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12)
“바이다르…… 폐하의 사촌 동생?”
“그래. 그 아이가 철만 좀 들어도 내가 진땀 빼야 할지도 몰라.”
“폐하의 야망은 참 이루기가 쉽지 않네.”
두 사람은 마주 본다. 깜박임도 없이, 눈싸움이라도 하듯 한참.
이 자리에서 ‘서로의 노림수가 이러하다’고 생각해왔던 걸 정리하고, 정확한 합의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폐하의 카간 즉위. 그리고 고려와 몽골의 동군연합. 그건 반드시 추진할게. 그 부분은 이제 나도 철회하지 않겠어.”
“대신 동군연합의 구체적 형태에 대해선, 태사가 만들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둬 달라?”
“구성국 간 적절한 독립성만 유지되면 ‘다이온’이라는 틀로 묶는 것도 상관없어. 단순히 허동주가 생각한 제국주의적 발상에 반대해서만은 아니야. 폐하도 알잖아? 제국주의적 확장은 ‘불안정’과 동의어야.”
고려에서 가장 강대한 권력을 지닌 자. 카라코룸의 정복자. 그런 위광을 떨치는 리안의 말이다. 황제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 이것이 카라코룸 입성에 모두가 매달린 이유.
일단 지금은, 리안이 제시하는 대로 동아시아의 미래를 그려나갈 수밖에 없다.
“불안정, 이라…….”
많은 이들이 국토의 확장을 국력의 증대, 그 힘을 통한 안정적 사회 유지와 연결 짓는다.
하지만 국토 확장은 국경선의 확장이다. 국경선의 확장은 국방비의 증액이다. 돈의 흐름이 바뀐다.
그리고 그 국토 안에 끌어들인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의 비중이 크면 클수록, 기존 집단과 이질적이면 이질적일수록 수많은 문제들이 터져 나온다. 갈등, 혐오, 편견…….
다시 말하자면, 영토 확장은 혼돈이다.
“타이시는 본질적으로는 보수주의자지.”
“이렇게 개혁적인 보수주의자가 어디 있을까.”
“그 개혁도 결국 사회의 안정을 위한 방편이잖아. 어떻게든 안정을 유지한다, 그게 곧 보수주의지. 어떤 정책을 펼치든, 결과적으로 ‘안정’만 가져오면 된다. 불안정 요인을 제거한다. 변수를 제거한다. 그런 거 아니야?”
리안은 황제의 말에 찡그리는 듯한 웃음으로 응했다.
“좋아. 타이시 말대로 할게. 얌전히, 다이온 내부의 구성국을 엮는 상징적 군주가 되어주지.”
“그렇다면 방침이 정해졌으니 이제…… 눈앞의 일인데. 우리는 카라코룸 자유시에 ‘특별행정장관’을 파견할 거야. 폐하의 대리로 ‘자유시의회’의 활동을 감독할 예정이고.”
명분상으로 카라코룸은 선대 시레문 카간의 유산으로서 루우에게 주어진 것.
그녀가 시민들에게 시의회를 구성할 권리를 주었고, 그런 시의회를 감독할 권리는 루우에게 있다.
루우가 당장 동명시를 비우고 카라코룸으로 갈 수는 없으니, 대리인으로 ‘특별행정장관’ 자리를 만들어서 파견하는 수밖에.
“추천할만한 사람, 있어?”
“누가 갈지 정도는 황제에게 물어보겠다는 거야?”
“적절한 사람이라면.”
루우는 피식 웃었다. 그렇다. 루우가 고른 사람이 적절하지 않다면 리안은 제국최고회의에서 부결시킨 뒤 다른 인물을 골라 추천할 것이다.
루우는 그 사람에게 순순히 임명장을 내려줘야 할 테고.
-카간 자리를 향한 길은 멀고도 험하군.
“그런데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없어. 정치경찰실장인 나제홍을 보내고, 정치경찰실을 견하에게 맡기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은 들지만…… 태사가 판단하기에 아직 견하가 그 정도 지위를 차지하기엔 이를 수도 있고.”
“음…… 충성심이나 행정 능력, 맡기고자 하는 임무의 성격을 생각하면 나제홍을 보내는 게 가장 적절하겠지만. 폐하의 말대로 아직 견하가 덜 여물었어.”
잠깐 고민한 뒤, 리안은 입을 열었다.
“일단 임시로 김천열 대장이 맡게 하자. 이제 그다음 사안인데, 한족 봉기 진압에 대해 폐하와 이야기하고 싶어.”
“한족 반란…….”
아마 몽골이 내전으로 두 쪽이 나고, 시레문이 죽고서 카간 쟁탈전이 벌어지고, 고려마저 여기에 말려든 틈을 탔을 것이다.
한족들에겐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겠지. 실제로 내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이들의 세력 확장만 겨우 막았다.
진압은 내전이 끝나고서야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제국최고회의에서 추가 병력 파견을 논의할 거야. 규모는 얼마나 되고, 작전 기간은 얼마나 잡고, 지휘관은 어떻게 할지.”
“김천열 대장을 임시로 카라코룸 행정장관에 임명해뒀으니, 그 사람을 보낼 수는 없겠네.”
“소장에서 대장까지 2년 만에 쾌속 진급했으니까, 잠깐 고려 국내에서 불 바람을 피하게 해줘야지.”
리안의 말마따나 김천열은 자기 재능을 입증하며 각지에서 활약했고, 그 결과 대장까지 진급해왔다. 숙군에서도 살아남았다. 이쯤되면 시기하는 무리가 생긴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시기심을 탓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시기심 자체가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도록, 적절히 달래는 조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시기심은 일단 상대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약해진다.
“말하자면 카라코룸 행정장관 자리는, ‘부드러운 유배’라고도 할 수 있지.”
“……어쨌든 유능한 김천열은 한족 반란 진압에는 써먹을 수 없다는 말이군.”
김천열과 함께 내전에서 활약한 조유관도, 일단은 외무장관이 되어 있으니 군을 지휘할 수 없다.
“남은 장군들 중에서 신중하게 골라서 파견해야 해. 이번 한족 반란, 절대로 어설프게 제압하면 안 되니까.”
루우는 다짐이라도 받아내려는 것처럼, 무거운 어조로 말한다. 리안도 그녀의 말에 끄덕임으로 동의를 표한다.
“원나라의 유산 때문에 수백 년이 지나서도 대체 무슨 고생인지…….”
한족 문제의 직접적 원인을 꼽자면 신수덕의 학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 조상이 있듯, 신수덕 또한 또 다른 원인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세계대전 이후 태평천국 영토 분할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거기서도 만족하지 않고 더 올라가면 원나라, 즉 다이온의 한족 분할 및 약화 정책을 이 모든 난리의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게레센제가 볼로드를 비롯한 참모들과의 논의에서 이야기했듯, 한족의 ‘머릿수’와 ‘문화 동화력’은 오랜 세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한편으로 한족이 자신들의 거주 지역에서 거두는 생산력은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거대 국가를 운용할 막대한 세금 그 자체였으니까.
그러니 몇 번 약탈한 뒤 버리고 떠날 수도 없었다. 눌러앉아서 통치해야 했다.
그래서 떠올린 아이디어가 일단 한족을 나누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소수인 몽골인들만으로는 통치하기 어려우니, 그 부담을 다른 민족들에게도 나눈다.
탕구트나 티베트, 대예나 보우슈엥에 한족의 땅 중 일부를 갈라 나누어 주었다. 각자 맡은 한족들을 자기네 문화에 동화시키라 요구하면서.
이렇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겠다는 움직임이 명나라나, 그 뒤를 이은 순나라, 주나라에서도 있었다.
때로는 한족이 확장하며 송나라 시절 이상의 판도를 얻기도 했고, 때로는 패퇴하여 도로 영토를 토해내기도 했다.
태평천국은 한족과 주변 민족들 간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절정을 맞이했던 시절이다.
명나라 시대부터 시작된 해외 식민지도 최대 규모가 되었고, 거기서 나오는 막대한 부로 군을 살찌워, 고토를 되찾는다며 사방팔방 전쟁을 개시했다.
몽골과 고려가 이에 강력히 항의했고, 그 결과가 세계대전의 동아시아 전선이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고려는 산동을, 몽골은 키타이와 낭키아스 식민지를 건설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합국은 한족의 땅을 ‘더 많이 주변국에 떼어주는’ 형벌을 한족들에게 내리기로 했다.
대예와 티베트는 촉이라 불리던 땅을 나눠 가졌다. 탕구트는 한, 당, 수 같은 역대 왕조의 수도가 있던 관중 분지를 넘겨받았다. 보우슈엥도 동쪽으로 영토를 크게 넓혀, 본래 한족들이 이익을 거두던 남해의 무역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자국 영토에 ‘한족’을 품고 있다는 부담은, 고려와 몽골만 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족 봉기 문제에 골머리를 앓는 것도, 비단 키타이와 낭키아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탕구트, 티베트, 대예, 보우슈엥까지도 안고 있는 문제였다.
다시 말해 이번 한족 봉기 문제는, 잘못 대처하면 동아시아 전체의 안보와 균형을 뒤흔드는 심각한 사안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실제로 지금도 키타이, 낭키아스의 한족 봉기가 주변국들로 퍼져나가고 있으니까, 서둘러 제압해야 해. 어딘가에서 독립을 이뤄내 국가 체제를 잡으면, 설령 멸망시킬 수 있더라도 막대한 희생이 발생할 거야.”
그리고 잠깐이지만 독립국을 건설했다는 기억이 한족들에게 남겠지. 그런 경험은 절대로 안 된다. 그들에겐 철저한 체념을 심어주어, ‘독립된 민족국가’라는 꿈을 산산조각 내야만 한다.
그래야 한족을 제외한 모두가 산다.
“특별히 정예를 선별해서 보내야겠군.”
“장군들 중에 지난 내전이나 삼한반도 제압전에서 활약한 사람들을 검토 중이야.”
“이번 기회에 김천열, 조유관처럼 전쟁 영웅이 되고자 하는 장군들도 생각해봐. 재능을 발휘하게 하려면 의욕도 중요하니까.”
그렇게 말하다 문득, 루우는 덧붙였다.
“다만 전쟁 영웅이 될 욕심에 병사들을 소모품처럼 쓰는 쓰레기를 보내면, 욕은 태사가 먹게 돼. 그럴싸하게 전과를 부풀리는 사기꾼을 고르지 않도록, 신중해야겠지.”
“그나마 허동주처럼 군벌이 되어서 한 몫 건져보자, 그런 생각을 할 놈들은 지난번 숙군으로 죄다 쳐내서 다행이야.”
국민들은 ‘군을 승리로 이끈 자라면 국가도 승리로 이끌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 생각이 들어맞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건전한 국가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가려면, 정치가들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군인을 숙청해야만 한다.
군사적 업적에 의해 얻은 권력은, 다른 군사적 업적에 의해 도전을 받기 마련이다. 권력을 민심이나 이상이 아니라 군사적 해결책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경향을 통제할 수 없는 나라에는 쿠데타만 반복되고 무수한 피가 흐른다.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군인으로 시작한 정치가가 결국 군복을 벗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 자신이 민간의 원칙을 따르지 않으면, 다른 군인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뒤를 이으려 할 테니까.
“개요는 정해졌고…… 그런데 말이지, 폐하. 이번에 한족 봉기를 제압하고 나면, 한족 정책을 그대로 둘 거야? 혹은…… 카간을 겸하게 되면 한족 정책을 바꿀 생각은 없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잘 이해하지 못했기에 루우는 고개를 갸웃한다.
“한족 정책을 바꾼다?”
“선조들과 같은 정책을 계속 펼칠 거냐는 거야. 한족이 주변 민족으로 동화, 흡수되어 사라지기만 기다리는 정책 말이야.”
효과는 분명 있다. 진전도 있다. 그러나 너무 느리다. 그 사이에 몇 가지 변수만 나타나도 그 정책은 몇 단계나 퇴보한다.
신수덕이 친려파까지 학살하며 한족 지배 기반을 날려버리는 바람에 그간 쌓아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합의’ 자체가 붕괴했던 상황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때는 간신히 ‘발해도’ 정도의 선에서 마무리 짓는 듯했지만, 지금 한족 봉기를 보면 미봉책에 불과했던 듯하다.
‘복종이 곧 생존 보장’이라는 최소한의 합의도, 이처럼 간단하게 깨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폭넓은 자치권을 보장받은, 고만고만한 규모의 왕국으로 세분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몽골과 고려가 아주 약간만 욕심을 버리면 돼. 그러면 우리를 압박하던 부담에서도 해방되지.”
군비, 행정에 들어갈 모든 인력과 비용, 외교적 불안, 불필요한 갈등. 그 부담이 매우 가벼워진다.
“‘연방 헌법’ 같은 거에 ‘연방을 구성하는 모든 민족은 평등하다. 차별을 금지한다’는 식으로 명문화해두고, 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자치권을 인정하는 거야. 그러면 ‘진정한 민족화합의 연방’이라는 얼굴도 내세울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