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14)
주견하는 차분하게 끄덕인다.
“그렇죠. 또, 민망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그런 짓을 저지른 주모자는 아직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잡든지, 죽이든지 하기 전에는 방심할 수 없죠.”
토칸이라고 했던가. 상당히 강력한 이단이라고 들었다. 황제 폐하와 카간 폐하의 암살을 시도했을 정도라지. 김천열도 그 타깃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카라코룸 자유시의 임시 행정장관을 맡게 된 지금은 더더욱.
그러니 방심하지 않고, 임시 행정장관의 관저이기도 한 저택의 경호를 강화했다.
주견하는 계속해서 주의 사항을 전한다.
“장군께서도 충분히 알고 계시겠지만, 태사의 뜻을 받들어 이런저런 방침을 말씀드리는 게 제가 할 일이어서요. ……적의 잔당에 대한 체포와 처형을 계속하되, 카라코룸의 민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섬세하게 선별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제공하는 한 끼 식사 때문에 집회에 참여한 가난한 사람들도 ‘적’으로 보고 처형하는 짓 따위를 저질러선 안 된다.
어쨌든 지금 이 숙청의 궁극적 목적은 카라코룸, 더 나아가 국제 정세의 안정이지, 보복이 아니다.
그렇다. 주견하는 칸발리크의 참상에 격한 분노를 품고 있지만, 그렇다고 목적을 망각하진 않는다. 보복을 해도 그 유용성을 평가해서 행한다.
“이번 일을 통해 범 알타이 인민동맹을 뿌리 뽑을 순 없을 겁니다. 그 정도 실행력을 갖춘 조직을 일망타진하긴 어렵겠죠. 수십 년 뒤에 다 늙어 죽는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확실히 ‘재기 불능’으로 만들 순 있을 겁니다. 저항하려 해도 그 저항의 범위는 제한되겠죠.”
견하는 김천열을 마주 보며 가볍게 웃음 지었다.
“동명에서 몇 가지 일을 처리하는 대로 아마 다시 돌아올 겁니다. 그때까지 카라코룸의 일, 잘 부탁드립니다.”
“염려 말게. 아, 그리고…… 입학 축하하네.”
김천열도 마주 미소 지으며, 축하를 건넸다.
눈앞의 소년, 아니 이제 청년티가 나는 주견하는 제1대학교에 진학한다. 정권의 중추로 향하는 엘리트 과정을 밟는 것이다.
세대 차이가 나는 만큼 주견하가 제국최고회의나 내각에서 상당한 지위를 얻을 때쯤엔 김천열도 은퇴하겠지만, 이렇게 친밀한 관계를 맺어둘 필요는 있다.
적어도 그 자식 세대는 주견하의 덕을 볼 수 있겠지.
***
루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리안의 뒤로 걸어갔다.
그녀는 리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황제의 손길은 그만한 기품을 지니고 있어서, 마치 유혹하는 것 같기도 하고, 뒤에서 끌어안지 않을까 하는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
루우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리안의 귀에 울린다.
“견하는, 눈물을 흘릴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애야. 나는 칸발리크에서 그걸 확실히 배웠어.”
이번에는 루우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안은 가만히 듣기로 마음먹는다. 루우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그 애는 가슴 깊이 슬픔을 담고 있어. 그런데 그 슬픔을 표현할 길은 막혀 있지. 엉엉 울 수도 없고, 넋 놓고 있을 수도 없어.”
이유는 다르지만, 루우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그를 잃었다.
견하는 이단이 되면서, 그리고 그 후로도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면서 그 슬픔을 속으로 삼켜 왔으리라. 자신이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적에 대한 증오와 음모로 마음을 불사르면서 그걸 삶의 온기라고 착각한다.
그저 잊고 몰두할 일이 필요했을 뿐인데, 그것을 놀라운 집중력이라 착각한다.
“견하, 계속 이런 식으로 살면, 그 슬픔이 가슴 밑바닥에 고일 거야.”
고이면 응어리가 된다. 체한 듯 얹혀서 내려가지 않는 응어리.
응어리를 내버려 두면 썩는다.
견하의 마음이 썩는다.
심(心)의 변화가, 안 그래도 이상증세를 보이는 이단인 견하의 이와 기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 걱정되는 일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신경 써 줘야 한다.
루우는 리안의 어깨에 올렸던 손으로 그녀의 팔을 쓸었다.
사람의 피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끄러우면서도, 부드럽고 따스하다. 루우는 그대로 리안의 뒷머리에 이마를 기댔다.
마치 언니에게 응석부리는 듯한 몸짓이다.
루우는 리안의 향기를 맡는다. 리안도 루우의 몸짓 하나하나마다 피어나는 향기를 맡는다.
따스한 방 공기와 뒤섞여, 마치 방에 향초라도 피워둔 것만 같다.
“태사, 분명히 일반인이지. 견하는 초능력자, 이단이고.”
육체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태사가 초인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 초인적인 정신이지. 그런데 말이야, 태사. 모든 인간이 태사처럼 초인적인 정신력을 지닌 건 아니야.”
루우는 리안 같은 정신력과 이상을 갖춘 사람은 역사적으로도 손에 꼽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그녀의 신하이자 친구’인 사람에 대해 품는 근거 없는 기대라 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견하 그 애도 나도 그냥…… 애야. 본질은 그래. 아니 나도 어쩌면 좀 다를지도 모르지. 하지만 견하는, 확실히 주의를 기울여야 해.”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그런가. 소리 없는 말을 입술만으로 그리며, 리안은 자신을 돌아본다.
자신이 고아라는 사실을 무덤덤하게 견뎌왔고, 백부가 허동주에게 살해당했을 때도 견뎌왔듯, 견하든 누구든 그렇게 견딜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게 아닐까.
천재가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이 평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재들은 대부분의 인간이 ‘평범한’ 자신이 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거기서 천재와 범재 사이의 오해가 생기고, 천재는 고립된다.
견하가 지난 2년간 천재적인 역량을 보인 건 맞지만, 어떤 분야의 천재라 해서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리안도 그렇다.
만약 내전을 막 시작했을 때, 견하에게 기댈 수 없었다면?
견하가 그때 입맞춤에 응해주지 않았다면?
견하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지난 2년 중 어느 한 순간에,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견하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기대야 한다.
그리고 그 기댈 사람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우는 그런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 틈새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
3월. 동명에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입학식은, 드러나지 않게 숨겨진 경호원들이 곳곳에 배치된 걸 제외하면, 평범하게 치러졌다.
교복이 아닌, 정장 비슷한 차림으로 오페라 극장 같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는 각종 강연이 열리는 강당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축제 기간엔 공연 같은 것도 열린다.
견하, 루우, 효윤이 신입생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리안이 재학생 대표로 나와 환영 인사를 한다.
형식적인 인삿말, 대학 생활에서 선배들이 할 수 있는 당부의 말들을 나열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견하는 반듯한 자세로 말은 대충 흘려들으면서, 눈만 리안과 마주친다.
학생 전체를 상대로 말하면서, 견하에게만 가끔 시선을 보낸다.
명확히 보이진 않지만 그 눈빛이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이곳 캠퍼스에서 데이트를 했을 때도, 겨울이었지.
앞으로도 여기서 그때처럼 데이트를 할 수 있을까?
중고등학교 조직은 지나에게 맡겨두고, 이제부턴 이익서가 키워둔 대학교 조직을 감독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오늘은 나중으로 미뤄두자.
고등학생일 때도 태사부와 감찰국 일을 하느라 학교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듯이, 대학 생활도 그런 식으로 흘러갈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앞으로 펼쳐질 즐거운 대학 생활을 상상해본다.
상상뿐이라 할지라도.
***
제국최고회의에서는 키타이 파병 및 낭키아스 추가 파병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키타이 파견군은 장해진 대장을 사령관으로 하여 편성, 일단은 바다를 건너 산동의 발해도에 주둔한다.
아직 울제이도, 게레센제도 키타이 쪽의 지원은 별도로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중 한 명이 공식적으로 요청해오거나,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갈 경우 고려에서 먼저 지원 의사를 밝히고 교섭할 계획이다.
낭키아스 파견군은 우흥섭 대장을 사령관으로 하여 편성되었다. 이들 역시 바다를 건너 낭키아스로 들어가지만, 대기하지 않고 곧바로 한족 봉기 진압에 들어간다.
먼저 파견나와 있던 소수의 고려군 부대도 우흥섭 대장 아래 낭키아스 파견군으로 합류한다.
썩 순조롭진 않지만 이뤄져야 할 절차를 차근차근 밟으며 일이 서서히 진행된다고 다들 생각했다.
“일본공화국 함대가 탐라도 근해에 출현!”
해군의 보고를 받은 강태훈 장관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에 잠시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가, 그래도 전쟁장관답게 가능한 시나리오를 떠올리고 되묻는다.
“기습인가?”
“영해를 침범하진 않았습니다. 저쪽에선 훈련이라고 밝히곤 있습니다만……”
“전에 아즈텍 해군도 그렇고, 예정에 없는 해상 훈련을 우리 영해 부근에서 하는 걸 정말 좋아하는구만.”
대놓고 밝히기엔 민망한 의도라는 것이다.
관계를 당장 악화시키고 싶진 않지만, 우리가 당신들 때문에 불쾌한 일이 있었다고 알리고는 싶다.
이런 경우 상대방의 의도는 알아서 정치적 맥락을 읽고 해석하든지, 아니면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중개자를 찾든지 해서 알아내야 한다.
다만 이번엔, 일본공화국의 의도가 너무 뻔해서, 중개인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키타이, 낭키아스 파견군의 해상 수송과 딱 맞췄군.”
우리가 동아시아 정세에 더 깊이 개입하는 게 불만이라는 걸까. 하긴 일본공화국의 이의제기는 상당한 인내 끝에 나온 느낌이다.
몽골 내전이야 넘어간다 쳐도, 키타이와 낭키아스까지 개입해서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늘려나가는 걸 두고만 보진 않겠다는 것 같다.
“우리도 당신네 수송함대를 공격할 정도의 국력은 있는 나라다, 그러니 우리 말을 좀 들어달라. 그런 뜻이겠지. ……내각에서 논의를 서둘러야겠군.”
조유관 외무장관도 지금쯤이면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이쪽은 대사관을 통해 어떤 언질을 받았을지도 모르지. 먼저 그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
“어쩌면 ‘다이온 연방’에 대한 이야기가 일본 정계에서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을지도…….”
내무장관 안세규가 그렇게 입을 뗐다. 황제가 라디오 연설에서 다이온에 대해 밝힌 이후, 연방 창설은 사실상 정해진 미래가 됐다.
그렇다면 일본의 저런 반응도 이해가 간다. 태평양 위에서 세력권을 마주하고 있는 아즈텍의 정세도 불안정한데, 서쪽에선 4국이 통합한 강대국이 또 생기려 한다.
“그사이에 끼어서 질식사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슬금슬금 기어 올라와도 이상할 건 없겠죠.”
태사는 일본의 반응을 그렇게 분석했다.
“자, 그럼 문제는 일본공화국이 뭘 원하는가, 하는 건데.”
리안의 시선이 조유관을 향한다. 조유관은 아주 약간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일본 측에선 크게는 다이온 연방 추진을 취소하길 원합니다. 작게는 다이온 연방이 형성되어도 일본의 국체가 위협받지 않도록, 안전 보장을 요구하고 있죠.”
“전자는 받아들일 수 없고, 후자 쪽으로 교섭을 해야겠군요.”
물론 리안도 다이온 연방 같은 것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동아시아의 상태는 1929년 전처럼 4국이 우호적인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시레문이 죽었고, 루우가 고려의 황제가 되었다. 이제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다. 다이온 연방이라는 피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나름의 길을 모색하는 수밖에.
게다가 타국의 요청으로 다이온 연방 설립을 취소한다? 태사와 제국입헌당의 위신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할 것이다.
“대사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는 게 빠르겠죠. 태사부로 불러주세요.”
“예.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각하, 그 밖에도……”
리안은 의아함에 눈썹을 찡그린다. 무슨 이야기를 더 하려는 거지?
“일본공화국 측이 이상한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한족 토벌에 있어서 무고한 주민의 피해가 없는지, 살펴보겠단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