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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60화 (260/541)

침투(18)

두 사람은 거의 완벽한 거리, 완벽한 보폭을 지키며 걷는다.

뒤따르는 효윤의 걸음과 간격도 완벽하다.

그것이 이들의 출신성분을 그대로 보여 준다.

화려한 모자이크, 찬란한 조형물들. 성당은 그 자체로 미술관이었다.

하나하나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는 소년 곁에서, 리안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성당 안을 어느 정도 돌고 나자, 소년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고려의 재상이신 미승휴 각하는 전쟁영웅이시기도 하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싶었지만, 리안은 일단 끄덕여보기로 한다.

“그렇죠. 제국의 존경받는 큰 어르신이죠.”

“후계자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더군요. 여기 콘스탄티누폴리는 먼 곳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리안은 동요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한편으로, 소년의 말을 빠르게 재본다.

병세에 대한 소문이 여기까지 전해졌을 리는 없다. 고려 제3제국의 소문은 ‘권력 핵심’ 사이를 떠돌기는 해도, 그 밖으로 나도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문은 반드시 출처가 있기 마련이고, 고려의 야별초는 그 출처를 어떻게든 찾아낼만큼 집요하다.

흘리지 말아야 할 정보를 흘린 자에겐 숙청이 기다릴 뿐이다.

그러면 로마가 스스로 입수한 첩보일까?

하지만 이 역시도 가능성이 크지 않다.

로마가 고려까지 첩보원을 보내야할 안보적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소년이 그 정보를 쥘만한 위치에 있는 것 같지도 않으니까.

그렇다면, 요즘 뜸해진 대외 활동 때문일까.

“연세가 있으시니까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는 듯, 리안은 대꾸했다.

하지만 소년의 질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후계자 후보에 올라 계십니까?”

아까보다 더 노골적인 질문이다. 리안은 가까스로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있었다.

“다른 전쟁영웅들이 후보에 올라 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영애께서 이름을 올렸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거든요.”

“이상한 말씀이시네요. 마치 제가 후계자가 아닌 상황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처럼 들려요.”

“미승휴 각하의 유일한 혈육 아니십니까?”

“그렇죠.”

“혈육이 유산을 상속받는 게 이상합니까?”

“고려의 태사 자리는 세습할 수 있는 작위가 아니에요. 우리 가문은 왕실도 아니고요.”

“그러면 이대로…… 그냥 빼앗길 겁니까?”

“애초에 저에게 상속될 유산이 아닌데 빼앗기고 말고 할 게 있나요?”

은근히…… 아니 아주 신경을 긁는다, 이 남자.

하지만 리안은 침착하게 대처했다. 질문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하기까지 하며.

소년은 음, 하는 소리를 내며 잠깐 망설인다.

그다음에 나오는 말은 빨랐다.

“고려 제국의 권력에 관심이 없다면, 저와의 결혼은 어떻습니까?”

“……네?”

이 제안은 정말로 눈치채지 못했다.

“장난이 지나치신데요, 벨리사리오스.”

리안은 한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외국인이잖아요?”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리자면, 미인이시고, 말씀에서 느낄 수 있는 지성도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이교도이기까지 하다고요?”

“형식적인 개종 절차를 거치면 됩니다.”

“……포르피로옌니토스와의 결혼이 그렇게 쉬운 일이었어요?”

포르피로옌니토스. 황제와 황후 사이에서, 그것도 특별한 ‘자줏빛 산실’에서 태어난 황자를 일컫는 말이다.

“쉽지 않으니까 말씀드리는 거죠. 좋은 기회 아닙니까? 음…… 제가 살아있는 포르피로옌니토스 중 아홉 번째라서 가능한 일이긴 합니다만.”

잘생긴 소년이고, 목소리도 멋지고 성격도 소탈하다. 그리고 황자이기까지 하다. 최상위 귀족의 혈통을 타고났다 해도 먼 동방의 소녀가 꿈꾸긴 힘든 사람이다.

그러나, 리안은 그 유혹을 간단하게 거절했다.

“그 제안은 농담으로만 받아들일게요. 외교적 문제로 번지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대답을 들은 벨리사리오스는 잠깐 멍한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하하하 맑은 웃음을 돔 천장을 향해 던졌다.

“그거 봐요.”

웃음을 그친 벨리사리오스는 그 또래다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권력에 대한 열망, 못 버렸잖아요?”

보랏빛 눈동자가 리안의 속내를 꿰뚫고 있다.

아직은 태사가 되지 않은 그녀를.

“험난한 길이 될 거예요.”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잘 알죠. 나도 그러니까.”

그 말은, 벨리사리오스도 로마의 황위를 노리고 있다는 뜻.

어떻게 보면, 목숨을 건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았다.

“그럼 저도 솔직해져 볼게요. 저는 고려에서 권력 투쟁하느라 바빠서 그 청혼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네. 응원하죠. 그래도 혹시 일이 잘 안 풀리면…… 로마로 망명해도 좋습니다. 기다릴테니까.”

“저는 연애 결혼을 추구해서요. 그쪽은 제 취향이 아닌 것 같은데. 아, 하지만 고려로의 망명 신청은 받아들여 줄게요.”

소년 소녀는, 동시에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웃다가, 소년은 다시 제안한다.

“아쉽군요. 그럼 동맹은 어떻습니까? 영애는 고려의 권력을 쥐십시오. 저는 로마의 권력을 쥐겠습니다. 그리고 우방이 됩시다. 이 정도는 괜찮죠?”

“청혼보다는 한결 나은 제안이군요.”

이날은 리안에게는 친구를 만든 날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친구에게서 ‘권력’에 대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날이기도 했다.

벨리사리오스 황자는 권력 투쟁 면에서는 그녀의 선배라고도 할 수 있었으니까.

그와 나눈 대화는, 귀국한 리안이 마음을 다잡고 당당히 후계자 후보로 나설 힘이 되어 주었다.

***

5차 회의는 ‘로마, 브리튼, 에스파냐, 에티오피아의 현 영향권을 유지한다’고 의결함으로써, 갈등을 봉합했다.

그리고 올해, 1931년에는 6차 회의를 앞두고 있다.

미리안에겐 태사가 된 이래 처음으로 맞이하는 평화회의다.

그녀는 4년 전에 만났던 친구와의 추억에서 깨어나, 다시 현안으로 눈길을 돌린다.

“유럽 각국이 아프리카를 두고 다투는 동안 우리는 적당히 이익이 될 기회를 엿볼 생각이었는데……”

6차 회의에서 고려가 중심 화두로 떠오른다 해도, 기껏해야 1929년의 고려 내전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쩌면 1930년의 몽골 내전에 대해서도 뭔가 변론을 요구받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일본이 한족 봉기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꺼낸다면 사정이 다르겠죠.”

고려 혹은 몽골과 괜히 척지고 싶어하는 나라는 없겠지만, 무작정 지지해주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은 일본이 제기한 문제를 구실 삼아, 중재를 제안하며 이권을 얻어내려 들겠지.

이제는 먼 과거의 일이지만, 한창 에스파냐와 신성 제국, 브리튼이 바다로 세력을 넓힐 때 동아시아 각국은 그들과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다.

공격자도 방어자도 막대한 희생을 치른 끝에 통상 관계를 수립했지만…….

“유럽 열강들은 이권 그 자체를 포기하진 않았습니다. 이는 분명합니다.”

따라서 괜한 개입 구실을 주지 않는 게 가장 좋다.

일본과의 문제는 일본과 풀어서,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까지 올라가지 않도록 해야겠지.

리안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결론을 내놓았다.

“내가 일본 대사를 만나보죠. 직접 이야기를 들어야 어떤 방향에서 협상할지도 보일 테니까.”

***

낭키아스 파견군 사령관 우흥섭 대장 이하 장교들은, 과연 원활한 작전 수행이 가능할지 난감한 기분으로 전황을 검토하고 있었다.

“응천에 들어올 때부터 느꼈지만, 현지 한족들의 반응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참모 중 하나의 말이었다. 그 말도 상당히 ‘낙관적’으로 돌려서 한 말이다.

현지 한족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적개’, 그 자체였다.

“응천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건, 순전히 여기에 군, 경찰력이 집중 배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심정적으로는 서쪽의 동포들이 일으킨 봉기에 가담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장강 연안, 장강 하구의 삼각주, 그 중심이 되는 도시 응천.

이 일대는 경제적, 정치적 중요성에 비례해, 한족 인구 역시 밀집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멸망한 태평천국의 수도권이기도 했던 곳입니다.”

“그만큼 태평천국을 그리워하고, 황실을 연민하는 자들도 많겠지.”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인들은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태평천국의 공격에 황실을 잃어봤으니까.

이 무슨 증오의 비극적 반복인가 싶지만, 그런 감상에 젖어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다.

고려령 발해도에서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해묵은 원한도 있어서 이 지역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들끓는다.

게레센제와 그 참모진도 한족 봉기 진압에 병력을 보내면서 상당한 병력을 여기에 남겨뒀다. 그걸로 어떻게든 억누르고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봉기를 진압하는 임무와 더불어, 지역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임무도 있다. 낭키아스 지역의 안정이 국제 정세의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 ‘중앙’의 뜻이다.”

중앙. 이는 태사부를 의미할 수도 있고, 제국최고회의나 여당인 제국입헌당을 의미할 수도 있다. 결국 그 끝에는 태사 미리안이 있지만…….

정치권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한다고 믿는 우흥섭 대장은 명확히 누구의 뜻인지 드러내는 용어는 일부러 피했다.

“최대한 주민과의 마찰을 피할 방법, 더 나아가 주민의 협력을 이끌어낼 방법을 강구해보도록.”

참모들은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한다.

말은 쉽다.

하지만 이렇게 주민들의 적개심이 깊어서야 협력은커녕, 주민과 충돌한 고려군 병사가 사고를 치지는 않을지 염려해야 할 지경이다.

흔히 있는 일이다. 주민들의 적개심 표출, 심하면 테러까지 연결되는 공격. 이로 인해 신경이 날카로워진 병사들이, 주민이 호의로 내민 음식마저도 폭탄으로 착각하고 공격한다든가, 아니면 화풀이 삼아 외진 마을을 습격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태사의 당부도 있고 하니 군법에 따라 즉결 처형하겠지만, 그렇게 해서 더욱 깊어진 적개심을 되돌리긴 힘들다.

낭키아스 파견군 참모들이 고심하고 있던 그때,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더 찾아왔다.

일본공화국의 관전무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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