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20)
한족 봉기가 낭키아스 서쪽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건, 단지 동쪽에 군과 경찰력이 몰려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민중 봉기의 성격상, 중화기나 항공기를 동원하기는 어렵다. 특히 항공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중화기는 일부 한족 출신 군인들이 중화기를 가지고 봉기에 가담하는 경우, 봉기군이 중화기가 있는 무기고를 습격해 탈취하는 경우 확보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진압군의 중화기, 혹은 항공기를 피하려면 산이나 숲이라는 지형을 이용해야 한다.
전장인 동시에 봉기군이 몸을 숨길 거점으로 쓸 수 있기에, 자연히 봉기는 서쪽에서 집중됐다.
게다가 서쪽에서 볼 수 있는 이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반란군 새끼들 국경 넘나들면서 보급받고 머릿수 채워서 온다는 말이 있던데.”
고려군 병사 하나가 투덜댄다. 다른 병사가 물을 마시다 말고 그 말에 대꾸했다.
“어쩐지 숫자가 안 줄어드는 것 같더라니.”
“아니 그럼 그 넘어간 나라들은 대체 뭘 하는 거야? 손 놓고 있는 거야? 설마 걔네가 우리 엿 먹으라고 반란군 지원해주는 건 아닐 거 아니야.”
“걔들도 반란군 때문에 골치라더라고. 그러니까 그쪽 반란군하고 여기 반란군하고 상부상조한다, 그런 말이지.”
“끈질긴 새끼들.”
그렇게 잠깐 대화가 끊긴다. 그러다 병사들 중 누군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뇌까린다.
“그럼 애초에 보충을 못하게 싹 태우면 되는 거 아니야? 산속 마을이라든가, 동굴, 숲, 가리지 말고 말이야.”
“아서라. 그런 말 간부들이 듣기라도 하면 바로 군사재판이야. 어떤 부대 애들은 마을 습격하려다 걸려서 기관총으로 걸레짝이 됐다더라. 시체도 귀국 안 시킬 거라던데.”
죽음이 가까운 전장이지만, 시체마저 고국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거라는 말에는 섬뜩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그것은 죽음 이후의 형벌이니까.
게다가 아직 ‘숙군’의 충격도 채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엄하게?”
“신수덕 새끼가 산동에서 난리 치는 바람에 이 지경까지 온 거라, 민심 장악에 온 신경을 쓴다더라고. 게다가 앞으로 다이온인지 뭔지 생기면……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건 우리나라라잖아. 윗분들이 편하고 싶어서지.”
“젠장. 윗분들 편하자고 우리는 여기서 뺑이 까야 하는 거야?”
“우리 황제 폐하가 다스린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진 않은데, 그래도 그런 소식은 집에서 편하게 듣는 게 낫지.”
누군가의 말에 모두가 포상 휴가를 떠올린다. 혹은 전역을 떠올리기도 한다. 돌아가면 자랑할 거리가 한가득하긴 하다. 그게 지금 고생을 덜어주진 않지만.
지루한 전쟁이었다.
적이 설치한 악랄한 함정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천천히 골짜기 하나, 봉우리 하나를 장악해 나가며 전진한다.
때때로 포병들이 열심히 뒤에서 포격을 해주고, 위에선 공군이 폭탄을 퍼부어주지만, 정확성은 떨어진다. 결국 보병들이 직접 들어가 지역을 ‘확보’할 수밖에 없다.
격렬한 만큼 끔찍하긴 하지만, 그래도 호쾌한 전쟁은 여기선 불가능하다. 아니 할 수 있더라도 적이 그런 전투에 응하지 않는다.
마음 같아선 장교들도 낭키아스의 넓은 국토를 활용, 기세 좋게 진군하는 적을 끌어들여 포위 섬멸하거나, 방어선을 짓이기고 들어가 적의 사령부에 타격을 입히고 싶지만…….
적은 전선을 숲과 산 아래에 감춰 모호하게 만들고, 사령부는 절대로 노출시키지 않는다.
아니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적의 명령체계가 돌아가는지 파악하는 일도 어렵다.
“……또 왔다.”
고려와 낭키아스의 간부들과 함께, 낯선 군복을 걸친 장교 하나가 전방 부대들을 둘러보고 있다. 일본공화국군 장교다. 관전무관이라던가.
“우리가 애꿎은 민간인 공격하진 않나 감시하는 게 주 임무라던데, 그것보다는 우리가 전투를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은 거겠지.”
“피는 우리가 흘리고 수업은 공짜로 받아 가겠다?”
“뭐 쟤들은 육상전 경험이 부족하니까. 20년 전에 멈춰 있을 거 아냐. ‘현대적’인 전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열심히 배우지 않으면 뒤처지겠지.”
이해는 하지만, 기분은 썩 좋지 않다.
“높으신 분들은 우리 군의 전력을 노출하긴 싫은 모양이야.”
그래서 이단이 전투에 참여하는 일도 드물다. 기갑사는 더더욱 그렇고.
그런 신병기를 노출하면 일단은 ‘군사적 위협’으로 간주된다. 일본의 불필요한 경계를 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무슨 병기인지, 어떻게 만드는지…… 누구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면 기술을 얻을 수 있을지 궁리하게 된다.
“기갑사 하나만 와도 시원시원하게 갈 텐데.”
“내 말이.”
지루한 전황만큼, 지루한 패턴의 불평은 오늘도 이어진다.
***
조유관, 최효윤, 주견하 세 사람이 태사 앞에 모였다.
“그간 티베트, 탕구트, 대예, 보우슈엥, 이 4개국은 몽골 내전에 휘말릴까 봐 한족 봉기 문제에 협력하기를 꺼렸지만, 지금이라면 공조를 제안해도 좋지 않을까요?”
한족 봉기와 몽골 내전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던 1930년의 상황에선, 어떤 몽골계 정부와 협력한다는 건 다른 몽골계 정부를 적대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31년 3월 중순에 접어든 지금, 알타이 자유 공화국은 완전히 제압되었고, 게레센제와 울제이의 카간위 분쟁도 어느 정도 잠잠해졌다.
카라코룸에서는 범 알타이 인민동맹 잔당이 거의 제압된 것으로 판단된다는 김천열의 보고가 올라왔다.
“감찰국장 말대로, 그 네 나라에 공조를 제안해보는 게 좋겠어. 그들도 한족 반란 때문에 골치를 앓는 데다, 한족 반군은 국경을 넘나들면서 서로 돕고 있다는 보고까지 올라왔거든. 외무장관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타당하다고 봅니다. 내전이 끝나고 다이온 연방의 창설을 앞둔 지금, 외교 창구를 최대한 많이 확보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즉, 친구를 많이 사귀어야 한다는 거죠. 소홀했던 친구는 다시 돌아보고, 멀리했던 사람도 불러서 안부라도 묻고…….”
리안은 끄덕인다. 네 나라와의 협력은 그저 한족 봉기를 해결하는 용도로만 쓰이진 않을 것이다. 어쨌든 외교는 창구를 한 번 열어두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일본 쪽에서는 협상에 만족하면서 물러난 것 같지만, 방심할 수는 없어요. 막상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에 가서는 고려의 한족 진압 문제를 걸고넘어질지도 모르죠. 그걸로 우리가 곤란해하면 얼씨구나 좋다 협상 카드로 써먹을 테고.”
그러니까, 그런 문제가 터졌을 때 고려의 편을 들어줄 나라를 많이 만들어둬야 한다.
“그 네 나라와 공조하면, 일본이 한족 문제를 걸고넘어졌을 때 이의를 제기해줄 겁니다. ‘일본은 한족에 대한 동정심에 눈이 멀어 우리가 고통받고 있는 건 보이지 않는가!’하는 식으로……. 그래서 이번 평화회의에는 우리 고려의 이름으로 네 나라를 초청할 생각이고요.”
“고려뿐만 아니라 몽골이나 키타이, 낭키아스도 그 나라들의 참석에 동의한다면 더 효과적일 겁니다.”
조유관의 말대로,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다 동원하면서 만전을 기해야 한다.
이번 평화회의는 내전 이후 고려가, 그리고 미리안 정권의 외교 역량이 평가받는 첫 무대. 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다.
리안은 정리하듯 명령을 내린다.
“그럼 외무장관께선 티베트, 탕구트, 대예, 보우슈엥 4개국과의 협상을 준비해주세요.”
“네. 그런데, 각하. 그…… 차 장관이 바라트 문제에 관해서 보고를 올렸다고.”
차무룡 재무장관은 리안으로부터 상당한 재량권을 받아서 업무를 수행 중이었다.
사실 대공황 문제가 터진 이래, 재무장관이 해야 할 일은 리안이 어떻게 하라고 간섭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것이었다.
리안은 경제 문제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을 자극하지 않는 선’만 지키라는 방침을 내렸고, 나머지는 차무룡에게 일임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올바른 판단이었다.
차무룡은 대공황 문제에 손을 대면서 동시에 4개국 관세동맹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감독했다. 고려가 몽골 내전에 개입한 이후로는 그 자금을 지원하느라 진땀을 뺐다.
동시에, 전임자인 여준설이 남긴 과제도 꾸준히 진행해왔다.
여준설 시절부터 각국 경제 분야 책임자들 사이에서 이야기는 나왔지만, 쿠아우테목 테러 이후 없던 일이 되다시피 했던 프로젝트.
“바라트 연방의 세계 무대 복귀 말이군요.”
바라트와 고려 간 무역협정을 맺고, 바라트를 국제 교역에 정식으로 복귀시킨다.
그리하여 바라트로 인해 발생하는 시장의 왜곡을 줄이는 한편, 대공황 극복의 실마리를 찾아나간다…… 는 목적으로 진행된 사업이었다.
차무룡이 바로 얼마 전, 바라트 재무장관과의 비밀 협상을 마치고 리안에게 보고를 올렸던 것이다.
“네. 이런 경제적 관계의 증진은 그대로 정치적 관계, 즉 외교 관계의 증진으로 연결 지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고려가 바라트의 손을 잡아끌어 국제무대에 복귀시킨다면, 상당한 주목을 받을 겁니다.”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는 찬사를 받겠죠. 공산주의자들은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겠지만, 평화의 화려함은 그런 의심을 덮기 마련이니까요.”
“그렇습니다. 갈등 이슈는 더 큰 평화 이슈로 덮을 수 있죠. 마찬가지로, 일본이 설령 이의를 제기한다 해도 ‘바라트가 정상 국가로서 국제무대에 복귀한다’는 사건 앞에선 ‘별것 아닌 일’로 치부된다는 겁니다.”
아시아의 두 강국이 평화 체제를 수립한다. 고려나 몽골이 몸집을 불린다 해도 어쨌든 최소 수 년은 이어갈 평화 체제를 내세운다면 유럽은 환영할 것이다.
“로마 제국은 거기 끼어들어서 ‘공산권은 더 이상의 확장을 멈추겠다는 약속’을 얻어낼지도 모르겠지만.”
“그거야 그때 가서 개별적으로 해결 볼 문제입니다. 어쨌든 바라트를 이번 6차 평화회의에 데리고 나가는 것, 그 자체로 이득은 막대합니다. 예를 들어 아즈텍에서 어떤 변고가 발생한다고 치더라도,”
“바라트와 우호 관계를 맺으면 양면 전선은 피할 수 있다, 는 거죠?”
“그렇습니다. 군사적으로도 이익입니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견하가 질문을 던졌다.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 편한 대로 이용해먹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일정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텐데, 장관께선 그 대가를 어느 정도로 예측하고 계신지?”
장관급 되는 사람에게 일개 국장이 던지는 질문으로는 불손하다. 그러나 이 정권의 서열상으로는 엄연히 견하가 우위에 있다. 게다가 조유관은 견하에게 많은 빚을 졌다.
“페르시아 및 중앙아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완료된 나라들과는 정식으로 수교한다는 조건을 내밀 걸세. 동쪽으로는…… 딱 버마까지만 혁명의 확장을 인정한다고 타협을 봐야겠지. 라타나코신이나 베트남, 티베트, 대예는 완충지대로 둘 생각이네.”
조유관은 그렇게 말해놓곤 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구상이 어떠한가 검토해달라는 시선이었다.
리안은 말 없는 끄덕임으로 조유관의 구상을 승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