 그 알타이 자유 공화국인지, 범 알타이 인민동맹인지 하는 것들도 참 저열한 무리들이군. 그들이 일어설 때는 몽골 민족 국가 건설인지 제일주의인지 내세우지 않았었나?”
“그런 자들이 잘도 한족 반군 세력에 기어들어 갔군. 어차피 역적 종자들이 내세우는 이상이 허울뿐인 건 마찬가지니,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거겠지.”
물론 나름의 논리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몽골인과 한족이 각각의 민족국가를 건설해 서로를 ‘분리’하는 최종목표를 공유한다, 그러니 목표의 달성까지는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는다는 식으로.
하지만 지금 키타이의 참모진에게 그런 논리는 코웃음 한 방에 날려버릴 빈약한 변명이다.
참모들의 논의는 앞으로의 진압 방향으로 넘어간다.
“낭키아스뿐만 아니라 탕구트, 티베트까지 넘나든다면, 그 뿌리를 뽑기 위해선 이들 나라와의 공조가 필요하다. 기껏 키타이 내 한족을 몰아냈더니, 그쪽에 가서 독립국가를 건설해버리면 의미가 없으니까.”
“그런 반란국가들이 다시 키타이나 낭키아스의 ‘동포’들을 도운답시고 도발을 해올 수 있고.”
“탕구트 측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것으로 판단된다. 관중분지 일대에서 자생한 반란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지만, 우리 쪽에서 일어난 반란이 국경을 넘어서 관중분지로 들어갈 거라곤 더더욱 생각 못 한 듯하더군.”
“자신만만하게 ‘우리 일은 우리가 해결한다’고 해놓고선…….”
참모 하나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찬다. 그도 그럴 수밖에.
몽골 내전 막바지에 울제이 칸은 탕구트 영토를 통해 우회해서 빠르게 북상하려 했다. 하지만 탕구트는 몽골 내전에 휘말려 들기도 싫고, 한족 반군을 상대하는 국내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싫다며 거절했었다.
그때 탕구트 국경을 통과했다면, 기습의 효과도 있어서 더욱 빠르게 진격했을 테고…… 카라코룸도 울제이 칸의 것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움이 남아 있기에 이 참모는 짜증을 내는 것이다.
결국 알타이 자유 공화국이 장악했던 지역과 탕구트 국경이 맞닿는 곳을 통해, 자유 공화국의 잔당이 들어와서 탕구트를 어지럽히고 있지 않은가.
“탕구트의 경제 규모와 인구를 생각해보면, 한족 반란 진압에 우리보다 더 큰 곤란을 겪을 것은 분명하지. 뭐 어쨌든, 한심하긴 하지만 슬슬 우리 쪽에 공조를 요청할 듯하다.”
“반가운 소식이긴 하군. 국경을 넘어가서,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계속하면 그만 아닌가?”
“다만 예상치 못한 저항에 부딪힐 가능성은 생각해둬야겠지. 좀 더 압도적인 전력이 필요할지도 몰라. 어쨌든 이 반란 진압은 최대한 시간을 아껴야 한다. 그래서 말인데……”
그 참모는 울제이 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