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11)
견하는 볼로드와의 거래 내용을 계속 들려주었다.
“둘째, 여러분의 ‘해방구’는 카라코룸 내부에만 한정시키겠다.”
그건 뼈아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데렘칭은 어색한 웃음을 흘린다. 그나 ‘무당 동무’가 당원들을 설득하는 데 가장 고생했던 부분이 이거였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의 봉기는 카라코룸에만 그치지 않았다. 외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서부 국경 지대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이 지역을 장악하고 해방구를 설치했었다.
그곳 해방구만큼은 볼로드도 용인할 수 없었고, 결국 견하와 리안은 서부 국경 지대의 해방구를 철폐하는 조건으로 볼로드와 합의해야만 했다.
“지금 서부 국경 지대에 있다가 카라코룸으로 들어오는 동지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목숨 걸고 고생해서 세운 해방구인데, 다시 자본가들에게 넘겨줘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대로 혁명으로 이어나가지 않느냐는 거죠.”
“그쪽에서 잘 해결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믿는다기보다는 잘 통제하라는 명령에 가깝지만.
데렘칭은 일단 끄덕인다. 견하의 말에 반박하며 말싸움을 이어갈 생각은 없다. 어쨌든 카라코룸을 장악한 것만으로도, 지난 세월에 비하면 큰 성과다.
그리고 그 성과는 고려의 지원이 없으면 금세 무너져내린다.
“‘몽골’ 제국입헌당의 주도로 카라코룸 자치의회를 구성해주십시오. 고려의 이익에 크게 반하는 일만 아니면 주둔군 사령관도 의회의 결정을 따라줄 겁니다.”
“‘카라코룸 자유시의회’ 정도면 적당하겠군요.”
쿠릴타이에 올라온 법은 최종적으로 이 도시를 ‘카라코룸 자유시’라 부르기로 했다.
정말로 자유로운 도시로 만들지, 아니면 알타이 자유 공화국처럼 허울뿐인 ‘자유’만을 남길지는 이제 이들의 몫이다.
“태사께서는…… 귀국하신 겁니까?”
“예. 한족 반군 진압을 지원해야 하는 문제가 있으니까요. 고려군 주둔도 제국최고회의의 승인이라는 절차가 필요하고. 다만 귀국하시기 전에, 이곳 자치의회를 기반으로 칸발리크 정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힘써달라 하셨습니다.”
데렘칭은 끄덕인다.
황제 루우 테무르, 태사 미리안, 감찰국장 주견하의 목적은 명확하다.
여기 ‘몽골’ 제국입헌당, 혹은 제국입헌당 몽골 지부가 향후 루우 테무르를 축으로 하는 ‘동군연합’을 형성하기 위한 발판이 되어 달라는 것.
향후 사회주의적 개혁을 위해, 혹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개혁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라도 루우 테무르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게레센제가 좀 더 전향적인 태도로 나온다면, 달리 생각해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고.
전달 사항은 이걸로 끝인가 싶었는데, 주견하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여러분께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어떤 겁니까?”
“이번에 제국입헌당에 새로 들어오신 분들 중에서, 혹시 ‘감찰국’에 들어오고 싶은 분은 없느냐는 거죠.”
감찰국의 이름을 달고, 고려에서 보장한 신분과 지원받은 자금으로 카라코룸에서 윤택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 주견하는 그런 당근을 제시했다.
“물론 감찰국, 그리고 저의 윗선인 정치경찰실이나 태사부에서 나올 명령을 충실히 이행해주셔야 합니다만.”
상당히 노골적인 야심 표출이다. 데렘칭은 그렇게 생각했다.
노골적으로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지 않은가, 이 청년.
“……감찰국이 카라코룸에서 활동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여러분의 더 강력한 보호막이 될 수가 있죠. 또 잔당들 중에서도 ‘특별 위험분자들’이 아직 잡히지 않았거든요. 그들을 찾아내야 하는데, 현지인이 아닌 우리 감찰국만으로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데렘칭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감찰국에 들어간 당원들은 ‘우리 당’에 자금을 벌어다 주거나, 좀 더 안전한 활동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고려에 ‘예속’되는 정도도 더 강해진다.
자신이 얻은 지위와, 고려가 보장해준 힘에 취해 진심으로 루우 테무르 황제의 동군연합을 지지하는 자로 돌아설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일단은, 생각해보겠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폐하와 여기 황궁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오랜만이네.”
리안의 말마따나, 그녀와 루우 두 사람이 동명의 황궁에서 이렇게 마주 앉게 된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는 비로소 두 사람이 그럴 여유가 생겼다는 말이기도 하다.
작년, 1930년 한 해는 몽골 문제 때문에 정신이 없었으니까.
“반가운 휴식이지.”
“그래, 다음 문제로 넘어가기 전의 ‘잠깐의’ 휴식이지만, 그렇기에 반갑기도 해.”
몽골 문제를 해결했다! 끝! 방학이다! 휴가다!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휴식 중에도 앞으로 할 일을 미리 걱정하는 건 좋지 않다. 쉴 때는 확실히 쉬어야 한다.
제대로 쉬지 않으면 몸은 계속 ‘일을 하는’ 상태와 다를 바 없는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다가 몸이 한계에 다다르는 것이다.
군인으로서도, 정치가로서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스스로 건강 관리를 해야 한다.
“폐하가 ‘부황의 유산’을 요구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서준 덕분에 제대로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어.”
필요한 시점에 딱 좋은 명분을 만들어줬다. 볼로드도 그 명분에 맞춰서 움직이고 있고.
그 인간은 어차피 밀어낼 생각이지만, 타이시 자리에 있는 동안은 꽤 쓸모가 있다.
“나야 주견하가 내놓은 아이디어대로 했을 뿐이지. 오히려 주견하가 내 생각을 꿰뚫어 본 건 아닐까 싶어서 깜짝 놀랐다니까.”
“그렇군. 견하가……”
애매한 말투로 대꾸하면서, 리안은 끄덕인다.
차를 한 모금 마신다. 따뜻한 방에 따뜻한 차. 겨울의 끄트머리와 초봄의 입구 사이, 그 계절에 누리기에 딱 알맞은 윤택함이다.
두 사람의 옷차림도 마찬가지다. 황제와 태사라는 격식을 차리지 않은, 편한 옷차림. 리안은 원피스, 루우는 전부터 줄곧 즐겨 입던, 허리가 드러날 정도로 짧은 스타일의 민소매 차림이다.
둘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친한 친구끼리 집에서 빈둥거리며 주말을 보낸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실제로 두 사람은 지금 ‘동지’라 불러도 좋은 관계다. 볼로드와 시레문의 관계가 이랬을까.
리안과 루우가 함께한 지도 거의 2년이다. 2년이 채 못 되는 기간 황제와 태사는 함께 삶과 죽음의 선을 넘어왔다.
서너 살 정도의 나이 차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긴 남자친구도 세 살 연하인데…….
리안은 자연스레 그녀의 연인을 떠올린다. 주견하. 그에 대해 루우가 했던 말을 곱씹어본다.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아마 루우의…… 아버지에 관한 거겠지. 칸발리크에서 리안도 한 번 이야기를 나눴던 화제다. 그토록 당당하고 거침없던 루우가, 카간위 앞에서 망설이게 했던 이유.
견하는 언제 그렇게 루우의 깊은 마음속을 엿볼 수 있게 된 걸까.
아마 칸발리크 사태 해결을 위해 함께 활동하면서가 아닐까. 어쩌면 그 전에, 산동 전역에 함께하면서일 수도 있고.
리안은 견하와 루우가 함께 있는 이런저런 모습을 상상해 보다,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뭐야. 가벼운 질투심인가.
자신의 기분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코웃음 친다.
리안은 견하를 신뢰하고 있다. 그 신뢰는 절대적이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후계자’로도 생각하고 있을 정도다. 아니, 애초에 그에 대한 신뢰를 거둔다면 리안의 정신이 버티질 못한다.
게다가 효윤이나 견하처럼, 루우 역시 리안의 마음속에선 ‘가족’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 울타리를 기준으로 안과 밖을 구분해야, 리안은 비로소 마음의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된다.
‘안’은 신뢰하고 정을 나눈다. 이곳은 마음의 안식처로 삼는다.
‘밖’은 적대하거나 동맹을 맺는다. 이곳은 마음이 쉬지 못할 가혹한 싸움터로 삼는다.
이런 명확한 선이 없었다면 모든 걸 의심하거나, 자포자기한 끝에 파멸했겠지.
그러니 지금 이 기분은 그저, 친구가 나 외에 다른 친구가 생겼을 때 느끼는 일시적 질투심 정도다.
누군가 리안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면, 그 ‘유사 가족’ 관계에 대한 집착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리안은 그저 자신이 외로움을 많이 탄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또…… 견하의 ‘왼팔’과 그 정신 상태에 대해, 루우와 리안은 걱정을 공유하는 사이 아닌가.
대수롭지 않게 털어버린 뒤, 리안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일과 관련된 이야기지만, 동시에 두 사람의 인생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황제와 태사가 사담의 화제로 삼기에 이보다 적절한 것도 드물다.
연애 이야기…… 같은 건 하기 어색하기도 하고. 어쨌든 연상인 리안이 루우에게 연애 상담을 하는 것도 우습고, 무엇보다도 루우는 연애 경험이 없다. 이 화제는 전에도 몇 마디 하다가 끊긴 적이 있다.
“‘카라코룸 자유시’라는 이름으로 쿠릴타이에 올라왔던가?”
리안이 묻자 루우는 끄덕인다.
“그래. 통과는 거의 확정적이야. 게레센제 숙부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지만.”
“노발대발하겠지.”
“들리는 말로는 볼로드와의 대립이 극심해지고 있다던데. 제거할 생각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루우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물었다.
“게레센제 숙부의 힘을 빌려서 볼로드를 제거할 생각이야?”
“그래.”
딱 잘라 대답하고 나서, 리안도 잠깐 말을 멈췄다.
다시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 말을 잇는다.
“볼로드가 이번에 ‘카라코룸 자유시’를 두고 벌인 거래에 응할 줄은 몰랐어. 제국의 극히 일부라 해도 사회주의자들의 개혁이 뿌리내리는 건 반대할 줄 알았는데.”
“아마, 볼로드도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
모두가 모두의 뒤통수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볼로드는 카간인 게레센제와 미묘한 갈등을 빚으면서도, 동시에 타이시 자리를 노리는 울제이도 견제해야 한다.
“카라코룸은 우리 쪽에 내줘서 울제이의 세력 확대를 막고, 게레센제 카간 역시 우리를 통해서 견제한다. 그러려면 사회주의자들의 세력이 다소 커지는 것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그런 계산이지 않았을까.”
“폐하의 생각이 아마 정확할 거야. 개혁을 혐오하긴 해도, 자기 권력까지 무너뜨려 가면서 고집을 세울 인간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 볼로드와 타협해나가면 되지 않겠어?”
“글쎄. 나는 좀 급하거든. 최대한 빨리 몽골의 개혁에 착수해서 안정시키길 원해. 그러려면 타이시가 볼로드가 아닌 다른 사람이어야 하고.”
슬쩍, 리안은 장난스런 웃음을 흘렸다.
“폐하께선 볼로드가 게레센제의 권력을 서서히 약화시킨 뒤, 그가 마련해준 카간이라는 무대에 오를 생각인가?”
“굳이 요약하자면 그렇지.”
“나는 생각이 달라. 볼로드는 실각할 거야. 내가 굳이 건들지 않아도,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이지 게레센제의 손으로 제거되겠지. 볼로드가 쿠데타라든가 극단적인 방법을 쓰면 그때는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고.”
몽골이 고려와는 ‘독립’된 상태로 ‘안정’되어야 한다. 그것은 리안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방침이다.
“내 방침대로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게, 폐하한테도 좋을 거야. 게레센제는 볼로드와 싸우면서 그도 상당한 타격을 입을 테니까.”
“그 타격을 회복하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카간이 될 거야. 그때는 바이다르를 태자로 세우는 것도 가능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