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17)
오랜만에 다시 만난 장과 조르바는, 한참 동안 쓴웃음만 지으며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인 선’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관철하기가 힘들 줄이야.”
이윽고 입을 연 조르바의 말이었다.
“그러게나 말일세. 어쩌겠는가. ……국제연맹인지 뭔지 하는 건 단념해야 할 듯싶군.”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를 여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지.”
이렇게 갈등이 첨예해서야 승전국 모두가 협력하는 체제를 만들 수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중심을 잡아줘야 할 아즈텍도 다시 자기네 대륙에 틀어박혀 버렸고.
“그럼, 선을 다시 설정해야겠지. 각국이 지금 점령한 지역들을 인정하는 선은 어떤가?”
“신성 제국 쪽은 에이레 독립도 인정받고 싶겠지?”
“그렇지. 대서양이 포위된 형국이어서야 곤란하지 않나. 우리도 브리튼이 불편해할 것 하나쯤은 있어야지.”
“내놓으라, 못 내놓겠다, 그렇게 실랑이할 시간이 별로 없어. 지금 이 순간에도 공산주의의 마수는 뻗쳐오고 있으니까.”
“그건 어디까지가 진짜 염려인가? 우리 쪽에선 반쯤은 로마가 내세운 구실 아닌가 생각하는데.”
“로마도 동유럽도 다 공산화되고 나면 그런 말이 나올지 모르겠군.”
장은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가, 의자 팔걸이를 두들기거나 하며 조금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망설이는 것이다. 조르바는 그 모습을 조용히 응시만 했다.
“좋아. 서쪽으로는 카르타고,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여기까지야. 신성 제국은 로마가 확보한 국경과 동유럽에서의 지도적 위치를 인정한다. 대신 에이레 독립은 확실히 지지해줘야 하네.”
“애초에 우리 윗분들도 그럴 생각이었네. 그럼, 평화회의의 결과를 기대해봄세.”
***
추태는 수습되었다. 1910년 말부터 1911년까지 이어졌던 ‘1차’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 덕분이었다.
비록 ‘승전국 모두가 참여하는 상설 국제기구 창설’이라는 꿈은 좌절되었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전쟁으로 이어지는 사태만큼은 막아낼 수 있었다.
이 회의를 정례화하여 4년에 한 번씩 개최하자는 각국의 동의를 끌어낸 것도, 성과라면 성과였다.
그리하여 로마 제국을 의장으로, 4년마다 국제 정세의 안정을 점검하고 갈등을 조율하게 된다.
1915년의 2차 회의에서는 ‘아라비아 칼리프국’의 완전 봉쇄가 결의되었다. 이로써 아라비아 칼리프국은 외부와의 접촉이 금지되었다.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세계 각지에서 ‘다르 알 이슬람’의 부활을 외치다 추방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1919년의 3차 회의. 로마가 세계대전을 겪은 이후 루스계 공국들 사이에서는 독립과 통일의 움직임이 일어났었다. 그것을 분쇄하고 로마의 종주권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
1923년 4차 회의. 그간 브리튼 내부의 자치령 상태에 있던 에이레의 완전 독립이 논의되었다. 이는 에이레가 독립을, 신성 제국이 ‘자유 제국’이라는 위상을, 브리튼이 ‘관용의 나라’라는 가면을 얻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갈등이 한창 최고조에 달했었을 때, 어떤 임무를 맡고 브리튼에 들어갔던 장이 실종됐다. 조르바는 소식만 들었을 뿐, 다시는 장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1927년 5차 회의. 이 무렵에는 브리튼과 에스파냐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확대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면서 로마, 에티오피아와 대립하고 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에, 고려도 대표단을 보냈다. 이때 미승휴는 조카를 대표단에 동행시켰다. 경험을 쌓게 해준다는 이유에서였다.
열여덟 살 미리안은, 그때 처음으로 로마 제국의 수도에 발을 내디뎠다.
***
“간단하게, 설명 부탁드릴게요.”
그 말을 듣자, 리안을 수행하는 외교관의 얼굴에 약간의 귀찮음과 비웃음이 지나갔다.
외교관은 잘 감췄다고 생각했겠지만, 리안의 눈은 그 찰나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리안은 질책하기보다는 그냥 못 본 척 흘려보냈다.
당연하다. 자신은 그냥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 태사의 조카라고는 하지만 자식도 아니고, 후계자라 보기도 어려운 아이.
물론 미승휴가 정정했다면 이런 빈틈을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즘 미승휴는 유난히 쇠약해졌다. 다들 쉬쉬하고는 있지만, 매일 백부를 보는 리안이야 당연히 눈치채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후계자 이야기가 나온다.
미승휴 사후에는 정권의 원로들이 후계자를 결정할 것이다.
문하시중 허동주가 가장 유력한 후보라고 한다.
어쨌든 태사의 조카라는 위치에서 벗어나면, 그녀는 그저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명문가 아가씨가 될 뿐이다.
그러니 당시 그녀에겐 그 어떠한 권위도 없었다.
이 외교관이 귀찮아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것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해한다.
리안은 고려의 대표단과 함께 오긴 했지만 어쨌든 콘스탄티누폴리를 ‘관광’ 중이고, 그런 그녀의 수행원으로 격을 맞추려고 이 외교관이 따라 나온 거니까.
지금, 1931년의 리안을 아는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 1927년 콘스탄티누폴리를 도는 고급 승용차 안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리안의 옆에 앉은, 말 없는 소녀가 눈을 날카롭게 빛내지 않았더라면 외교관은 대충 몇 마디 설명만 했을지도 모른다.
아직 중학교 3학년밖에 되지 않았건만, 도대체 어디서 저런 살기를 뿜어내는 건지.
저 최효윤이라는 아이가 어딘가에 올릴 보고가 두려웠기에, 외교관은 얼굴에 진지함을 덧씌웠다.
그리고 태사의 조카가 요청한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 제5차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에선 브리튼과 에스파냐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확대하는 문제에 대해 매듭지으려 할 겁니다. 고려와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얽힌 일은 아니지만, 이번에 유럽 열강의 다툼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읽어둘 필요가 있죠.”
“로마와 에티오피아가 반대하는 입장이었죠?”
외교관의 얼굴에 감탄하는 빛이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그저 ‘이렇게 어린 아가씨가 잘 아는군’ 정도다.
진지한 외교 정책을 이야기하는 대상으로 보진 않는다.
“그렇습니다. 아프리카 해안에서 서서히 내륙으로 식민지를 확대하고자 하는 브리튼과 에스파냐의 정책은, 아프리카의 독립 왕국들을 통해 간접 통치하고자 하는 로마의 정책과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에티오피아도 동부 아프리카에서 잡은 자기네 패권을 위협받을까 걱정하고 있죠.”
그래서 이번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에는 말리, 송가이, 콩고, 앙골라, 무타파 등 아프리카 왕국들이 참석했다. 의장국인 로마의 초청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전쟁 이후로 지금까진 별말 없었잖아요?”
“브리튼과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로마의 신경을 건드리긴 했지만, 로마도 북아프리카에 광대한 식민지를 경영 중이니까요. 그래서 어느 정도 선에선 용인할 수 있다고 본 건데…… 자기네 입김이 미치는 왕국들의 독립을 위협하는 건 두고 볼 수 없다는 거죠.”
사하라 사막 이북에도 식민지는 있다. 에스파냐는 모로코를, 프랑스는 알제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들 식민지는 원래 하나였던 ‘지중해 문명권’이라는 관점에서 용납되었다.
“종교적인 문제까지 얽혀서…… 복잡합니다. 로마는 사하라 사막 이남 왕국들을 정교도로 개종시키면서 이슬람의 영향력을 제거해 나가는 중이거든요.”
로마인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 브리튼과 에스파냐의 확장은 자신들의 평화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로마는 브리튼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행에 제한을 걸거나 관세를 높이는 방식으로 제재를 가했죠. 브리튼과 에스파냐는 그 나라들대로…… 로마가 제일 싫어하는 짓을 하고요.”
“로마가 제일 싫어하는 짓이요?”
“아라비아 칼리프국과 비밀리에 통상 협정 같은 걸 맺는 거죠. 로마인들은 자기네를 몇 번이고 멸망시킬 뻔 했던 이 나라가 영원히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 나오지 않길 바라거든요.”
대립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프리카 왕국들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로마는 직접 병력을 보냈고, 여기에 맞서 브리튼은 그 왕국들의 정부 내에 친브리튼파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설마 그럴까 싶습니다만, 자칫하다간 온 아프리카 대륙을 무대로 한 로마 대 브리튼의 전쟁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이번 회의는 사태가 거기까지 가는 건 막아보자는 겁니다.”
차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관광’이라는 목적에 걸맞는 거대한 성당 앞이었다.
종교 문제에 있어서 완고하기 짝이 없는 이 나라도, 결국 수도의 오랜 역사를 관광 자원으로 삼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저와 이 애만 다녀올게요. 기다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충실히 기다리고만 있진 않겠지. 아마 멋대로 어디든 돌아다니다 올 것이다. 하지만 리안은 그것까지 다 감안해서, 성당을 돌아보기로 한다.
로마가 자랑하는 하기아 소피아는 아니다. 거기는 너무 사람이 많으니까.
그녀가 걸어 들어가는 이 성당은, 비교적 덜 유명한 곳이다.
리안이 아직 효윤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녀는 효윤에게 턱짓조차하지 않고 걸어갔다.
경호원들은 다른 차에 타고 와서는, 성당 경내 곳곳으로 흩어졌다.
엄숙한 성당 안은 생각보다 밝았다.
리안의 시야 끝 먼 곳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그녀와 동갑인 열여덟 살이라고 했던가.
리안이 쌓을 경험에는 ‘인맥’도 포함되어 있었다.
백부는 쇠약해져 가는 중에도 최고의 인물과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준, 감사한 기회.
리안은 그 기회를 헛되이 쓰지 않겠다 다짐하며 소년 옆으로 걸어갔다.
딱 보기에도 이국적인 이목구비. 예상한 대로다.
그러나 소년이 리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리안은 흠칫 놀랐다.
“……그 보랏빛 눈,”
고려어로 말하다 고개를 젓고, 품위 있게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백부는 세계적 금융 강국인 브리튼의 언어 정도는 배워두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브리튼어로 물었다.
“통역이 없으니 조금 곤란하네요.”
“저도 브리튼어는 조금 할 줄 압니다. 라틴어나 그리스어는 외국인이 배우기엔 너무 어렵죠.”
소년은 부드럽게 말하며 마주 싱긋 웃었다.
“그 눈은……?”
“네. ‘이단’이죠. 아, 종교적으로 민감한 단어니까 밖에서 함부로 이야기하고 다니면 곤란해요. 여기는 우리밖에 없고, 아실 만한 분이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리안은 역시, 라고 생각했다. 이단들 중에는 눈동자 색이 특이한 사람이 가끔 있다던데, 소년도 그런 경우인 모양이다.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