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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57화 (257/541)

침투(15)

싸늘한 술렁임이 퍼져나가지만, 리안의 손짓에 사그라든다.

비웃는 듯, 혹은 도전을 받아들이듯 미묘한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번졌다.

“주민 학살이나 일방적인 포로 처형은 우리도 피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지. 좋아. 관전무관이라도 보낼 셈인가?”

“넌지시 비치는 수준이긴 했지만, 그럴 의사인 것 같았습니다.”

“얼마든지 와서 보라고 하죠. 우리는 떳떳하니까. 다만…… 키타이군이나 낭키아스군이 사고를 치진 않는지 우리도 감독할 필요는 있겠군요.”

여기까지 대화를 듣고만 있던 전쟁장관 강태훈이 입을 열었다.

“관전무관을 보낸다면 실전 데이터를 얻어가려는 목적도 클 겁니다. 기갑사 전력을 비롯해서 최신 무기들의 노출은 가능한 삼가는 게 좋겠습니다.”

“아예 과시해보는 건 어떨까요? 이 정도로 강력한 육군을 갖췄다, 함부로 나대지 마라. 그런 경고로 삼아서.”

리안은 떠보듯 물었다. 강태훈은 고개를 젓는다.

“일본은 잠재적 적국이 아니니 부적절합니다. 이번 교섭의 목적은 일본을 안심시키고, 다이온 문제를 무난하게 풀어가는 데 있습니다.”

조유관도 이에 동의한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괜히 일본을 자극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한족 토벌 과정에 윤리적 문제가 있을 경우,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에 이를 상정하겠다는 의사도 비쳐왔기에…….”

그 말에는 리안도 조금 놀랐다.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라…… 견제할 수 있을 때 확실히 견제하고, 어떻게든 자기네들도 이익을 보겠다는 속셈이네요.”

***

21년 전인 1910년 여름 모월 모일.

신성 제국의 수도 엑스라샤펠.

보나파르트 황실은 샤를마뉴의 서유럽 통일 정신은 잇는다는 구실로 그 옛 수도로 천도를 감행했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일대를 완전히 갈아엎고 들어선 신도시였다.

여기에는 프랑스 왕실의 흔적이 남은 파리를 떠나 새 출발을 하자는 정계의 합의가 있었다.

새롭게 제국에 합병한 게르마니아와 알레마니아 지역을 원활하게 통제하고자 하는 군사적 요구도 있었다.

그렇게 세워진 도시는 혁명과 신문명의 세련미로 빛났다.

계획된 장중함이 시야 끝까지 뻗은 반듯한 도로를,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이 남자는 그가 속한 세계에서는 ‘장’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그는 지금 상층부에서 맡긴 ‘중요한 일’을 조율하러 한 식당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 ‘중요한 일’이란 끔찍했던 대전쟁의 막을 내리고 새 시대의 막을 올리는 일이었다.

도시 전체가 여름의 열기에 축제 분위기가 더해져 들떠 있다.

적의 항복 소식이 전해진 한낮부터, 밤이 깊은 지금까지도.

식당들도 이 분위기를 틈타 밤새 영업을 계속할 생각인지, 어느 곳이나 활기차다.

문과 창문, 테라스를 모두 열어두고, 빛과 향긋한 음식 냄새를 온 거리에 퍼트린다.

장은 그 중 적당히 품위 있어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중산층 가족이 오랜만에 외식을 결심하고서 선택할 법한 곳이었다.

약속 장소에는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 먼저 나와 있었다.

“조르바.”

동방의 제국에서 온 남자. ‘조르바’는 본명이 아니라 ‘장’처럼 이쪽 세계에서만 통하는 이름이다.

그는 손을 들어 장에게 반갑게 인사한 뒤, 점원을 불러 뭐라 말을 한다. 이미 구면인 두 사람은 서로의 식성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요리는 조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은 아니다. 아마 조르바는 장이 올 시간에 맞춰 미리 주문을 해뒀을 것이고, 곧 나오겠지.

“남들처럼 축배를 들고 싶지만, 맨정신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아직 많군.”

“기쁨보다는 안도가 큰 승리지.”

조르바는 장의 말에 그것 참 유쾌한 농담이라는 듯 웃었다. 반쯤은 비웃음 같기도 했다.

“그래, 콘스탄티누폴리는 함락되지 않고 끝났으니까.”

수도는 함락되지 않았지만, 조르바의 조국은 그 절반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에 큰 피해를 입었다.

장은 애도를 표하듯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오래 그러고 있진 않았다. 아까 말한 것처럼 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윗선에선 승전국들이 함께 참여하는 ‘상설 국제기구’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네. 로마 측에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향을 떠보라더군.”

“우리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했네. 허나…… 그 아이디어, 현실성은 둘째치고 솔직히 어떤 의도인지 짐작하기 힘들더군.”

장은 신성 제국과 로마 제국 사이, 인식의 차이를 통감한다.

상대적으로 덜 절박했던 신성 제국과 달리, 로마는 신 이슬람 제국의 공세를 정면으로 받아야 했다.

그러다보니 로마 제국은 ‘전쟁 이후의 세계’를 상상할 여유가 부족했을 터.

“이런 규모의 세계대전이 과연 이번 한 번으로 끝날까,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다네.”

“……또 다른 세계대전?”

조르바의 눈이 커진다. 적의 항복이 결정된 날, 또 다른 전쟁을 상상하긴 힘들다.

그것도 그 길고 끔찍했던 전쟁과 같은 규모의 전쟁이라니.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없어지진 않겠지. 하지만 기껏해야 국지적인 분쟁에 그치지 않겠나?”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하지만 조르바, 이번 전쟁도 엄밀히 따지면 ‘국지적인 분쟁’이 확대된 것일세.”

불교를 신봉하던 티무르 왕조의 붕괴. 그에 따라 일어난 여러 이슬람 술탄과 샤의 이합집산.

영원히 그런 분쟁을 반복할 것 같았던 이슬람권은, 어느 순간 폭발적인 기세로 이집트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통일했다.

그리고 그 기세를 세계대전이라는 방식으로 분출했다.

“통합 과정에서 계속된 전쟁으로 비대해진 자신감, 호전성. 덩치에 비해 형편없는 사회 시스템. 그로 인한 내부의 모순, 터져 나오는 불만.”

신 이슬람 제국이 그 모든 걸 해결할 방법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전쟁뿐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잘 알지 않나?”

세세한 전개는 다르지만, 동양의 태평천국이 전쟁에 이르게 되는 과정과도 유사하다.

“작은 분쟁이 쌓여 세계대전이 된다면, 작은 분쟁들이 일어날 때마다 조율해 줄 국제기구가 필요하다네.”

다소 열기를 띤 장의 말에, 조르바는 피식 웃었다.

“자네가 이 일에 더 열심인 것 같군. 우리가 하는 일은 그저 윗선의 일들이 매끄럽게 흘러가도록 예비하는 것…… 아니었나?”

“이제는 지나간 세계대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야 한다는 건, 나나 자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소망 아닌가.”

조르바는 잠깐 말을 잃었다가, 이내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렇게 잠깐 감상적인 결의를 다지는 남자들 사이로, 주문했던 음식이 놓였다.

식사를 하는 틈틈이,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그 ‘상설 국제기구’라는 것,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운영된다는 건가?”

“여러 가지 안이 나왔지만 공통점만 추려보자면…… 승전국을 중심으로 자금을 각출해서 운영해나가되, 주요 업무는 일단 패전국의 감시부터 시작하자더군.”

“패전국이 다시금 국력을 회복해 복수에 나서지 못하도록 만들어야겠지.”

“재무장 금지야 당연한 거고, 전쟁 배상금을 제대로 지불하는지도 감시할 걸세. 벌써부터 ‘국제연맹’이라는 이름을 붙인 분도 있지. 그리고 국제연맹의 ‘연맹군’으로, 연맹의 요청에 응하지 않는 패전국을 무력 제재한다는 주장도 있네.”

“배상금이라…….”

조르바는 그 단어를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시선을 잠시 접시 위로 떨궜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전쟁에서 이긴 우리도 돈이 없는데, 패전국에 배상금으로 지불할 돈이 남아있을까?”

조르바의 말은 패전국의 처지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급하게 찍어대는 바람에 휴지만도 못하게 가치가 폭락한 돈은 필요 없네. ‘배상’이라면 그 말에 걸맞는 뭔가를 내놓아야겠지.”

“무엇을……?”

“영토, 자원, 인민.”

조르바는 로마가 입은 피해, 승전국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을 패전국의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면, 영토로 환산하자고 주장한다.

아마 그것이 로마 제국의 입장이기도 할 것이다. 그 입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상설 국제기구’에도 참여를 거부하겠지.

장은 일단 말을 돌린다.

“국제기구 창설을 비롯해서 패전국의 영토 할양, 승전국의 영토 획득…… 그런 것들을 모누 돈의할 ‘평화회의’가 열릴 걸세. 그 장소는 콘스탄티누폴리로 하자는 게 우리 쪽 모든 정파의 공통된 견해고.”

요컨대 신성 제국 측은 이번 전쟁에서 로마의 공로가 가장 크다고 인정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평화회의를 로마 제국이 주관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배려는 단순한 상징, 혹은 시간 끌기나 말 돌리기에 불과하다.

조르바가, 로마 제국이 원하는 대답은 단 한마디도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조르바는 장의 말을 무시하고, 하던 말을 이어서 했다.

“패전국의 영토를 분할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면, 패전국은 반드시 예전 국력을 회복할 걸세. 그러고 나면 무슨 생각을 할까?”

-아, 전쟁은 참으로 무용한 것이구나.

-승전국의 관용에 감사하며 국제 사회의 충실한 일원이 되어야겠다.

“정말 그런 생각을 하리라 보는가?”

조르바는 자문자답하듯,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이런 생각을 할 걸세.”

-승전국은 운이 좋아서 이겼을 뿐, 우리에게 완전한 패배를 강요할 힘은 없었다.

-봐라, 그러니까 우리에게서 영토를 뜯어내지 못한 것이다. 지난 패배의 교훈을 잊지 않으면, 이번에는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패배했던 건 그저 내부의 겁쟁이들이 지레 겁을 먹었거나 적의 간첩들이 사기를 꺾는 선동을 해서 그랬던 거다.

장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가 이 자리에 가져온 ‘상설 국제기구’라는 아이디어는…… 또 다른 세계대전을 막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또 다른 세계대전을 일으킬 가능성이 가장 큰 나라는 어디일까?

물론, 이전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나라일 것이다. 복수라는 명분으로 국력도 쉽게 끌어모을 수 있겠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시행착오를 몇 번이고 거듭해서 반드시 회복하고 말 걸세. 그 인민, 인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영토와 자원이 있다면 반드시!”

조르바의 말은 옳다. 패전국이 영토를 그대로 유지하면, 그건 말만 종전이지 그냥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전쟁이 터지기 전과 같은 조건으로 돌아간다면, 다음 순서로는 전쟁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실제로, 우리 연합국은 전쟁 이전보다 약해졌네. 그 피해를 벌충하고 압도적인 국력으로 전쟁을 예방하려면 패전국의 영토를 가져오는 수밖에 없어.”

강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는 조르바의 눈을 보며, 장은 이 로마인뿐만 아니라 모든 로마인의 마음에 깃들어 있을 감정을 엿보았다.

패전국의 기회 자체를 빼앗고자 하는 그 눈에는, 분노와 증오…… 그리고 공포가 가득했다.

그 감정들은 ‘로마 제국 상층부가 이 자리에서 드러내라고 명령한 것’이겠지만, 조르바의 솔직한 본심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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