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10)
문제는 거기서만 그치지 않는다.
지난 내전이, 허동주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오해한 미리안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그런 이야기가 퍼지게 된다면, 그녀를 지지하는 세력 역시 와해된다.
그 내전에는 허동주의 부당한 권력 탈취 시도를 저지하고, 광기에 찬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막는다는 대의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많은 고통을 참아냈다.
그런데 그 고통이 순전히 미리안이 다른 세력의 음모에 놀아나서 일으킨 일이라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이었다면? 그 고통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면?
아이러니하지만 루우의 황권은 리안의 권력과 견제하는 한편으로, 리안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다. 미리안이 선거를 통해 정권에서 물러나는 게 아니라, ‘체제와 함께’ 붕괴하면 루우의 권위 역시 무너진다.
다시금 혼란이 찾아온다. 그 혼란을 기회 삼으려는 무리는 많다. 대표적인 예로 신수덕도 아직 살아있고.
류성일도 불안하다. 류성일을 그저 제국의 원로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안세규와 몇 차례 접촉했던 것이 확인됐다.
미승휴가 단순히 의견 불일치로 류성일을 몰아냈을까?
류성일은 과연 ‘더 위’를 향한 욕망이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 노인의 지혜로움이 이제는 늙은이의 교활함으로만 보인다.
고개를 저은 뒤, 루우는 세규에게 짧게 명했다.
“물러가도 좋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류성일도, 안세규도 한꺼번에 옭아매려면 준비가 더 필요했다.
***
“카라코룸 특별시, 카라코룸 자유시, 카라코룸 특별행정구…… 뭐 이름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어. 정말 큰 문제는 쿠릴타이와 제국최고회의의 동의를 얻어내는 일이겠지.”
리안은 푸념하듯 말하곤 기지개를 켰다. 잠깐 시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지만, 이내 골치 아프다는 듯 찡그린다.
“구체적인 안으로 들어가면 더 복잡해. 도시 내부의 살림을 어떻게 할 건지, 고려군을 얼마나 많이, 오래 여기에 주둔시킬 건지 등등. 특히 고려군 주둔 문제야 제국최고회의에선 압도적인 찬성이 나오겠지만, 칸발리크의 쿠릴타이에서도 그럴까?”
“절대로 안 된다, 내전이 끝났다면 적절한 보상을 해주고 모든 고려군을 국경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자들부터, 경비대 수준으로 무장과 규모를 제한해야 한다는 자들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애국자’들이 나오겠죠.”
견하는 다소 냉소적인 의견을 낸다. 리안의 말을 비웃는 게 아니다. 칸발리크 정계의 작태를 비웃는 것이지. 혼자서는 사태를 해결할 능력도 없으면서 타국을 자기들 편한 대로 이용하려고만 든다.
하지만 견하는 ‘선의’로 물러나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리안도 그 점에 동의하기에 씩 웃었다. 방향은 다르지만, 리안 역시 몽골 내전을 제압한 대가로 자신의 입맛에 맞게 몽골을 개혁할 생각이니까.
“도시의 행정에 대해서는 지금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한 ‘해방구’를 그대로 적용하는 게 어떨까요? 고려에서 따로 행정 인력을 불러오지 않아도 되고, 충분히 우리에게 우호적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시민들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도 꽤 괜찮다. 일단은 ‘해방자’를 자칭하고 있는 만큼 많은 편의를 봐주려 노력하고 있으니까.
내전이 끝나고 도시에 강요되던 전시경제도 함께 끝난 데다 외부의 물자가 유입되고 있기도 하고.
“……좋은 안이긴 하네. 하지만 지나치게 세력이 커져서 막 나가는 일은 없게 해야 할 거야.”
이 도시 하나를 사회주의적인 방식으로 운용하는 것은 상관없다.
그러나 고려의 동의 없이 섣부르게 몽골 국가 전체에 자신들의 방식을 확장하려 들면 억눌러야 한다.
마찬가지로 리안이나 고려군의 권위를 부정하고 완전한 자치권을 획득하려 든다면, 그 역시 막아야 한다.
“용인될 수 있는 선은, 이 도시 만의 자치의회 정도야. 거기서 정치적 입지를 늘리다가 중앙정계에 진출하거나 하는 것도 괜찮아. 하지만 아예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려 해서는 안 돼.”
고려군과 시민군의 동맹 관계도, 어디까지나 고려군의 우위를 전제로 해야 한다.
“그렇다면 고려군 주둔 문제가 남았군. 이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해외 주둔 제한이야 제국최고회의의 동의를 거쳐서 연장하면 된다지만.”
역시 칸발리크, 볼로드와 게레센제가 주도하는 쿠릴타이가 문제다.
견하는 조심스레, 자신이 생각해두었던 방안을 꺼낸다.
“볼로드의 성향을 이용해보는 건 어떨까요?”
***
“루우 테무르 황제가…… 뭣? 부황의 유산 일부를 달라?”
새너두에서 칸발리크로 돌아온 게레센제 앞에는, 전혀 반갑지 않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마침내 카간 자리를 요구하는 건가’ 싶었지만, 머리를 좀 식히고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유산의 일부’를 달라는 것.
그것도 거저 달라는 게 아니다. 이번에 몽골을 안정시키는 데 충분히 기여했으니, 그러한 공로로, 또 선대 카간의 자식으로서의 권리로 달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본래 부모가 죽으면 그 유산을 나누어 상속하는 몽골의 전통까지 들먹인다. 울제이 숙부는 키타이를, 게레센제 숙부는 카간 자리와 낭키아스를 받았으니, 자신도 무언가 받아야 하지 않냐면서.
“어긋난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달라고 하는 그 유산의 내용이 문제다.
루우 테무르, 그녀는 ‘카라코룸’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물론 루우 테무르가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왕’이 되어 카라코룸 총독을 겸한다든가…… 하는 식은 아니다. 그랬다면 게레센제도 찬탈의 위험성을 감수하더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봤겠지만, 루우 테무르는 다른 형식으로 카라코룸의 지배권을 요구했다.
“고려군의 주둔, 자치의회의 감독권…… 이라.”
카라코룸이 무슨 조차지이기라도 한 양, 그 도시만 쏙 빼서 사실상 고려령으로 삼겠다는 이야기.
카라코룸이 고려의 수중에 들어가면, 몽골 황위와 동군연합을 향한 루우의 침투는 역시 더욱 빨라질 것이다.
고려의 수작에 더 말려들 이유는 없다. 여기서 단호하게 이야기해두지 않으면 카간의 권위가 서지 않겠지.
내전이 끝났으니 이제 견제할 건 견제해야 한다.
“카라코룸은 새너두, 칸발리크와 더불어 몽골의 오래된 수도 중 하나다. 아무리 황제가 황금가문의 적통이라 해도, 외국의 황제가 된 이상 몽골의 수도를 넘겨줄 수는 없다. 또한 황제가 고려의 어좌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혈통으로 계승권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즉 고려 황위 계승권 또한 선대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황제는 그쯤에서 만족할 줄 알라. ……이 정도면 충분한 경고가 되겠지.”
측근들에게 대략 그런 내용을 담아 답하라 명하고, 게레센제는 다른 일에 몰두했다.
그에겐 한족 봉기의 진압이 더 급한 문제였다.
***
그러나 쿠릴타이는 게레센제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쿠릴타이의 절반을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볼로드 파벌은, 루우 테무르의 뜻에 동조하며 ‘카라코룸 특별행정구법’의 입법을 서둘렀기 때문이다.
고려군의 주둔, 카라코룸 시민들의 선거를 통한 자치의회 구성 등을 기초로 하여 카라코룸만의 ‘특별한 지위’를 확립한다는 법이다.
내전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고, 향후 비슷한 비극의 발생을 방지하며, 몽골 국토의 균형 발전을 꾀한다…… 는 목적을 내세우고 있다. 어디까지나 구실에 불과하겠지만.
“볼로드 이 작자는 대체 무슨 짓을……!”
홀로 침전을 오가며 노성을 질러봤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낭키아스에서 데려와 쿠릴타이에 앉혀 둔 측근들은, 볼로드 파벌에 비하면 힘이 없다.
그렇다면 강제로라도 쿠릴타이를 해산하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당장 자신을 선출해 준, 그래서 게레센제의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쿠릴타이를 자기 손으로 문을 닫으면 모순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전통을 중시하는 군인들이 전통의 상징인 ‘쿠릴타이’를 억압한 게레센제를 계속 지지해줄 리도 없고.
때맞춰 여론도 심상치 않게 움직였다.
직접 목숨 걸고 칸발리크를 구원한 루우 테무르는 카간이 되지 못하고, 조카를 겁박한 숙부가 카간 자리를 앗아갔다는 소문.
칸발리크가 정상화된 이후로 계속 떠돌던 소문이지만 요즘 들어 크게 확산되는 바람에 게레센제를 곤혹스럽게 한다.
그 소문은 결국 이런 방식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정당한 카간은 역시 고려 황제인 루우 테무르가 아닌가?’
‘아버지의 유산 한 푼 내주지 않고 외국으로 내쫓다니, 그런 숙부가 어디 있나?’
‘적어도 카라코룸에서의 이권 정도는 내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시레문 정도의 권위가 있었다면 볼로드 파벌이 날뛰는 걸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게레센제에겐 아직 그 정도의 권위는 없다.
이를 간다.
볼로드는 정말로 ‘다이온’이라는 강대국을 건설할 생각이다. 게레센제가 군주로서의 업적을 보여주길 기다리기보다는, 루우를 통한 동군연합이라는 ‘지름길’을 택할 생각이다.
“없애야 한다.”
언제가 되든, 어떤 대가를 치르든, 볼로드는 게레센제의 정권에서 치워버려야 한다.
당장은 이 난동에 굴복할지라도, 그 치욕만큼은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 게레센제는 다짐했다.
***
“카라코룸이냐, 서부냐,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볼로드에게 몇 가지 양보를 해야 했죠.”
볼로드의 성향상 시민군, 그리고 그들을 조직하고 지휘하는 사회주의자들을 용인할 수는 없다. 그래서 리안과 견하는 몇 가지 제안을 내밀었다.
“첫째, 그토록 골치 아픈 사회주의자들은 우리 고려의 통제 아래 두겠다.”
‘깡패 동무’는 방금 받은 ‘제국입헌당 당원증’을 슬쩍 넘겨다본다. 본명이 아니라 ‘깡패’를 그대로 몽골어로 옮긴 ‘데렘칭’이 이름을 적는 곳에 올라와 있다.
그 무성의한 번역에 쓴웃음이 나왔지만, 뭐 그렇다고 ‘깡패’가 대단한 몽골말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애초에 ‘깡패’도 아즈텍 동부의 유럽계 불량배들이나 브리튼의 폭력배들에게서 유래한 ‘깡’에 무리를 뜻하는 ‘패(牌)’ 자를 붙인 것에 불과하니까.
그럼 이제는 ‘데렘칭’이라는 호칭을 쓰도록 할까, 라고 생각하며 깡패 동무는 견하에게 물었다.
“실상을 알고 나면 볼로드든 카간이든 꽤 당황하겠군요. 우리가 전부 제국입헌당 당원이 될 줄은 몰랐을 테니까요.”
“당황은 해도 여러분을 함부로 건드리진 못하겠죠. 그랬다간 고려 본토에 있는 제국입헌당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형식적으로 제국입헌당에 입당하고 당원증까지 받았지만, 고려에서 뭔가 강요하는 건 없었다. 이름만 바뀌고 실상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계속하면 된다.
‘제국입헌당’이라는 이름은 그들을 칸발리크 중앙정부로부터만 지켜주는 게 아니었다. 도시 내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반란군 잔당, 울제이에 동조하는 군인들의 횡포로부터도 지켜준다.
몽골 사회주의자들을 대거 제국입헌당으로 받아들인다는 행위 자체가 ‘보호’의 의지를 천명한 것과 다르지 않다.
사회주의자들, 시민군들이 위협당하면, 고려는 본토에 벌어진 일인 것마냥 신속히 개입하겠다는 의지.
따라서 적들이 아무리 사회주의자들을 아니꼬워해도, 대대적인 보복 진압을 생각하면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토칸이 살아있으니, 아예 보복이 없으리라고 장담하긴 어렵지만.