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19)
“우리 일본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본 대사는 그렇게 말했다. 모호한 말이다.
미리안은 일단 시치미를 떼기로 한다. 그래야 상대가 좀 더 속내를 비칠 테니까.
“우리 고려는 일본에 해가 될만한 일은 하지 않은 걸로 기억합니다만. 대체 무엇이 일본을 그렇게 절박하게 했는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말하곤 10대 소녀 같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한다. 그 과장된 천진함에 대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모르겠으니 설명해봐라’라는 표정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원하는 바를 대놓고 말해보라’는 거겠지.
대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기네 입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즈텍의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건 태사께서도 아시겠지요.”
“일촉즉발이라고 들었습니다.”
다 알고 있으면서 딴청인가……. 하지만 일본 대사는 그런 불쾌감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예의도 예의지만 일단 대화의 방향을 이렇게 잡은 이상 설명을 계속해야만 했다.
“아즈텍은 세계대전에서 고려와 일본의 우방이었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마냥 우호적이기만 한 관계는 아닙니다. 이웃한 나라들 사이가 으레 그렇듯 경제, 문화적 파트너인 동시에 경쟁자이지요.”
명확한 수치와 기준을 정해두고 지도 위에 국경을 그어도, 막상 실제 지형에 철조망을 설치할 때는 논쟁이 오가기 마련이다.
하물며 ‘바다 위의 국경’에 대해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어떤 면에서 보면 고려보다도 더 아즈텍의 정세 변화, 그 위협적 상황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게 일본의 입장이다.
“특히 우리 일본은 하와이 왕국의 존속을 두고 갈등을 빚은 역사가 있으니까요.”
공화국이 된 이래 일본의 외교 정책은 주변 바다를 지키면서, 우호적인 국가를 최대한 많이 두어 ‘완충지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북방에서는 아이누와 동맹을 맺어 고려와의 사이에 완충지대를 두고, 남방에서는 류큐와 동맹을 맺어 명 이래 역대 한족 왕조와 완충지대를 두었다.
아즈텍이 성장한 후로는 하와이와 동맹을 맺고 태평양 동쪽에서 밀려오는 위협에 대처했다.
중간에 하와이라는 완충지대를 뒀기 때문에, 일본과 아즈텍은 태평양에서의 패권 다툼을 피할 수 있었다.
아즈텍이 기습적으로 하와이를 병합하기 전까지는.
일본은 격하게 항의했다. 일본이 동쪽 바다의 안보를 위해 하와이와 동맹을 맺었듯, 하와이 역시 자국의 안보를 위해 일본과 동맹을 맺었었다.
따라서 일본이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간다면, 아이누, 류큐와의 동맹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두 나라가 뭘 믿고 일본의 집단 안보체제에 협력해주겠는가. 차라리 더 강한 나라에 의탁하거나, 일본과의 사이에서 중립 외교 노선을 타느니만 못하다 판단할 것이다.
그리하여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아즈텍 간 갈등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함선을 대규모로 건조하고 아직 아즈텍의 손길이 닿지 않은 섬들을 자국으로 편입시키면서, 해군 기지 및 요새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태평양과 대서양, 두 개의 대양 사이에 자리 잡은 아즈텍도 마찬가지 길을 걸었다.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이 전쟁으로까지 번지지 않은 건, 순전히 다른 전쟁이 먼저 터졌기 때문이다.
태평양 건너편에서는 태평천국이, 대서양 건너편에서는 신 이슬람 제국이 일으킨 대전쟁.
침략당한 유럽과 동아시아를 지원하며 자연스럽게 동맹관계를 형성했기에, ‘태평양에서의 갈등’은 일단 불문에 부치게 되었다.
“뭐 우리도 이미 기정사실이 된 하와이 합병을 물려라, 그렇게 아즈텍에 요구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전쟁이라도 벌이지 않는 이상 하와이 합병 이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지요. 우리는 그저…… 일본이 ‘하와이 다음 차례’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국가의 존속. 안보 정책의 궁극적이면서도 기본적인 목표.
고려와 아즈텍의 국력 차가 명백하듯, 일본과 아즈텍의 국력 차도 메꿀 수 없다.
그러면서도 아즈텍이 일본에 어떤 야욕을 드러낸다면 맞서 싸워야만 하니, 일본은 아즈텍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리안은 대사의 말에 끄덕였다.
“그것은 우리 고려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예, 그렇겠지요. 일본에 대해 하와이가 그러했듯, 고려에 대해 우리 일본이 그러하니까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오래된 교훈은 굳이 끌어다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만약 아즈텍이 미쳐 날뛰다가 일본을 병합하려 들면, 고려는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전쟁마저 불사할 테니까.
허동주가 세웠던 아즈텍과의 전쟁 계획. 그게 무모하다고 비난했던 리안이지만, 아즈텍 쪽에서 먼저 전쟁을 걸어온다면 그녀 역시 ‘저항’이라는 선택지 말고는 고를 게 없다.
“아즈텍이 어찌어찌 대공황을 극복하고 안정을 되찾아, 정상적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된다면야 우리 일본도 한시름 덜겠지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아즈텍 국체의 전면적 변화…… 이를테면 내전을 통한 격변이 예상됩니다.”
그 결과 극단적 파시즘 정권이 탄생할 수도 있고, 새로운 공산 정권이 탄생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일본에는 위협이 된다.
“아즈텍에 내전이 일어나리라고 보시나요?”
리안의 질문에 이번엔 일본 대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태사께선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보십니까?”
내전을 통해 권력을 공고히 한 정부수반이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우리 일본은 주변국 중 벌써 두 나라가 내전의 불길에 휩싸이는 걸 보았습니다. 세 번째가 아니 일어나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요.”
게다가 고려가 개입하고 일본이 간섭하는 한족 봉기 문제 역시 ‘내전’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벌써 네 나라가 내전에 휩싸였던 셈이다.
아즈텍이 내전 없이 정상화되리라고 낙관할 수는 없다.
“어쩌면 대공황은 이렇게 세계를 휩쓸며 내전을 흩뿌리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대공황의 타개책은 내전이라는 극단적 에너지 표출에 있는지도 모르지요.”
일본 대사는 씁쓸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표정 역시 씁쓸해졌지만, 잠깐이었다.
그는 곧바로 표정을 의연하게 바로잡고, 리안을 향해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가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와 함께 ‘다이온 연방’이라는 거대한 연합을 형성한다면, 일본은 이를 위협으로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태사와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저나, 식견 있는 정치가라면 그런 위협이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만…… 국민들의 생각은 다를 겁니다.”
바다 건너편, 동서 양쪽으로 호전적인 군사 강국의 출현. 혹은 강국들의 급격한 군비 확장.
리안은 일본 대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슬슬 일본의 의향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해상 무력 시위는 단순히 고려나 몽골, 앞으로 형성될 다이온 연방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무력 시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기네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대공황은 일본 역시 두들겨대고 있다. 일본의 정치적 상황은 다른 나라에 비해 무척 안정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권에 대한 불만이 들끓지 않는 건 아니다.
일본 내부에도 공산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가 있고, 극단적 민족주의자가 있다. 세력이 작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지만, 방임해도 좋은 수준은 아니다.
물론 군사적 위협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겠지. 그래서 일본은 일단 무력 시위를 통해 국민들에게 성의를 보이는 한편, 이렇게 고려와 외교적으로 접촉해 ‘안전 보장’을 받으려는 것이다.
한족 봉기 진압에 있어서 각종 전쟁 범죄를 우려한 것은, 물론 완전히 겉치레인 건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는 구실에 불과하겠지.
그렇다면 고려가, 그 태사가 할 일은 정해져 있다.
고려는 어떻게 일본의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인가.
고려가 일본에 군사적 위협을 가하지 않으리라는 것. 다이온 연방의 결성이 일본의 국익을 손상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단순히 고려와 일본 간 불가침조약으로는 만족하기 어렵겠죠.”
“예. 그런 서류상의 약속이 완전히 무용지물이라고까진 할 수 없겠습니다만…… 좀 더 구속력 있는 보장을 원할 겁니다, 우리 국민들은.”
다시금 살짝, 고개를 갸웃하다 리안은 제안 하나를 꺼냈다.
“재작년 고려 내전 이후에 복구에 많은 어려움이 있더군요. 작년 몽골 내전도 그렇고. 그래서 말인데, 이번 한족 소요가 진압되고 나면 일본의 기업들을 대륙에 들여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대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경제적으로 얽힌 관계가 되면, 섣불리 군사적 행동을 벌이기 어렵게 된다. 양쪽 모두 손해를 보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타협책을 찾으려 들 것이다.
체제 보장으로는 아주 그만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미 고려,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가 실시하고 있는 4개국 관세동맹. 거기에 일본도 가입하라 제안하고 싶은데요. 아, 이건 너무 나간 이야기인가?”
“관세에서도 혜택을 볼 수 있다면, 일본이 대공황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확실히 도움은 될 겁니다. 하지만 4개국 관세동맹이 지금 진행 중인 다이온 연방 창설의 기초라는 걸 의식하는 국민들도 많겠죠. 그런 사람들은 혹시 일본을 다이온 연방에 편입시키려는 음모가 아닐까 우려할 테고요. 신중하게 접근해야겠습니다.”
“그렇죠. 경제 침략으로 보일 염려도 있겠네요. 하지만, 이런 제안이 있었다는 ‘소문’을 살짝 흘리면…… 거기서 돈 냄새를 맡는 ‘일본 국민’ 분들도 계시겠죠?”
일본 대사의 미소가 짙어진다.
“물론이죠. 국가든 개인이든, 이익의 냄새를 찾는 데 혈안이 된 자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 ‘고려는 일본의 체제 안정을 보장한다, 더 깊은 경제적 교류를 원하고 있다’는 의향을 일본 정부에 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태사를 뵐 수 있어서 정말 보람된 하루였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접견실을 나서려는 일본 대사를, 리안은 멈춰 세웠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만약 우리 쪽에서 일본이 만족할만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면 어쩔 생각이었죠?”
“뭐 우리 일본이 쓸 수 있는 수단이 많지는 않지요. 예를 들어 기존의 아이누, 류큐와의 동맹을 강화한다든가, 거기서 더 남쪽에 있는 다리다도 우리의 ‘해상방위동맹’에 가담시킨다든가…….”
리안은 웃으며 끄덕였다.
“오늘 이야기가 잘 풀려서 다행입니다.”
일본 대사는 다시금 예를 갖추고 나갔다.
옆 방에 있던 효윤이 들어왔다.
“조유관 장관을 불러야겠어. 저렇게 이야기만하고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리다와 이미 협상에 들어갔을지도 몰라.”
서남쪽부터 동북쪽으로 다리다, 류큐, 일본, 아이누를 잇는 해상방위동맹의 형성.
이렇게 되면 고려는 남쪽이나 동쪽으로 나가는 해로에 위협을 받게 된다.
일본이 걸핏하면 해상 봉쇄라는 카드를 끄집어내서 자기네 의견을 관철하려 들 수 있다.
“저쪽에서 ‘합종’을 계획하면 우리는 언제든 ‘연횡’을 실행할 준비를 해둬야겠지.”
그리고…… 별로 꺼내고 싶은 수단은 아니지만, 생각은 해 둘 필요가 있다.
일본이 무척 부담스러워하는 ‘아즈텍’을 지렛대로 삼는 방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